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눈치가 엄청나게 빠르구나
천년비만 쫓아다니던 형이 가까스로 상처를 누르고 만난 새로운 여자 천반숙.
이름이 괴상하지만, 천년비가 아니란 이유만으로도 부모님들의 환호를 받았던 성격 이상한 여자.
개씨 가문에서 좀 머무는가 싶더니 결국 떠나버려서 행방도 모르게 됐는데. 그 사람이 천빈이었다고?
개운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개 대인?”
곁에 선 태감이 의아한 듯 그를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아아. 아니네.”
개운호는 빙그레 웃고서 그쪽으로 가자며 손을 저었다.
하지만 그는 개시시와 마주하고 앉자마자, 바로 천빈에 대해 물어보았다.
“시시야. 전에 네가 그랬지. 천빈을 형과 함께 본 적 있다고.”
“기억력 좋네. 그런 것도 다 기억해?”
“형과 천빈이 만났을 때 이야기를 해줄래?”
개시시는 개운호의 부탁에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걸 왜?”
“궁금해서.”
개운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장난치듯이. 조금 호기심을 돈단 듯이.
개운호는 고지식한 개원보다 좀 더 가볍고 능글맞은 편이어서, 어르신들로부터 신뢰를 덜 받았고, 영웅다운 면모나 존경할 만한 인상도 없었다.
하지만 또래 청년들은 개운호와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다.
그런 운호가 사람 좋게 웃으면서 시시를 조르자, 곁에 선 궁녀는 뜨악해서 입을 벌렸다.
궁궐 사내들 중 이런 사람은 보기 드물기에 더욱 놀란 것이다.
하지만 시시는 평소에 보던 게 있기에, 그냥 어처구니없어 웃어댔다.
“이상한 게 다 궁금하네. 별거 없어. 그냥 첫 만남에…….”
“첫 만남에?”
“싸웠네. 생각해보니 별거 있었구나. 분위기 진짜 안 좋았어.”
“싸우다니?”
“천빈, 당시엔 천 귀인이었는데, 음. 생각해보니 좀 이상했어.”
“뭐가?”
“원래 천빈은 천년비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 편이었거든. 그런데 원이 오라버니가 천년비에 대해 좋게 말하니까 천빈이 불쾌해하더라고. 의견이 다르니 어떻게 됐겠어? 둘이 사이가 안 좋아졌지.”
운호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러던 두 사람인데, 후궁이 개원과 둘이서 그렇게 오래 돌아다녔다고? 사이가 나쁜 사람이? 그럴 리가. 심지어 둘은 연인 행세도 했는데?
“혹시 천빈이 언제 입궁했는진 알아?”
“꽤 오래됐을걸? 내 입궁 몇 해 전에 왔다니까. 입궁한 시기로 따지면 승진을 빨리한 편은 아니래.”
하지만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올라오던 의심은 천빈의 입궁 시기를 듣자 다시 흩어졌다.
천빈이 입궁한 지 오래되었다고?
천년비는 죽었는데 형은 천년비와 대화한 것처럼 말하는 거나, 천년비에게만 마음을 열던 형이 연인이 죽은 지 일 년도 안 되어서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는 거나, 장공주가 죽었다 살아났다는 이야기 등등이 합쳐져서 천빈에 대해 ‘혹시?’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천빈이 그 전부터 있던 사람이라면…… 그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게 된다.
“왜 그래?”
얼굴이 들뜨는가 싶던 개운호가 갑자기 기가 죽어 시무룩해지자, 개시시는 의아해졌다.
“왜 그래? 뭐 때문에 그래?”
“아니. 아니야. 아마도.”
* * *
“어휴, 장공주님 장례식 때문에 큰일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마마 책봉식이 점점 밀리고 있잖아.”
책상 앞에 앉아 좀 더 쉬운 서책을 보고 있자니, 원웅과 부성이 한숨을 내쉬며 툴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을 보자, 두 사람이 아기 옷에 수를 놓으면서 연신 주거니 받거니 걱정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걱정해? 어차피 책봉식은 할 거잖아.”
그 모습이 웃겨서 묻자, 둘은 그게 그렇지가 않다고 갑갑해하며 말했다.
“책봉식이 밀리고 밀리다가 나중까지 밀리면 어떡해요, 마마.”
“아기님이 태어났을 때 또 품계를 올려주실지도 모르는데. 책봉식이 그날까지 미뤄지면 품계가 한 번밖에 못 올라갈지도 모르잖아요, 마마.”
나름대로 둘 다 계산을 했구나. 하지만…….
“지금 했다가 미운털 박히느니 편안할 때 하는 게 나아.”
지금 책봉식을 해봐야 누가 기뻐한다고. 우리 비연궁 식구들이나 기뻐하려나?
태후 마마도 떡돌이도, 아직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책봉식을 해 봐야, 기쁜 마음이 아니라 의무감에서 이루어질 거다.
나는 궁녀들과 책봉식 이야기하기를 그만두고 상의를 걷어 내 배를 살폈다.
내가 배를 까자, 원웅과 부성도 수틀을 내려놓고 얼른 다가왔다.
두 사람은 곧 신기하다는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와. 마마, 이제 조금씩 회임한 티가 나는 거 같아요.”
“그래도 아직 생각만큼 부르진 않았어요.”
나도 흐뭇하게 내 배를 문질렀다.
이 안에 든든한 먹을거리가 들어 있을 때와는 다른 기분으로 배가 불렀지만, 그래도 좋긴 좋았다.
하지만 기껏 우리 계란이에게로 향한 화제는 다시 떡돌이 이야기로 돌아왔다.
“폐하께서 공주 전하 장례식 이후로는 후궁들에게 아예 발길을 끊으셨는데. 괜찮을까?”
“천빈마마가 가면 들여보내 주긴 하시는데. 다른 사람들은 일절 거절하고 계신가 봐.”
“우리 마마께도 밤에 찾아오진 않으시잖아.”
“혹시 그사이에 다른 후궁이 폐하를 유혹하기라도 하면…….”
궁녀들도 나름대로 걱정이 많구나. 이런저런 걸 다 신경 써야 한다니.
하지만 내 생각에, 장공주 다음으로 당장 떡돌이 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후궁이 아니라 타천천일 거라고 본다.
타천천은 대체 선황제 서신을 모아다가 뭘 하려는 걸까?
그것도 진짜 서신이 아니라, 그렇게 여러 통의 글씨를 여러 건이나 고쳐 적은걸?
그런 서신을 가지고 있어서 득을 보는 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황손들뿐 아닌가?
타천천은 선황제의 친척도 아닐뿐더러, 맞다고 해도 갑자기 그런 서신을 한 통 가지고 나타난 사람을 대신들이 믿어주려 할까?
몰라. 사람들이 조금 혹할 만큼 인기가 있는 건 사자 친왕 정도인지도…….
떡돌이가 골치 아플 만하다.
장공주 일도 장공주 일이지만, 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아 여기저기 다닐 수가 없겠지.
옆에서 들은 나도 이렇게 머리가 어지러운데. 본인은 얼마나 괴롭겠어?
* * *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간만에 청적에 가게 되었다.
마음이 한가하니 청적에 앉아 풀이나 보면서 우리 계란이에게 엄마와 아빠의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기해줄 생각이었다.
“어?”
그런데 청적에 가보니,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떡돌이?”
“…….”
아니구나. 가짜인가 봐.
내가 눈썹을 치켜뜨고 쳐다보자, 가짜는 내 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서 물러났다.
나는 가짜가 앉아 있던 곳으로 가보았다. 잘게 찢은 풀잎이 버려져 있었다.
‘이걸 왜 이러고 있었지?’
그걸 들어 올리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뜻밖에도 그곳에 있는 건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어떤 인간이었다.
개운호. 개원이의 쌍둥이 동생.
순간 굳어서 입을 벌리고 있자니, 비틀비틀 다가오던 그가 “어라.” 하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곧 그의 한쪽 입꼬리가 못되게 올라갔다.
“이게 누구야. 천씨 반숙 아니신가.”
그 야비한 미소를 보는데, 저놈이 혹시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내가 후궁이면서도 자기 형과 돌아다닌 걸 두 눈으로 봤다고, 그걸 둘러서 표현하는 건가?
흥. 해보라지. 그렇게 말해도 믿을 사람 하나도 없네.
개씨 집안은 황후 가문처럼 궁궐에서 세력이 강한 집안이 아니니, 저런 말을 해봐야 다들 ‘미쳤나?’ 하고 말걸?
나는 대답 대신 휙 고개를 돌렸다. 근데 저놈은 대체 여기에 어떻게 온 거야?
“왜 무시하지?”
하지만 개운호란 놈은 굳이 내게 말을 걸더니,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바위에 앉아 풀잎을 하나하나 찢다가, 그에게 명백하게 경고를 날려주었다.
“더 가까이 오면 후궁에게 멋대로 접근한 죄를 묻게 될 거다.”
“왜. 감옥에라도 보내시려고?”
“저승에도 감옥이 있나? 모르겠는데.”
개운호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가, 씩 웃으면서 물었다.
“죽여버린단 뜻이지?”
대답 대신 나는 마마처럼 호통쳤다.
“무엄하군!”
일갈하고 나니 스스로의 위엄에 뿌듯한 마음까지 든다. 이렇게 깔끔한 호통이 있을까.
하지만 너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면 위험이 없어 보일 거야.
나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서, 개운호가 들고 있는 통행등을 보았다. 허락은 받고 왔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개운호가 손에 든 통행등을 살짝 흔들며 설명했다.
“허락받고 왔어. 내 동생이 여기에 후궁으로 있거든. 아마 아는 사람일 텐데.”
“들어오는 건 허락을 받았는지 몰라도, 무엄하게 행동하는 건 허락받지 않았겠지.”
거기에 대고 차갑게 말하자, 개운호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통행등을 내렸다.
나는 마마로 지낸 지 이제 몇 개월이 되어 가서, 멋진 위엄을 발휘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나는 그에게 차갑게 한쪽 입꼬리를 들어 보이고서 옆으로 돌아앉았다.
마음 같아서야 돌아가고 싶었지만, 개운호가 여기에 있는 걸 보니 오기가 들었다.
저놈을 먼저 돌려보내야겠다는.
하지만 개운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내게 가까이 오지도 않으면서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날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개운호가 물었다.
“형이랑은 무슨 사이지?”
“무엄하구나.”
거기에 대고 한소리를 더하자, 개운호가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송구합니다, 어느 후궁 마마. 소신이 뵈었던 후궁 마마는 제 형님과 함께 제집에서 놀고 간 어느 무림인이지 고귀한 분이 아니어서요.”
나는 그를 무시하고서 아까 가짜 떡돌이가 조각내던 풀잎을 뜯어서 그자가 하던 것처럼 조각내기 시작했다.
개운호가 통행등을 고쳐 잡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개운호가 왜 여기에 온 건지? 개시시가 불렀나?
여러 가지로 의구심이 솟았지만, 그래도 철저하게 시선을 관리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무엄하게 나를 여러 번 부르긴 힘들었던지, 개운호가 몸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힐긋 그쪽을 보니, 개운호가 통행등을 들고서 청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는데…….
나가는가 싶던 개운호가 갑자기 내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물었다.
“역시 궁금한데요. 우리 형과 무슨 사입니까?”
난 이번에도 모른 척 대답했다.
“무엄하구나.”
사실 지금 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라 그렇다.
정말로 개운호를 여기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상황이라.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아. 그나마 내가 개씨 집안에 머문 이야기를 떡돌이도 알아서 다행이지.
개운호는 내가 계속해서 자기를 모른 척하자 갑갑하기도 하고 짜증도 나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군요. 저도 형도 모르는 사이어야 하는 겁니까.”
“무엄하다. 말 그만 시키고 가라.”
하지만 이렇게까지 인내심을 발휘하고 나자, 우리 계란이가 속에서 외치기 시작했다. 엄마. 저 새낄 죽여줘요.
계란이의 목소리가 이렇게 생생하게 들린 적이 있을까? 없다.
어쨌든 나는 계란이를 위해 나서기로 결심했다.
계란아. 엄마가 널 위해 나서줄게.
결정을 내리자마자, 나는 부채를 펼쳐서 단면 부분으로 개운호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쓱 긁었다.
“!”
개운호는 내가 그냥 부채로 찰싹 칠 거라 여겼던 듯 가만히 있다가, 작게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미쳤습니까!”
그러고는 뭘 잘했다고 화를 냈다.
어깨를 으쓱하자, 그는 빨갛게 줄이 그어진 자기 얼굴을 감싸더니 갑자기 흠칫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설마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표정이 마치 무언가 대단한 발견을 앞둔 사람 같지 않은가.
그 표정을 보자마자 좋지 못한 생각이 들어서, 나는 얼른 일어났다.
하지만 그보다 개운호의 무거운 목소리가 먼저였다.
“미친 소리인 거 아는데. 혹시 그쪽…… 천년비와 무슨 사이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