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시간 싸움
“이게…… 대체 왜 이럴지…….”
“허어 참. 난감하군.”
“으음. 대체 어쩐 연유로…….”
어의들이 내 맥을 짚을 때마다 이런 소리만 하자, 나를 가로막던 병사는 사색이 되어 그들을 재촉했다.
“아니, 왜 자꾸 ‘어허 어허’ 소리만 내십니까. 예? 천빈 마마께서 많이 안 좋으십니까?”
“그게 말일세. 참. 어허.”
어의들로서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내 맥이 약하긴 하지만 그거야 늘 그랬으니까.
갑자기 피를 한 움큼 토해대는데, 원인이 없으니 의아하겠지.
뭘 마시고 피를 토했을 땐 뭘 마셔서 그런 거라 하면 되겠지만, 이번에는 가만히 있다 피를 토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날 가로막던 병사들은 그걸 보면서 더욱 곤혹스러울 거다.
덮어쓸까 봐 염려되고 그러겠지.
그 모습을 보다가, 적당할 때쯤 나는 부성의 팔을 잡고 거기에 이마를 기대며 힘없이 속삭였다.
“부성. 부성. 나 폐하를 뵙고 싶다. 아니면 죽을지도 몰라. 아까 너무 놀라서 그런가 봐.”
“으흐흐흐, 마마!”
부성은 연기하는 게 아니다. 진짜로 내가 피를 토해서 놀란 거다.
몹시 당황한 부성은 날 보면서 울다가, 나중에는 병사에게 삿대질까지 했다.
“마마께서 잘못되시면 다 당신들 탓이야! 내가 폐하께 꼭 이걸 다 고할 거라고!”
이렇게 됐는데 뭘 어쩌겠는가. 결국 병사는 다른 병사에게 황급히 지시했다.
“얼른 상황을 알려라!”
“예!”
* * *
태후는 월요 황제의 이마를 따뜻한 천으로 닦아주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황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숨을 들썩였다.
월요 황제에게 복수할 마음이 있긴 했으나, 그가 이대로 죽는 건 그녀 역시 바라지 않았다.
그녀에겐 후사가 없었고, 천빈은 아직 아이를 낳지도 않았다.
이대로 황제가 붕어하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아무 힘도 쓸 수 없었다.
아이가 태어난 상태라면 자신이 지금이라도 억지로 데려와 기르겠다고 하면 되지만, 아직 아이는 천빈의 배 속에 있지 않은가.
이 상황에 황제가 죽는다면, 천빈은 분명 태후가 데려가 꽁꽁 보호해둘 것이다.
그러다 무사히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여아든 남아든 단 하나뿐인 황손으로서 갓난아기라도 황제 자리에 오르겠지.
태후와 천빈이 교육시킬 테고, 아이가 클 때까진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겠지.
아이가 다 커서 수렴청정이 끝나면 천빈은 황제의 친모가 되어 극진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천빈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으니, 태후와 대립할 일도 없다.
그녀 역시 적모로서 태후가 되긴 하겠지만, 과연 태후와 천빈의 손에서 자라 그녀를 몇 번 보지도 못할 아이가 그녀를 태후로 대해 줄까?
게다가 온씨 가문과 천씨 가문은 사이도 좋지 않은데, 권력을 잡은 천씨 가문이 온씨 가문을 그대로 두고 보려 할까?
그때, 문이 열리며 오원요가 와서 알렸다.
“태후 마마. 황후 마마. 천빈 마마께서 지금 각혈까지 하시며 폐하를 뵙고 싶어 하신다 합니다.”
“뭐라?”
황후는 놀라 물었다.
“각혈이라니?”
“폐하를 뵙고 싶다 했는데 병사들이 막자, 충격을 받아 토혈하셨답니다. 의원 말로는 걱정이 지나쳐 몸에 충격을 준 것 같다 합니다.”
그 말에 황제의 이마를 닦던 태후가 깜짝 놀라 외쳤다.
“그러면 얼른 데려오너라! 아가가 얼마나 놀랐으면!”
그 놀란 아가가 당신 딸 다리를 부러뜨렸습니다. 황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천빈이 미친 장공주와 그 정체 모를 복면인 상대하는 모습을 태후가 보아야 했는데.
어쨌든 지금은 태후에게 천빈은 무공 고수이니, 그렇게 연약한 병아리처럼 대할 필요가 없다 할 때가 아니었다.
“태후 마마. 지금 천빈을 데려오는 건 안 될 일입니다.”
황후는 침착하게 끼어들었다.
“무슨 말이냐. 천빈을 데려오면 안 된다니?”
“사람이 놀라서 토혈하다니요. 어쩌면 병이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폐하께선 깨어나지도 못하고 계시는데. 폐가 될 겁니다.”
황후는 논리적으로 침착하게 말했으나, 태후는 대번에 되물었다.
“그러다 천빈까지 쓰러지면 어떻게 하려고.”
“어의들이 곁에 있게 하면 될 겁니다. 침착하시지요, 태후 마마.”
“아니, 천빈을 데려와야 한다. 어쩌면 폐하께서 지금 깨어나지 못하시는 건 소중한 사람의 목소리를 못 들어서일지도 몰라.”
태후의 말에 황후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은, 황후 자신은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 황제가 못 깨어난단 뜻 같지 않은가.
태후는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황제가 천빈을 가장 총애하고 사랑하니, 데려와 목소리를 들려주면 사랑의 힘으로 깨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황후에겐 태후가 지나치게 편애하는 걸로 여겨져 섭섭했다.
“태후 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군요.”
황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오원요에게 지시했다.
“천빈을 데려와라.”
“예, 황후 마마.”
* * *
피를 몇 번 더 내는 건 일도 아니지만, 피가 모자라기라도 하면 정말로 계란이에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기에 이후로는 피를 더 토하지 않고 배 위에 두 손만 올리고 침상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문이 열리며 오원요가 나타났다.
“천빈 마마!”
오원요는 안으로 들어오다가 나를 보더니 심란한 표정으로 외쳤다.
“태후 마마와 황후 마마께서 천빈 마마를 모셔오라 하십니다.”
표정을 보니 오원요도 떡돌이를 챙기느라 날 잊은 건 아니구나.
아무래도 오원요 역시 내게 누구를 보낼 수 없었나 보다.
짐작대로, 가마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 오원요가 내게 작게 알려주었다.
“폐하께서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마마. 황태자가 없다 보니, 이런 상황에선 황후 마마께서 주위를 통솔하게 되십니다. 마마께 사정을 알리고 싶었지만…….”
“아네. 못 나가게 막더라고. 말은 보호인데 감시였네. 오 공공도 비슷한 처지였겠지.”
내 말에 오원요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폐하께서 깨어나시면 바로 해결될 겁니다. 너무 갑갑해 하지 말고 계셔야 합니다, 마마.”
“폐하 상태는 어떤가?”
“외상은 심하지 않으신데 이상하게 못 깨어나십니다.”
“독이라거나…….”
“아니요. 그쪽도 몇 번이나 조사했지만 아닙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가마가 어느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평소 떡돌이가 쓰는 건물은 아니었다.
그 안으로 원웅의 부축을 받아 들어가자, 오원요가 얼른 안쪽으로 나를 안내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방 안에, 떡돌이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 곁에는 황후와 태후 마마가 앉아 있었는데, 내가 들어가자 태후 마마가 다가와 내 손을 붙잡으며 손등을 토닥거렸다.
“천빈,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굳게 잡고 건강을 챙겨야지.”
태후 마마는 나를 위로했지만, 그러는 태후 마마야말로 표정이 굉장히 어두웠다.
그렇겠지. 딸은 갑자기 미쳐서 감금되어 있고, 아들은 그 딸에게 맞아 의식을 못 차리고 있으니.
태후야말로 지금 사태에 가장 미칠 것 같은 처지겠지.
“폐하는 괜찮으실 거예요.”
나는 태후 마마를 덩달아 위로하고서 침상 곁으로 갔다.
떡돌이는 정말로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장난스럽게 인사할 것처럼.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쓸었다. 하지만 떡돌이는 눈꺼풀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불 아래로 그의 까칠한 붕대가 스치듯 닿았다.
슬쩍 이불을 내리자 그의 가슴을 돌돌 싼 붕대가 드러났다. 어제 내가 본 부분, 그 자리에 붕대를 감아 놨구나.
그러고 있자니 문득 타천천이 떠오른다.
혹시 떡돌이. 부상이 커서가 아니라, 장공주에게 당할 때 뭐가 잘못되어서 이러고 있나?
“…….”
“천빈?”
내가 황제의 부상 위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있자 태후 마마가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러느냐?”
나는 손을 내리고서 태후 마마에게 슬쩍 운을 떼 보았다.
“저, 실은 태후 마마. 폐하께서 살짝살짝 만나시던 어떤 그, 어의 아니고 외부 의원이 있어요.”
의원이 아니라 강시술, 혼령술을 쓰는 찝찝한 놈이지만 일단 의원이라 하자. 솔직히 말씀드리면 태후 마마가 기겁하실 테니.
“의원?”
황후도 날 돌아보고 오원요도 날 돌아본다.
혹시 오원요가 눈치 없게 여기서 ‘그런 거 없습니다’라고 할까 봐 신경 쓰였지만, 다행히 오원요는 눈치가 아주 좋고 빨랐다.
“네, 그런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태후 마마.”
태후 마마는 놀라 외쳤다.
“오 공공, 그러면 진작 얘기했어야지!”
“송구하옵니다, 태후 마마. 하지만 그자의 행선지는 폐하와 천빈 마마께서만 아셔서요. 그 행선지에서도 못 만나기 일쑤라 들었습니다. 소신이 뭘 알겠습니까.”
오원요가 잘 둘러대 준 덕에 태후 마마는 다시 나를 쳐다보며 황급히 물었다.
“천빈, 그자가 어디 있지? 얼른 사람을 보내 그자를 데려오자. 그자에게 부탁해 폐하를 보아달라 하자.”
내가 무어라 말하려는데, 이번에도 오원요가 나서주었다.
“태후 마마. 그자는 변덕이 심하고 몹시 까다로워서,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면 아예 도망가 버립니다. 게다가 자기 행선지가 알려지면 그때부턴 아예 연락을 끊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리지요. 폐하나 천빈 마마께서 직접 가지 않으면 가도 못 찾을 것입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다. 사하비단이 황제의 골칫거리라는 건 이미 온 관리들이 다 알걸.
그런 상황에서 사하비단의 수장을 찾아와야 한다고 했다간 난리가 나겠지.
하지만 내가 직접 가야 한단 이야기에 태후 마마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천빈이 직접 가면 위험하지 않을까? 천빈은 오늘 각혈까지 했는데.”
가만히 있던 황후 역시 끼어들었다.
“저도 반대입니다, 태후 마마. 어의가 아닌 자에게 폐하를 치료하게 하다니요. 그자가 누구인 줄 알고요. 그런 자가 있다면, 천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가서 신원을 확인하고 데려와야 합니다.”
태후 마마가 날 보았지만 여기서 내가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그냥 가만히 있자, 황후가 이번에는 나를 차갑게 질책했다.
“천빈. 마음이 급한 건 알겠지만 미신을 동원하고 그러면 안 되네.”
미신 아닌데.
태후 마마도 내가 직접 수상쩍은 자를 데리러 가는 건 좀 아니다 싶은지, 슬퍼하며 중얼거렸다.
“우선 폐하 상태를 보면서 결정하자. 천빈, 너까지 위험하게 둘 순 없다.”
이거 참. 곤란하네. 몰래 빠져나가야 하나.
* * *
황제가 의식을 못 찾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장공주에 대한 일은 뒤로 미루어졌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두려움은 그대로 남아, 연신 주인 없는 자리로 상소문이 올라왔다.
특히 장공주의 괴력과 이성 잃은 면모를 직접 본 이들은, 장공주가 감옥을 부수고 나올 것까지 염려했다.
이를 지켜보던 황후는, 마침 잘 됐다 싶어서 직접 장공주를 보러 갔다.
하지만 장공주는 여전히 이성이 없었다.
이에 황후가 장공주 입에서 개 답응에 관한 일이 나오진 않겠구나, 싶어서 안심하고 ‘장공주에 대한 처분은 폐하께서 정하실 터이지만, 장공주가 왜 저렇게 되었는지는 조사해야겠다’는 핑계를 대고 사람들에게 ‘장공주가 갑자기 이성을 잃은 이유를 안다면 찾아오라’ 공표했다.
그러고 안심하는 찰나. 뜻밖에도 장공주의 궁녀 치월이 직접 그녀를 찾아와 보고했다.
“황후 마마. 장공주님이 왜 저렇게 변하신 건지는 소인도 확실히 모르지만, 변하시기 전 가장 마지막에 뵌 분은 개 답응이었습니다.”
치월이 돌아간 후. 황후는 초조해졌다.
개 답응이 조사를 받으면서 ‘황후 마마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하면 순식간에 그녀까지 연루될지도 몰랐다.
실제로 장공주는 그전부터 이미 살인귀였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쓰러진 황제와 이미 죽은 황후의 심복들, 그리고 황후 본인, 천빈 정도뿐이지 않은가.
사람들은 개 답응이 황후의 이름을 꺼내면, 그녀와 개 답응이 장공주를 미치게 만들었다고 무작정 의심할 터이고 불똥이 튈 게 뻔했다.
초조해하던 황후는 심복 둘을 불러 지시했다.
“개 답응이 조사받기 전에 죽여서 입을 막아라. 그녀는 분명히 이 일을 내 탓으로 돌리려 할 거다. 그리고 너는 천빈의 처소 근처에 있다가, 그녀가 무공으로 몰래 빠져나오거든 뒤를 쫓아라. 분명 폐하를 고칠 의원을 찾으러 가는 걸 테니. 찾거든 반드시 먼저 데려와야 한다. 천빈이 아니라 우리가 폐하를 구해야 한다. 알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