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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20화 (220/283)

##  220화. 머리싸움에서 비껴간 사람

“천빈이 너무 빨리 품계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유례가 없는 일이에요. 이렇게 빨리 품계가 올라간 후궁이 어디 있던가요.”

“군주의 총애는 한 사람이 차지해선 안 됩니다.”

“맞습니다. 한 사람이 폐하의 총애를 차지하게 되면, 폐하는 균형을 잃으실 겁니다.”

“고금을 따져봐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총애를 독차지하게 되면 끝이 좋지 않았어요.”

“폐하께서 정실인 황후 마마를 뒤로하고 첩인 후궁만 저리 끼고 지내시니, 이러다 천씨가문이 삿된 생각을 하는 건 아닐지…….”

“웬걸요! 이미 하고 있을 겁니다. 아주 행복한 망상에 잠겨 있겠지요!”

황제가 장공주에 대한 일이 해결되는 즉시 천빈을 비로 책봉하겠단 발표를 하자, 황후 측 대신들은 난리가 났다.

빈 자리에 오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비에 책봉한단 말인가!

하지만 반대를 하자니, 반대를 할 명분도 없었다.

“그럼 어찌합니까. 천빈이 약을 구해오지 못했다면 폐하께선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셨을 겁니다. 총애도 총애지만 천빈이 폐하의 목숨을 구했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고 반대하면, 우리가 뭐로 보이겠습니까? 천빈이 폐하 구한 일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꼴로만 보이지 않겠습니까?”

천빈이 이번에 약을 구해오지 못했더라면 황제는 아예 의식을 차리지 못하다 죽었을지도 몰랐다.

이에 황제를 구한 공으로 품계를 올리겠다고 하니, 천씨 가문을 싫어하는 이들도 감히 반대할 수가 없던 것이다.

“흥. 그냥 시기가 좋았는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폐하께선 가만히 둬도 알아서 일어나셨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병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의식만 없으셨던 거 아닙니까?”

“그 시기에 약을 가져다 바친 것도 천빈뿐입니다. 어의조차 이게 뭔가 몰라 제대로 약을 못 쓰고 있었으니까요!”

“지금 천빈을 편드십니까? 천빈 편드실 거면 이 자리에 왜 있습니까?”

“아니 이 사람이 유치하게……?”

“그만들 하시오!”

말다툼이 건설적이지 않고 하소연으로만 흘러가자, 참지 못하고 좌칙승상 온원이 쾅쾅 탁자를 내리쳤다.

황후의 부친이자 황후파의 핵심인 그가 진노하니 다들 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온원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서 이를 갈았다.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소이다. 어쩌겠소? 하지만 높은 곳에 떠 있으면 약점도 많이 보이기 마련이지. 천비 책봉식은 천씨 가문의 마지막 행사가 될 거요!”

* * *

천소여의 천비 책봉 소식을 기뻐하지 않는 건 중립에 가까운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천씨 가문이 딸 셋을 후궁에 집어넣을 정도로 욕심이 많단 걸 알았기에 천혜음의 야심을 경계하고 있었다.

연비나 영빈 둘 다 빠르게 품계가 올라간 편이었고, 머리도 좋지 않은가.

그런데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둘째가 갑자기 치고 나와 황제의 첫 아이를 회임할 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귀인에서 비 자리까지 올라가다니.

“온 승상이 마음에 안 들지만, 어쨌건 황후 마마는 황후 마마신데. 이러다 천씨 가문에서 간악한 계략이라고 꾸미는 게 아닌가 염려되오.”

“두 가문이 날 세워 싸워대면 조정은 또 얼마나 어지러울까.”

“천씨 가문 사람들을 잘 보고 있어야 합니다. 천빈은 비 자리에서 이제 멈춰야 합니다.”

* * *

황후파들과 중립 대신들은 짐작도 못 하고 있겠지만, 이 유례 없는 승진에 당혹스러워하는 건 천씨 가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오부인은 딸이 비가 될 거란 이야기를 듣자, 기쁜 마음과 염려하는 마음이 정확히 반씩을 차지했다.

“괜찮을까요? 너무 빠른 승진을 앞두고 있다 보니 걱정이 됩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천혜음도 한숨을 내쉬었다.

“소여는 황후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요. 그 애는 착하고 성실하지만,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황후가 되는 건 아니지요.”

천혜음과 공오부인이 점찍은 황후감은 장녀인 천대여, 연비였다.

그녀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고, 늘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다.

화가 나도 웃을 수 있었고, 분노해도 침착했다. 게다가 가문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회임을 한 것도, 빠르게 품계가 올라가는 것도 천소여라니.

“걱정됩니다. 그 아이가 그 속도와 높이를 이겨낼 수 있을지…….”

반면, 영빈의 모친이자 천혜음의 첩인 해운잠은 온씨 가문 사람들 이상으로 천소여의 책봉 소식에 화를 냈다.

“말도 안 돼! 그 멍청한 게!”

해운잠은 너무 화가 나서 욕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첩인 그녀가 이 집안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는 건, 적녀인 천소여가 모든 방면에서 서녀인 천우여보다 뒤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얼굴도 머리도, 성품도 천소여는 천우여보다 뒤떨어졌고, 입궁한 후에도 천소여는 천우여를 따라오지 못했다.

그녀는 늘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지만, 공오부인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당신이 아무리 잘난 척해도 내 딸이 네 딸보다 훨씬 낫다! 내 딸이 적출인 네 딸만큼 뒷바라지를 받았다면 연비 이상으로 날아올랐을 거다!

그런데 결국 천소여, 그 멍청한 천소여가 천우여를 역전해 버렸다.

이제 우여는 빈인데, 천소여는 비가 되게 생겼다.

해운잠은 공들여 수놓은 비단을 가위로 마구 조각내 잘라 버렸다.

“아악! 정말 싫어!”

“고정하세요, 작은 마님.”

시비가 다급히 말렸지만 해운잠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된다면 평생 그녀 모녀는 공오부인과 그 딸들에게 눌려 지내야 했다.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도 없이, 평생을 그렇게 지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할 수가 없었다.

해운잠은 울먹이며 비단보를 마구 걷어차다가, 눈물을 참느라 얼굴 근육이 욱신거리고 아프자 잠시 밖으로 나갔다.

후원을 걸으면서 이 서글픈 마음을 조금 달랠 생각이었다.

그런데 후원을 걷고 있자니 웬걸. 꼴 보기 싫은 공오부인이 이쪽으로 오지 않는가.

당장 돌아서서 가버리고 싶었으나, 해운잠은 억지로 서서 참다가 그녀가 곁에 오자 두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산책하시는지요, 부인.”

공오부인은 거들먹거리며 걸어가다가, 해운잠의 앞에 멈추어 서서 힐긋 옆을 보았다.

공오부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해운잠은 두 손을 모으고서 고개도 들지 않았다.

공오부인은 그런 해운잠의 태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도 우리 소여가 곧 비 자리에 책봉된단 이야기를 들었는가.”

“예, 부인.”

공오부인은 정수리만 보이는 해운잠의 머리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 갑자기 웃지? 의아해서 해운잠이 흠칫하고 있자니, 공오부인이 재차 웃으며 말했다.

“역시 세상엔 순리이자 질서라는 게 있어. 그렇지 않아?”

“소첩은 무슨 말씀이신지…….”

“서출은 무슨 수를 써도 적출 아래로 간다는 뜻이라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공오부인이 비틀린 웃음을 짓고 지나갔다.

해운잠은 공오부인이 지나가자, 멀쩡한 주먹을 ‘부드득’ 소리가 나게 꺾었다.

* * *

사람들을 떠들썩하게 한 천비 책봉식은 아직 거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아직 장공주에 대한 의혹이 처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보니, 행사인 품계 책봉식을 떠들썩하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운잠은 영빈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해운잠은 문을 닫고 딸과 둘만 있게 되자마자 다짜고짜 영빈을 다그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천빈이 비로 올라가다니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영빈이 덤덤하게 하는 말에 해운잠은 더욱 기가 막혔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마마께선 그걸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천빈이 제 발로 뛰어서 폐하를 치료했는데 제가 뭘 어쩌겠어요.”

“뭘 어쩌다니요! 천빈이 그런 약을 구한다면 마마도 같이 가고, 약을 구해서 오면 폐하께 전해드리러 같이 가고 했어야지요!”

영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천빈과 싸워서 뭘 하겠어요, 어머니.”

“대여야 어릴 때부터 마마를 잘 챙겨주었으니 그렇다 쳐도. 소여는 마마와 말도 안 섞으려 들었습니다. 그 애가 얼마나 마마를 무시했습니까? 말 한마디조차 웬만하면 안 나누려 했지요.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기억이 안 날 리가.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안 날 리가 없다.

하지만 영빈은 이번에도 여전히 떨떠름해 말했다.

“제가 천빈을 공격하면 대여 언니가 싫어할 거예요.”

“마마!”

“게다가, 어머니. 저도 천빈이 얄밉지만, 궁전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결국 피가 섞인 저희 자매 셋뿐이에요. 여기서 천빈과 싸워봐야 저만 손해인걸요.”

영빈의 차분하게 말했지만, 해운잠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영빈이 하는 말은 서출이 뒤로 가는 이 순서에 따르겠단 말처럼 들렸다.

‘순리대로 흘러간다’던 공오부인의 말이 귓가를 울려서, 해운잠은 머리가 다 아파왔다.

“공오부인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

“공오부인이 그러더라. 네가 서출이라 결국 천빈보다 못 되는 거라고.”

“어머니.”

“공오부인이 날 볼 때마다 얼마나 괴롭히는지 아느냐? 네가 빈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사람을 시켜 몰래 날 죽이려고 했을 여자다. 그 여자는 날 볼 때마다 너와 내 욕을 해. 뒤에서도 하지 않아. 앞에서 하니까.”

“……알아요, 어머니.”

영빈은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 집에서 지낼 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앞에서 몇 번이나 겪었는데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 모진 대우를 지금은 어머니가 혼자 겪고 있으리라는 걸,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네가 대여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건, 너는 서출이고 대여는 적출이기 때문이지 대여가 널 도와서가 아니야. 대여가 네 친언니였더라면 네가 이렇게 대여에게 빌빌 기면서 인정받으려 하겠니? 그냥 언니가 최고야, 이 정도 말이나 하면서 잘 지냈겠지.”

“!”

“네가 서출이 아니었다면 네가 대여에게 매달릴 일도, 너보다 훨씬 못난 소여에게 밀릴 일도 없다. 우리 모녀가 공오부인에게 괄시당할 일도 없지.”

영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만, 궁전에서는 모든 게 황제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후궁들끼리 싸움을 한다고 해도 황제가 누군가를 보호하고 총애하면 그 사람이 최고로 잘 나가는 것이었다.

상황을 역전시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이복자매 이상의 적들이 수두룩했다. 당장 황후부터가 그랬고.

여기서 제대로 자리를 잡고 살아남으려면 세 자매는 힘을 합쳐야 했다.

그녀가 천빈과 대립해봐야 이득을 얻는 건 딱 하나였다. 황후.

하지만 공오부인에게 괴롭힘을 당한 어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패물이랑 귀한 먹을거리를 좀 싸 드릴게요. 가져가서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좀 편히 계세요.”

* * *

상대를 싫어하는 건 해운잠만이 아니었다.

그 시각. 연비 역시 친모인 공오부인에게서 온 서신을 보고 있었다.

-해운잠 그것이 날 보는 눈길이 나날이 오만불손해지고 있다. 겉으로는 순종적인 척하지만, 뒤에서는 칼을 갈 사람이다. 제 딸과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몰라. 이제 네 친동생이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둘이서 힘을 합치고 영빈과는 거리를 두도록 해라. 소여가 아이를 낳으면 영빈이 너희의 이복자매랍시고 서모이자 이모 흉내를 낼 텐데, 그게 말이나 될 일이냐.

그리고 비슷한 시각.

천년비 역시 공오부인이 보낸 서신을 받았다.

* * *

“마님께서 보내신 거예요? 뭐라고 쓰여 있어요, 마마?”

“밥 많이 먹으래. 꼭꼭 씹어서.”

내가 서신을 보면서 중얼거리자, 원웅이 “정말요?” 하고 되묻는다.

“응.”

서신을 직접 보여주기까지 하자, 원웅이 신기해하며 감탄했다.

“이런저런 당부나 주의사항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소리는 안 하시네요.”

“평소엔 그런 서신을 보내셔?”

“아니요. 평소에도 별말씀을 안 하시긴 해요. 그냥 연비 마마를 잘 따르라고 하시지요.”

“그럼 편지 내용이 더 줄어든 거네?”

“아마도요?”

원웅과 부성이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더니 히죽히죽 웃는다. 뭐야. 왜 둘이만 웃어.

“어쨌든 마마, 마님은 별말씀을 안 하셨지만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뭐를?”

“영빈이요. 아까 낮에 해운잠이 영빈 마마를 보고 갔나 봐요. 절차가 굉장히 복잡한데, 그걸 다 처리하고 보고 갔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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