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검은 독
내 몸 상태도 별로지만 용화노의 몸 상태도 별로였다.
아주 다행한 일이었다. 용화노는 내가 무시하는 것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니까.
만약 내 몸 상태가 별로이고 그의 몸 상태가 아주 좋았다면, 나는 이렇게 쉽게 겨루자는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몰래 공격을 하면 했지.
그렇지만 우리 둘 다 상태가 나빴고 그가 조금 더 나빴기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이 비열한! 자꾸 옆구리만!”
“그대도 악적이고 나도 악적이고 우리는 다 비열하기로 소문난 악적인데. 이제 와서 뭘 기대해?”
용화노 이 튼튼하네.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이후 몇 수를 더 주고받자, 금세 승패가 드러났다.
매번 싸움을 걸고 매번 패배한 용화노는 이번에도 같은 길을 갔다. 아주 끈기 있어.
“그댄 매번 지는 게 좋은가 봐.”
“좋겠냐!”
“그대는 일편단심 같아. 내게도 장공주에게도.”
용화노가 또 이를 간다. 역시 이가 튼튼해.
그 모습을 보다가, 그나마 멀쩡한 자리에 걸터앉아 있자니 용화노는 내게서 대각선으로 가장 먼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작게 욕설을 뱉었다.
“공주 전하 다리 부러뜨린 널 이대로 두고만 봐야 한다니.”
말하는 게 꼭 내가 멀쩡히 잘 있는 장공주를 불러다가 다리를 부러뜨리기라도 한 태도였다.
그렇게 원한에 찬 용화노를 잠시 구경하다가, 나는 그의 맞은편 자리로 이동한 다음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뭐 하나 물어보자.”
“뭘.”
“공주 전하가 화를 낸다면, 자기가 아끼는 동생 죽이는 걸 막으려 다리 부러뜨린 내게 화낼까. 아니면 자신을 이상하게 부활시킨 네게 화를 낼까.”
“…….”
용화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 안 하는 건가.
한쪽 손을 괴고 그 모습을 바라보자, 용화노는 한참 만에 내게 물었다.
“너도 부활했으면서. 왜 공주 전하는 그러면 안 된단 거지?”
“몰라서 물어? 알 텐데.”
“몰라.”
“장공주님을 부활시킨 게 문제가 아니야. 이상하게 부활시켰잖아. 그게 문제야.”
“!”
“제대로 할 자신도 없으면서 일은 왜 진행했는데? 부작용이 나타날 거란 예상. 진짜 안 한 거 맞아?”
용화노가 가라앉은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 말에 상처 입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를 위로해주려 한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용화노가 싸늘하게 빈정거렸다.
그러고서 무어라 더 말하려 했으나, 누군가 근처로 다가오는 소리가 나자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입을 다물고서 벽에 붙어 섰다.
누구든 침입자가 온다면 대응하기 위해서. 그리고 문이 드르륵 열리며 들어온 사람은 타천천이었다.
“이런. 이게 무슨 일이야.”
나와 용화노가 싸우느라 엉망이 된 방 안을 쳐다보며 혀를 차는.
“남의 방이라고 아주 난장판을 만들었군!”
타천천은 오자마자 방부터 둘러보고는 혀를 찼다. 나와 용화노를 번갈아 보는 건 그다음이었다.
그는 엉망이 된 방이 영 싫은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가, 일단 아까 내가 앉았다가 일어난, 그 제일 멀쩡해 보이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래. 왜 두 사람이 내 방에서 싸우고 있었을까. 방 주인에게 알려줄 사람?”
“네 방이었어?”
“내가 며칠째 계속 투숙 중인 방이지, 녕녕.”
빙그레 웃은 타천천이 웃는 낯을 유지한 채 나와 용화노를 번갈아 보며 자기 손을 흔들었다.
“말할 사람. 없나?”
내 이야기는 용화노가 없는 데서 해야 하기에, 나는 용화노에게 ‘네가 먼저 말해’라는 신호를 냈다.
용화노는 굳이 내가 없는 데서만 해야 할 이야기가 아닌 듯 바로 입을 열었다.
“공주를 치료하거나 다른 몸에 옮길 수 없나?”
“음. 공주를 치료한다는 게 이성을 찾게 해 달란 걸까요? 아니면 몸을?”
“둘 다.”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지만 나도 궁금한 내용이다.
조용히 대답을 같이 기다리고 있으려니, 타천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보통 혼령술을 쓸 때 사용하는 문구가 ‘진쾌도래’랍니다. 영혼에게 얼른 돌아오라고 적어두는 문구이지요.”
천년비진쾌도래. 생각난다. 비원이 후궁들에게 적게 한 종이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지.
“하지만 공주는 제가 알기로 지금 몸이 공주 전하 몸이라서요. 자기 몸에 돌아오란 영혼을 쓸 수는 없지요? 이미 돌아와 있으니까?”
용화노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그래도 그는 기대를 그치지 않고 타천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타천천은 절대 빈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원래 몸에 있는 공주님 영혼을 다른 데로 옮길 방법은 없습니다.”
“그건……!”
“영혼이 협조해준다면 다른 강시 몸에 담는 건 가능하지요. 처음부터 영혼을 거기에 담는다면요. 하지만 공주 전하는 그 기회도 놓치지 않았습니까. 바로 자기 몸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타천천의 흔쾌한 거절에 용화노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방금 전까지 싸운 사람이 봐도 꽤 불쌍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타천천은 절대로 돌려 말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른 몸을 구하던가. 아니면 내게 부탁해서 제대로 된 강시 몸을 구하던가.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된 강시 몸은 또 뭐야?”
“영혼을 넣을 강시 용도로 만든 강시 몸이지, 녕녕. 일반 강시들하고는 제조 방법이 달라. 나도 딱 하나 만드는 데 성공했고.”
그게 내 몸이냐.
나는 용화노를, 용화노는 타천천을 간절히 보았다.
“그렇게 쳐다보아도 안 됩니다.”
그래도 타천천이 우아하게 거절하자 용화노는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공주가 자기 신분을, 자기가 가져야 할 것들을 되찾게 해주고 싶었다.”
이윽고 그는 입을 다물고 완전히 침묵에 잠겼다.
그러고서는 자리를 비킬 생각을 하지 않기에, 다가가서 툭툭 두드리자 그가 성질을 냈다.
“좀!”
“자리 비켜줘.”
용화노는 또 성질을 내긴 했지만, 여기 더 있어 보아야 해결되는 게 없다 싶은지 결국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러는 동안 타천천은 언제 가져온 건지 차를 홀짝였고, 마침내 용화노가 나가자 내게 웃으면서 물었다.
“나와 둘만 있고 싶었어, 녕녕?”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우리 녕녕이 고민은 해결이 가능해야 할 텐데.”
“폐하가 깨어나질 않아.”
“복에 겨웠군. 난 네가 깨우면 바로바로 일어날 거야, 녕녕. 아니, 너보다 먼저 일어나서 깨워줄 수도 있어 녕녕.”
배시시 웃으면서 타천천이 한쪽 눈을 찡긋한다.
그에게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는 마음을 담아 쳐다보자, 타천천은 머쓱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 얘기가 아닌가.”
“폐하가 장공주에게 공격을 당했거든. 여기 심장 부근. 여기 어디지. 흉골이라 하나. 그쪽을 공격당했어. 장기나 뼈엔 문제없을 정도로 다쳤다는데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 며칠째. 왜 그런지 알 거 같아?”
타천천은 별거 아니란 듯 바로 알려주었다.
“시독 때문일 거야.”
“시독?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공격받아도 폐하처럼 못 깨어나지 않던데?”
“제일 안 좋은 부위에 맞았겠지. 아니면 혈육이라 효과가 더 좋았거나.”
“어의가 독에 당한 건 아니라던데.”
“강시 시독은 보통 시독이 아니니까. 난 어의만큼 의술을 펼치진 못하지만, 어의도 나만큼 강시에 대해 알진 않아 녕녕.”
맞다. 강시 문제에 관한 한 어쨌건 제일 전문가는 타천천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말이다.
“네 말이 맞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타천천은 품 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내 쪽으로 던졌다.
받고서 보니 안에 몹시 수상쩍어 보이는 시꺼먼 액체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해독제. 상처에 부으면 될 거야, 녕녕.”
나는 아무리 봐도 독처럼 보이는 병을 두 손으로 꼭 쥐고서 타천천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약을 얻으러 오긴 했지만 이렇게 순순히 줄 줄은 몰랐는데.
그가 너무 순순히 해독제를 주자 뜻밖이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이래저래 복잡했다.
그 시선을 눈치채자, 타천천은 빙그레 웃고서 말했다.
“녕녕. 하나 말해줄까?”
“응?”
“그건 해독제인 동시에 독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이독치독이라 하지. 독으로 독을 낫게 한다.”
타천천의 미소가 짙어졌다.
“내가 주는 건 어렵지 않아. 진짜 어려운 건 그걸 황제의 상처 부위에 들이붓는 걸걸, 녕녕.”
“!”
내가 놀라서 까만 액체를 보고 있자니, 타천천이 작은 병을 하나 더 꺼내 내밀었다.
“자.”
“그건 또 뭐야?”
“중화제. 처음 준 독이 시독을 누르고 나면 상처 부위가 까맣게 변할 거야. 그때 이걸 부어.”
* * *
“죄송합니다, 개 답응. 천빈 마마께서는 지금 완전히 지쳐 쓰러지셔서 누구도 만날 정신이 아니십니다.”
“꼭 전해야 할 말이 있다고, 한 번만 얼굴만 보게 해주게. 이 이야기를 꼭 해야 해. 응?”
“저희도 웬만하면 그러고 싶지만 개 답응. 정말로 어렵습니다.”
비연궁에 찾아갔지만 개시시는 천빈을 만날 수 없었다. 아예 처소 안에 제대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에 개시시의 표정이 처연해지자, 보다 못한 원웅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소곤소곤 알려주었다.
“폐하께서 쓰러지신 후에 황후 마마께서 천빈 마마를 감금하려 하셨답니다. 천빈 마마께선 폐하가 쓰러지시는 것까지 본 터라 이미 놀란 상태였는데, 가둬두고 아예 나오지도 못하게 하시니 어찌 되겠어요. 천빈 마마께선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지셨지요.”
“정말인가?”
“예. 다행히 태후 마마께서 황후 마마와 함께 계시던 터라 그 소식을 듣고 천빈 마마를 데려오라 하셔서 폐하의 얼굴은 뵈었지만…… 그 후로 완전히 지치셔서 지금은…….”
원웅이 눈물을 글썽이자, 개시시는 정말로 상황이 안 좋구나 싶어서 시무룩하게 돌아섰다.
“알았네. 나중에 혹시라도 깨어나시거든 내가 다녀갔다 말해주게.”
“예. 그러겠습니다, 소주.”
개시시는 억지로 발걸음을 돌렸으나, 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이대로 돌아가도 괜찮을까?
수사가 시작되기 전에 황후가 자신의 입을 막으려 하진 않을까? 염치를 불고하고서라도 태후 마마 곁으로 갈까?
그러나 태후 마마는 개시시가 이제 와 그런 반응을 보이면 왜 그런지 이유를 알려 들 것이고, 개시시가 장공주가 미치기 전에 만난 사람인 걸 알면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개시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계속 걸어갔다.
‘아니면 아예 수사청에 가서 기몽 장군에게 호위를…….’
그러다가 그녀는 골목길 틈에서 한 무리의 복면인들이 우르르 나오자 놀라 멈춰 섰다.
그들은 태감 복장에 얼굴만 복면으로 대충 가리고 있었는데, 손에 험악한 칼을 들고 있었다.
“아악!”
그걸 본 개시시의 궁녀가 놀라 비명을 지르자, 그자들은 궁녀를 단숨에 베어 버렸다.
“악!”
궁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개시시는 더욱 기겁했다.
“천빈 마마를 음해하려 해놓고 염치없이 찾아오다니!”
그런 개시시를 향해 한 복면인이 호통을 치자, 다른 복면인이 검을 쥐고 달려들었다.
개시시는 황급히 달아나려 했으나 등이 베여 쓰러지고 말았다.
“거기 누구요?”
그 소리를 들은 누군가 담벼락 너머에서 묻자, 복면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고서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잠시 뒤 그곳에 나타난 태감들이 놀라 외쳤다.
“개 답응!”
* * *
“개 답응은?”
“송구하옵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볍게 부상만 입히라니까.”
“무림인 가문이라 들어서 어느 정도는 피할 줄 알았는데,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황후의 꾸짖음에 부하가 부복하며 사과했다. 황후는 손을 저었다.
“되었다. 죽으면 죽는 대로 입은 다물겠지.”
“그래도 지나가던 사람이 저희가 천빈 이야기하는 걸 들었을 겁니다.”
“천빈은? 돌아왔느냐?”
“예.”
“혼자서?”
“네.”
“분명 해독제를 구해 왔을 거다. 찾아와라. 반드시 찾아서 가져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