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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22화 (222/283)

##  222화. 사과는 할 수 없지만

“왜 황후라 생각해?”

“개 답응이 누이에게 가기 전에 본 이가 황후니까.”

“몰래 다른 사람을 봤을 수도 있잖아. 서신이 오갔다거나.”

“황후 편을 드는 게냐?”

“아니, 이런 건 신중해야 하잖아? 공주를 미치게 만든 범인이면 아주…… 그, 큰 벌 받지 않아?”

내 말에 떡돌이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중한 건 좋지. 네 말이 옳아. 하지만 다 옳진 않아. 범인이 누구든 처벌할 순 없을 테거든.”

“무슨 소리야?”

“진실을 알면 누이가 미칠 거란 건 타천천과 고궐, 너와 나, 승언이와 오원요 정도만 알던 거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황후가 개 답응을 누이에게 보냈다 한들, 그 의도가 누이를 미치게 만들려는 건 아니란 거다.”

말은 차분한데. 떡돌이의 눈빛은 점점 가라앉았다.

“보통 누군가 자신과 대화를 나누다가 미쳐버릴거란 짐작은 하지 못하지. 그런 걸 염두에 두면 대화를 할 수도 없고.”

“그러면……?”

“황후가 시켰단 게 밝혀져도 처벌은 못 할 거다. 누이 상태가 강시 상태여서 미치기 직전이었다 밝힐 수도 없으니 더더욱.”

하지만 처벌을 못 한다고 해서 떡돌이의 원망이나 화까지 누그러드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는 말을 하다 보니 더운 분기가 치솟는 듯, 주먹을 꽉 쥐고 그 위에 미간을 올려두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등을 쓸자, 손 아래에서 등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궁궐은 복잡하구나.

* * *

“소주. 왜 폐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않은 거예요?”

개시시의 배를 감싼 붕대를 풀고 약을 발라주며 궁녀가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개시시는 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가까스로 참고 있다가, 짧게 신음하며 대답했다.

“우리 가문은 반은 무림인들이야.”

“소신이 정언 소저처럼 소주를 사가에서부터 따르진 않았지만, 소주의 가문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어요, 소주.”

“나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고 내 직계 가족들은 무림인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서 무림 이야기는 들어서 알아. 암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자기 고용인에 대해 알리지 않아.”

“하지만 복수하면서 일부러 자기가 누군지, 상대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렇지. 그래도 고함치면서 알리진 않을 거잖아?”

“아. 그건 그렇네요.”

“그런데 날 습격한 사람은 다 들으란 것처럼 천빈을 외쳐댔어.”

“그럼 황후 마마에 대한 건 왜 비밀로 하신 거예요?”

“…….”

붕대를 다 감은 궁녀가 조심스레 개시시의 상의를 아래로 내려주었다.

개시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난 가문도 품계도, 폐하의 총애조차 황후 마마와 비견할 수 없어. 날 보호해 줄 수 있는 후궁 친분도 없고. 내가 황후 마마 이야기를 해봐야 어떻게 되겠어. 미움을 사서 나만 힘들어질 뿐이야. 난 누구와도 적이 되고 싶지 않아.”

* * *

“그나마 머리를 잘 쓰니 다행이로구나.”

황후는 개시시 쪽에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단 걸 확인하자, 안도해서 중얼거렸다.

개시시가 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서 그녀가 어떤 구체적인 처벌을 받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행동은 이간질이지, 공주를 미치게 한 게 아니니까.

하지만 별개로 황제와 태후에게 미움을 사긴 했을 텐데. 개시시가 입을 다문 덕에 그렇게 되진 않았다.

개시시는 일이 크게 번지는 걸 원치 않는 듯했다.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진 않을까요?”

“주기적으로 살피고. 우선,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이라고, 적당한 선물을 가져다주어라.”

“예, 마마.”

태감이 물러나자 황후는 긴 의자에 팔을 괴고 앉아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았다.

대체 일이 왜 이렇게 꼬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천빈이 온수연을 죽인 게 화가 나서 진실을 밝히려 했는데, 나중에는 그게 황제가 천빈과 장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부하들을 죄다 죽여버린 데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그 복수를 위해 천빈과 장공주를 갈라놓으려 했는데, 뜬금없이 장공주가 미쳐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닐 줄이야.

그리고 궁인들을 죽인 건 장공주였고, 부하들을 죽인 건 장공주를 배신한 고궐이라니!

그 사이사이의 연결 고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보니, 황후는 이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없어 힘들었다.

죄책감과 두려움, 답답함이 동시에 어우러져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숨이 가빠질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상궁녀가 잡혀간 일로 마음에 병이 나 약을 먹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연이어 일어나자 황후는 모든 일이 그저 괴롭게만 여겨졌다.

“술상을 차려오거라.”

결국 황후는 술의 기운을 빌려야겠다 싶어 이렇게 지시했다.

“아니, 밖에서 마시겠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후원에 술상을 차리거라.”

잠시 뒤. 술상이 마련되자 황후는 홀로 그곳에 가서 측근들까지 다 물린 후, 혼자 술을 따라가며 마시기 시작했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황후에게는, 자신이 오해로 인해 누군가를 미치게 만들고, 그걸 덮기 위해 누군가를 습격한 일 등이 깊은 죄책감으로 남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정신없이 술을 마셔댔을까.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고민이 흐려졌고, 황후는 거기에 계속해 매달렸다.

상궁녀까지 수사청에서 나오지 못하는 지금, 그녀에겐 마음을 터놓을 사람조차 한 단 한 명도 없었다.

가족? 그녀의 현재 상황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천씨 가문 세 자매를 쳐내라고 닦달하는 그 가족에게 고민을 털어놓아?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그를 보았다.

‘폐하? 아니…… 아니, 연금?’

황제와 같은 차림을 했지만, 언제나 대번에 구분할 수 있는 사내. 황제의 대역인 연금이었다.

연금은 그녀를 먼발치에서 보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술에 취해 어디에 목을 매달기라도 할까 봐 염려되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보고서야, 자신이 그에게 이리 와보라 손짓하고 있단 걸 알았다.

연금은 주저하느라 오지 않았다.

하지만 황후가 계속 오라고 손짓하자,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심조심 다가왔다.

“폐하께서 그렇게 행동하시더냐.”

전혀 황제로 보이지 않는 태도에 기가 차 묻자, 연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합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잘도 폐하 흉내를 내더니.”

“다른 사람은…… 절 모르니까요.”

“본궁도 널 모르는데.”

“절 알아보십니다. 절 구분하시고요.”

황후의 입꼬리가 슬프게 올라갔다.

“그렇구나.”

“……왜 그리 슬프십니까.”

“나도 누군가, 날 구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

면사 위로 드러난 연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눈에 동정심이 차올랐다.

평소라면 그가 드러낸 동정심에 자존심이 상했을 터이지만, 술과 두려움에 취한 황후에겐 그 눈빛이 오늘은 그리 자존심 상하지 않았다.

연금은 그런 황후를 보며 마음이 괴로워졌다.

평소에도 황후는 늘 위태로워 보였다.

초연한 눈동자 아래로 풍랑처럼 휩쓸리는 감정을, 황제가 알아보지 못하는 게 연금은 의아할 지경이었다.

황후가 아파하고 있을 때도, 황후가 슬픈 일이 있을 때도, 황후가 고민에 잠겨 있을 때도,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연금은 황후에게 말하고 싶었다. 자신은 그녀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역시 모든 걸 숨기고 감추도록 훈련받아왔다.

거기엔 감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황후였다. 후궁이나 궁녀가 아니라 황후. 어떻게 그녀에게 그런 말을 내뱉겠는가.

황후는 술을 마시고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손을 저었다.

“가보아라. 너는 내 옆에 있기도 싫은 모양이니.”

“아닙니다, 마마. 저는…….”

“…….”

연금은 자신의 손등을 보았다.

전에 황후가 버린 꽃을 주우며 난 상처는 흉터로 변해 그의 손등에 옅게 남아 있었다.

그는 말없이 일어서 꾸벅 인사를 올리고 돌아섰다.

황후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기척이 멀어지는 것만 보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 * *

“왜 그러세요, 마마?”

간식을 먹다가 내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자, 부성이 원웅과 둘이서 수를 놓다 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며칠 전부터 아기 옷에 쓰겠다며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수를 놓고 있었다.

내가 젓가락을 입에 물고 대답하지 않자, 원웅까지도 내 쪽을 쳐다보며 “마마?” 하고 묻는다.

나는 젓가락을 입에서 빼고서 물었다.

“폐하께서 며칠째 안 오셨지?”

떡돌이가 황후와 장공주, 개시시에 대한 일을 털어놓고 간 날 이후. 이상하게 그가 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후궁이나 황후를 찾아갔단 이야기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 일로 떡돌이가 마음이 상해서 방에 틀어박혔겠거니 생각했다.

속상하면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냥 혼자 웅크리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시간이…….

“육 일쯤 된 것 같아요, 마마.”

그래. 이 정도쯤 되니 좀 걱정되는데?

“왜 그러세요, 마마?”

“폐하께서 안 오셔서.”

“바쁘신 게 아닐까요? 요즘 일 때문에 완전히 정신없으시대요. 식사도 집무실 안에서 하신다 하고요.”

“그런가.”

“그럼요. 다른 후궁들을 찾아간 게 아니니 괜찮아요, 마마.”

“네. 염려 마세요.”

원웅과 부성은 내가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쁜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다 여기는 듯, 웬일로 둘이 박자를 맞추어서 좋은 말만 해주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싸운 일도 없고, 오히려 떡돌이와 내 사이는 최근에 아주 많이 좋았어. 떡돌이가 고민이 있긴 했지만.

그러니 나한테 화가 나서 안 오는 건 아닐 거야. 그냥 자기 시간을 가지고 싶은 거겠지. 황후한테도 화가 난 것 같으니.

음. 그리고 생각해보니, 내가 찾아가도 되긴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나도 무의식중에 떡돌이가 장공주 일로 심경이 복잡할 거란 걸 알아서겠지.

“좋아. 염려 끝. 걱정 안 하겠어.”

정리하고 손을 휘젓자, 부성이 박수를 친다.

“마마는 정말 마음이 넓으세요!”

“그럼.”

나는 흐뭇하게 웃고서, 얼른 마저 수를 놓으라고 둘에게 손짓했다.

그런데 몇 시진 뒤 밤. 기다리는 떡돌이는 오지 않고 기다리지 않은 인간이 나타났다.

* * *

“이게 누구야. 용씨 아냐.”

당직인 원웅은 침실 밖에 있을 거고, 부성은 자기 방에서 자고 있을 거다.

귀자는 깨어 있을 텐데 오지 않는다. 용화노가 알아서 잘 숨어들어 왔겠지. 그럴 능력은 되는 인간이니.

그런데 웬걸? 막상 몰래 와 놓고서, 용화노는 공격을 하지도, 대답을 하지도 않고서 나를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왜 저러나 싶어 같이 보고 있자니,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용화노를 쫓아내는 게 좋을지, 아니면 말을 하라고 잡고 흔드는 게 좋을지 고민하다가 놀라서 눈에 힘이 들어갔다.

“뭐?”

누가 죽어?

“장공주가? 왜?”

감옥에 갇혀 있는 거 아니었나? 장공주가 사람을 여럿 잡긴 했지만 그 일로 사형…… 당한 거란 말은 없었는데.

왕족은 웬만해선 사형시키지도 않고.

용화노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몸이 무너졌다. 며칠에 걸쳐서.”

“!”

그 말을 듣는 순간, 떡돌이가 엿새 동안 찾아오지 않은 일이 떠올랐다. 설마……!

용화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 표정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에 맞닥뜨린 절망이 어려 있었다.

싫은 놈이지만 저러고 있으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리고 떡돌이가 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엿새 동안 지켜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무너졌을지 상상이 가서 같이 멍하게 있기를 한참.

용화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를 모시고 도망치는 게 나을지, 아니면 내가 몰래몰래 심장을 가져다드리는 게 나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네 말이 옳아. 공주 전하가 이성이 있다면 너보다 날 탓하셨겠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분이시니까.”

“…….”

“괴물이 된 모습으로 억지로 연명시켜 보았자 공주 전하의 영혼은 아파할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설 수 없었어. 그냥 멀리서 지켜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멍하게 보고 있자니, 고궐이 씁쓸하게 웃었다.

“게다가 나도 공주 전하가 먹인 독 때문에 죽게 되겠지. 공주 전하를 모시고 달아나봤자, 그분을 책임질 수도 없어.”

“무슨 소리야? 독이라니?”

“공주 전하께서 내게 계속 독을 먹이셨다. 기억이 없는 척하면서.”

“어?”

고궐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발로 바닥의 흙을 뭉갰다.

“내가 왜 네게 이런 얘길 하는지 모르겠군. 같은 악적 출신에, 왕족을 사랑하게 된 동질감이라도 느껴서인가.”

“난 폐하를 배신하지 않아.”

“다행이군. 한 사람은 다른 길을 가게 되어서. 넌 악적계의 별이다, 천년비.”

저게 무슨 말이라고. 헛웃음이 나온다. 고궐은 씁쓸하게 같이 웃더니, 주위를 둘러본 다음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가 상처 준 어린 황자에겐 사과할 길이 없으니 대신 네게 말하겠다. 이게 본론이야. 타천천 얘기다.”

“?”

고궐은 내 귀에 대고 무언가를 빠르게 속삭이고는, ‘어린 황자’에게 전해달라 하고서 눈 깜짝할 사이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잠시 뒤. 귀자가 나타나서 “마마! 혹시 누가 다녀갔습니까?” 하고 조급히 물었다.

나는 멍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얼른 창문을 뛰어넘었다.

“마마!”

“떡, 폐하한테 가야겠다.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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