## 225화. 너희들 대체 뭘 한 거야?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청적에 갔다. 조용하니까. 조용한 곳에 가고 싶으니까.
그런데 거기에 가짜 황제가 있었다.
그쪽도 조용한 곳을 찾아왔던 듯, 가짜 황제는 내가 가니 돌아가 버렸지.
그런데 이젠 개운호가 왔어. 와서 시비를 걸다가, 가는 척하다가 돌아와서는 ‘천년비와 무슨 사이냐’고 묻는다고?
대체 그가 어떤 계기로 그런 질문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뜬금없이 나와 천년비는 왜……?
차라리 개원이와 무슨 사이인지에 대해 캐물으면 몰라.
입을 벌리고 멍하게 쳐다보기를 한참. 개운호가 한쪽 눈썹만 씰룩였다.
“그렇군요.”
그러더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무슨 대답이라도 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알겠습니다.”
“아직 아무 대답도 안 했는데.”
그 말에 황당해 되묻자. 개운호는 덤덤하게 말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 대답할 거 같아서요.”
거기까지 말한 개운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받다가, 지금 나는 쟤랑 자존심 싸움을 할 게 아니라 그냥 비연궁에 가야 할 때란 걸 깨달았다.
개운호가 왜 나랑 천년비가 무슨 사이냐고 묻는진 모르겠지만, 속내도 속내거니와 어쨌든 저놈과 얽혀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개운호 저자는 나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은 범인 중 하나잖아?
개시시의 사촌 오라비라지만, 개시시를 만나러 와서 비연궁 안에 멋대로 들어오진 못할 테지.
판단을 마치자마자 나는 말 없이 일어서서 휙 몸을 돌렸다.
개운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시선은 계속해서 등에 따라붙어 있었지만.
* * *
“황궁에 다녀왔다며?”
개운호가 집에 도착하자, 개원이 차가운 물에서 수박을 꺼내며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른 거야? 곤란하면 말 안 해도 돼.”
개원의 질문에, 개운호는 식탁 의자를 빼서 걸터앉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다고 설명하진 않았다.
“왜 그래? 시시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기분이 나쁠 만 한데도, 개원은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다정한 목소리로.
천년비 사건 이후로 형제간의 사이가 이전보다는 틀어졌으나, 그래도 개원은 거친 말을 쓰진 않았다.
운호는 수박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황궁에서 나서기 전에 사하비단을 처리하라 하셔. 나한테 지시한 일이지만, 사실상 우리 가문에 내린 명령이라 봐도 되겠지.”
“사하비단이 무림 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긴 한데. 황궁에서 나설 정도인가?”
“그쪽에서 황족들을 죽이고 있나 봐.”
운호의 말에 개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정말인가?”
“뭐. 날 불러서 그런 농담을 하진 않으시겠지?”
“그자들이 정말로 미친 건가. 대체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군.”
개원은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운호는 그런 형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떠보았다.
“굳이 형이 아니라 날 부른 데는 다른 뜻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네 솜씨를 들었으니 널 부르신 거지.”
그러나 개원은 조금도 넘어오지 않았다.
운호는 그가 수박을 딱 반으로 자르고서 먹기 좋게 조각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좀 더 깊게 떠보았다.
“그럴 리가. 나는 무림에서 그리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아. 오로지 형의 명성만이 출중하지.”
“그야 네가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네 실력에 대해 다 알잖아.”
“어쨌든 황제가 그 ‘알만한 사람’에 속하진 않잖아? 그렇지만 황제는 영웅으로 이름난 형을 두고 날 불렀어. 이유가 뭘까? 내게 이 일을 맡기면, 나뿐만 아니라 형까지 나서야 하는 걸 알면서, 굳이 왜 날 불렀을까?”
개원은 수박을 운호에게 건네다가 주춤했다. 그 미약한 떨림을 운호는 발견하고 웃었다.
“형님. 내가 황궁에 갔다가 누굴 보았는지 알아?”
“글쎄.”
“형님이 우리 집에 데려왔던 그 여자. 천반숙이라던가, 그 이름 이상한 여자를 봤어.”
“!”
“천빈 마마라던데.”
“…….”
“혹시 그 여자 때문에 폐하께서 날 부르신 걸까?”
운호는 형의 눈을 샅샅이 들여다보았지만 개원은 흔들림 없이 미소 지었다.
“설마.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겠지.”
* * *
운호 그놈은 대체 여기 왜 왔던 걸까?
이제는 내가 원래 아주 강한 무림이었단 걸 알았으니, 떡돌이가 또 내 무공 훈련을 위해 개씨 집안 사람을 불렀을 것 같진 않은데.
그러면 그냥 개시시를 보러 온 걸까? 아니면 따로 시킬 일이 있었나?
그런데 시킬 일이 있어서 불렀다면 왜 굳이 운호를 불렀지? 개원이를 부르는 게 나을 텐데?
아아. 그래. 떡돌이는 개원이와 내 사이를 알지. 어쩌면 그래서 개원이를 안 부른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역시 왜 부른 걸까? 생각이 꼬리물기를 하다 보면 자꾸만 같은 방향을 맴돌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전에 읽던 일기장이 떠올랐다.
막 발견한 후에는 내 일기장에 자기 일기를 쓴 사람이 뭐라고 지껄였나 보려 노력했는데.
뭐든 책 종류는 펼치기만 하면 자꾸 졸린 데다, 막상 보니 별 내용이 없기에 그냥 때려치워 버렸지.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 손은 꼭꼭 숨겨 놓은 그 일기장을 꺼내고 있었다.
나는 일기장을 가지고 침상에 누우면서 문 너머를 향해 궁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혼자 있고 싶으니 들어오지 마.”
이렇게만 말해 두어도 궁녀나 태감들은 다 들어오지 않지.
나는 일기장을 펼쳤다.
-시작은 셋이었으나 중간엔 둘이 되었고, 결국 아무것도 남지 못했다
이 부분은 일기장 전체로 따지면 중간 즈음 지점이지만, 다른 사람이 쓴 일기 부분으로 따지면 첫 시작점이다.
전에 내가 보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그 부분을 펼치고서 다음 장을 넘겼다.
-모월 모일 모시, 네가 커다란 부채를 들고 왔다. 그게 무엇이냐 물었더니, 너는 그게 품격이라 대답했다.
무슨 소리냐고 묻자, 네가 부채를 세워서 나를 긁었다. 역시 악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월 모일 모시. 네가 물장구를 치더니 내게 과일이 먹고 싶다고 했다. 무슨 과일을 먹고 싶냐고 묻자…….
전에 봐도 생각한 거지만 정말 잠이 오는 내용이야. 무슨 일기장이 이렇게 삭막할까. 역시 그냥 잠이나 잘까?
그러다가 나는 부채 부분에서 잠시 흠칫했다.
개운호가 내게 부채로 얻어맞고서 갑자기 천년비에 대해 묻던 게 떠올라서.
“…….”
아니겠지? 순간 뜨악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아닐 거야. 그럴 리가.
개운호가 내 일기를 이어서 쓰진 않았을 거야
만약 개원이 날 죽인 게 아니라면 개운호 이 새끼가 날 죽인 새끼인 건데.
잠시 미심쩍은 마음에 들지만 나는 고개를 젓고 일기를 마저 읽었다.
-무슨 과일을 먹고 싶냐고 묻자, 너는 사과라고 대답했다. 일부러 수박으로 사다 주었다. 너는 그걸 받고서도 좋아했다.
문득 개운호가 일기를 쓴 사람이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이렇게 못돼먹었지?
그러다가 문득 앞에 어렴풋하게 내가 이 부분을 쓴 게 떠올라 일기를 펼쳤다.
* * *
날짜 : 모월 모일 모시.
날짜를 똑바로 쓰고 싶은데 동굴에서 계속 지냈더니 시간관념이 사라졌다.
그래서 오늘 날짜가 뭐냐고 물었더니, 개원이가 내가 쓴 일기를 힐긋 보다가 “철학적이네.” 하고 간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웃기만 한다.
*
날짜 : 아까랑 같은 날
개원이가 너무 더워하는 것 같아서 커다란 부채를 만들었다.
부채를 주고서 어떠냐고 자랑하자, 개원이가 이게 뭐냐고 묻는다.
개원이는 이게 부채란 걸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이게 제갈세가 자식들이 들고 다니는 거랑 다르게 생기긴 했다.
그 자식들 부채에 달린 깃털은 풍성하고 예쁜데, 내가 만든 부채에는 깃털이 그냥 다섯 개 붙어 있을 뿐이니까.
그조차도 각기 다른 새들이 떨어뜨리고 간 거라 제각각이다.
이게 부채라고 말하면 개원이가 내가 멍청하다 생각할까 봐, 나는 일부러 엉터리로 말했다.
“이건 품격이다.”
개원이는 차갑게 웃으면서 물었다.
“네 품격은 빈약하군.”
그 말을 듣는데, 순간 너무 화가 나서 개원이를 부채 모서리로 그어 버렸다.
개원이는 놀라서 나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안 되지 안 돼. 개원이는 소중히 대해야 해. 개원이는 정파놈이지만 내 소중한 사람이라고.
*
날짜 : 저번이랑 다른 날
갑자기 과일이 먹고 싶어져서 개원이에게 부탁했다.
“장터에 다녀오는 길에 나한테 과일 사다 주면 안 돼?”
나는 장터에 가기 쉽지 않다. 내가 장터에 가면 암살자들이 졸졸 따라붙으니까.
개원이는 흔쾌히 물었다.
“뭘 먹고 싶은데?”
“사과.”
*
날짜 : 같은 날 점심
개원이가 오지 않네. 장터가 먼 곳에서 열리나?
*
날짜 : 저녁
드디어 개원이가 왔다. 게다가 사과가 없다면서 대신 수박을 가져다주었다.
무거웠을 텐데. 감동이다.
날 위해서 이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개원이 외에 세상에 또 있을까?
* * *
나는 내 일기장을 보다가 도로 덮었다. 뭐지? 단순히 착각이 아니었다. 내 일기장이랑 사건이 같은데?
그럼 이 뒤 내용을 이어서 쓴 사람이 개원이? 하지만 개원이는…… 내 일기장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았는데.
의아해서 다시 앞부분을 살피고 뒷부분을 살피기를 반복하고 있자니, 차이점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날은 과거 시점으로 내 일기를 따라서 적었고. 어떤 날은 내가 죽은 후 시점으로 자기 일상을 적었고. 어떤 날은 아예 생략되어 있네.’
예를 들어, 개원이와 호수에서 수영을 하다가 물장구를 친 날이 있는데, 나는 그 날이 몹시 마음에 들어서 아주 구구절절 일기장에 적어두었다.
그러나 꽤 길게 적은 부분인데도 이 얘기는 뒷부분에 나와 있지 않다.
반면 개원이와 말다툼을 한 일은 생각도 하기 싫어서 짧게 적었는데, 그 일에 대한 소감은 아주 구구절절 장대하게도 적어놓았다.
차이가 뭘까? 의아해하며 일기를 팔랑팔랑 넘기는데, 꺼림칙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너는 죽는 순간까지 나와 형을 구분하지 못했고, 나는 네가 죽고 나서도 진짜 너와 사람들이 말하는 너를 구분하지 못했다.
나는 일기장을 들고서 그걸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걸 보는 데 순간 등골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죽는 순간까지 누구랑 누구를 구분하지 못해?
얼굴이 흡사하게 생긴 쌍둥이 둘이 떠오른다. 개운호랑 개원이.
‘형’이라고 했으니까 이 구절을 적은 건 동생 쪽일 거고. 그러면 이거, 개운호가 적은 글귀인가?
아니, 잠시만. 잠시만. 머리가 터질 거 같아.
어차피 날 죽인 사람이 개원이 아니면 개운호 둘 중 하나라 생각했으니, 개운호가 날 죽였든 개원이 날 죽였든 놀라운 부분은 없다.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 구분하지 못했다’ 이 부분. 이 부분은 대체 뭐야?
나는 다시 일기장을 앞으로 넘겼다가 도로 뒤로 넘기기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동굴에서 내가 개원이랑 지낸 날의 일부. 그 일부는 개운호가 나랑 있었단 거야?
몰래? 아니, 몰래일 수가 없다. 나와 개원이가 동굴에서 지낸 날은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개원이가 없을 때 개운호가 기가 막히게 찾아왔을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그러면 말이 어긋나는 부분도 있고 할 텐데. 나는 개원이랑 지내면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어.
그 말은…… 이게 가능하려면…….
‘개원이도 알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