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이러고 사라지지 마
“말 잘하네. 아플 텐데.”
“네가…… 너는…….”
고궐이 입을 뻥긋거리는 걸 보니, 내가 천년비라는 걸 알아본 모양이다.
하긴. 내 천수비에 저놈이 맞은 횟수만 벌써 네 번이다.
못 알아보면 저놈은 무림 고수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대신 무림 멍청이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을 두 번이나 괴롭게 한 걸 보면 이미 그 자리에 발을 얹고 있는 것도 같지만.
“어떻게? 어떻게 네가 여기 있지?”
“어떻게 여기 있긴. 본궁은 마마니까 여기 있지.”
“마마?”
자기도 부마가 될 뻔했으면서 되게 기막힌 표정을 짓네.
고궐은 나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어깨를 떨며 작게 웃었다.
“그래. 이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군. 그래서 강했던 거였어.”
후궁인 천빈이 강한 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나 보다.
그러니 경계한다고 내 처소에 시체도 가져다 두고 했겠지만.
어쨌건 지금은 고궐과 대화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와 말을 더 섞는 대신, 장공주가 뒤에서 나를 향해 강시 팔을 휘두르는 순간 몸을 숙여 피하고서 자세를 낮게 잡아 그녀의 다리를 최대한으로 강하게 가격했다.
장공주는 살짝 휘청하다가 옆으로 무너지듯 휘청였다.
다행히 단번에 그녀의 다리를 부러뜨린 모양이다.
거의 같은 정도의 힘으로 나는 장공주의 다른 쪽 다리까지 부러뜨렸다.
미안해요, 장공주. 그런데 아마 시체 몸이니 복구는 될 거예요.
어쨌든 이러지 않고서는 장공주가 날뛰는 걸 말릴 수 없으니까.
아무리 장공주가 이성을 잃고 날뛰어도, 다리 두 개가 다 부러졌는데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바닥에 엎어지자 누군가 참담한 목소리로 “전하.” 하고 중얼거렸다.
그림자들이 저 쪽수로 장공주를 해치지 못해서 당한 건 아니다.
최대한 피해를 적게 주고 잡으려니 저렇게들 당한 거지.
그런데 내가 다리부터 부러뜨려 버리자 다들 경악한 듯했다.
고궐은…….
“죽이겠어!”
내가 장공주 다리를 부러뜨리자, 눈동자에 핏줄이 새빨갛게 서서 덤벼들었다.
하지만 내 급습에 이미 내공이 한 번 전체적으로 진탕한 뒤라, 그는 원래의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
달려드는 그의 턱을 다리를 높게 들어 걷어차고, 다시 몸을 반 바퀴 돌리며 가슴을 차자 고궐이 한 번 더 피를 토했다.
그는 증오스럽단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으나,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고궐이 달아나자, 그림자들은 다리가 부러져 쓰러져 있는 장공주를 황급히 제압하기 시작했다.
장공주가 더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손을 뒤로 해서 꽁꽁 묶고, 그러다가 또 풀렸지만.
하여튼 몇 번 시도한 끝에 가까스로 손을 묶은 다음 부상자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번씩 내 쪽을 묘한 시선으로 힐긋거렸다.
아무래도 다 무공을 익힌 이들이다 보니, 내가 한두 달 반짝 무공을 익힌 솜씨가 아닌 걸 알아차린 듯했다.
상당히 강하다는 것도.
월요 근처에도 이미 수많은 그림자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들도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호기심과 경탄이 섞인 시선으로 내게 꾸벅꾸벅 고개만 숙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강하군 천빈.”
그런데 황후는 대체 언제 와 있던 거야? 아깐 분명 없었는데.
“아주 강해. 언제부터 그리 강했을까.”
구체적으로 대답하진 않아도 되겠지?
“태교를 열심히 받았어요, 마마.”
“태교? 태교를 잘 받고 나오면 고강한 무인이 태어나나?”
“그럼요. 그래서 저도 열심히 태교하고 있어요, 마마. 조기…….”
내가 조기 이야기를 습관적으로 꺼내려 하자, 지쳐서 쓰러져 있던 떡돌이가 갑자기 엄청난 소리로 기침하기 시작했다.
아, 그래. 떡돌이가 그 조기랑 이 조기가 다르다고 했지.
다행히 떡돌이가 기침해대자 황후도 내 태교엔 더 관심이 없는 듯, 떡돌이를 살피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괜찮소.”
“상처가 심합니다.”
하지만 떡돌이는 괜찮단 말을 하자마자 기절해 버렸다.
전혀 안 괜찮구나! 얼굴을 면사로 가려놔서 제대로 안 보였어!
“폐하!”
황후가 놀라서 황제를 부르고, 주위 그림자들도 소란스러워진다.
나도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가 떡돌이를 부축하려 했으나, 내가 가까이 가기 전에 황후가 손을 젓더니 날 보며 말했다.
“천빈은 회임했으니 이런 부상을 보는 게 좋지 않아. 충분히 무리한 것 같으니 돌아가거라.”
“이미 다 봤는데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덜 봐야지. 귀자.”
“네, 마마.”
“천빈을 비연궁으로 데려가 쉬게 해라.”
어…… 떡돌이 상태가 괜찮은가 나도 보고 싶은데.
황후의 명령이 떨어진 상황에서 귀자가 지시를 안 따르는 것도 이상했다. 그랬다간 상명하복이 될 테니.
“천빈. 들어가라 했다.”
재차 떡돌이 곁으로 가려 했지만, 황후는 단호하게 내게 선을 그었다.
“회임한 천빈이 여기 있으면 폐하께도 폐가 되는 걸 모르느냐.”
귀자가 내 쪽을 보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오원요를 보자 그 역시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물러서란 뜻인가?’
결국 나는 오원요에게 “나중에 폐하의 처소로 직접 가겠네.” 말하고 돌아섰다.
뭐…… 그래. 데려가서 치료해주겠지. 떡돌이가 깨어나면 날 찾을 테니 그때 보자.
* * *
부성과 원웅은 내가 귀자와 함께 어슬렁어슬렁 들어가자 기겁해서 달려왔다.
“마마!”
“세상에 어디 가셨던 거예요!”
“밖에 난리가 났다는데 마마께선 없으시지 귀자도 없지, 소인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난리 난 데 다녀왔어.”
“예?!”
부성과 원웅의 얼굴이 충격에 빠져들었다.
귀자는 두 사람에게 나중에 얘기해주겠단 신호를 보내고서 내게 물었다.
“일단 씻고 쉬시지요, 마마. 회임한 몸으로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폐하는-.”
“본궁에서 사람이 오면 바로 깨워드리겠습니다.”
* * *
황제를 근처의 가장 가까운 궁으로 옮긴 뒤, 오원요는 어의란 어의를 모두 불러모아 황제를 진료하게 했다.
어의가 황제를 진료한 뒤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싸맬 동안, 황후는 초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 물었다.
“폐하께선 어떠신가?”
“외상을 입으셨으나 다행히 뼈나 장기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습니다. 약을 잘 바르고 치료하면 괜찮으실 겁니다.”
“다행이구나.”
“예. 소인이 탕약을 조제해 드릴 터이니, 깨어나시면 세 시진마다 탕약을 드시게 하십시오, 마마.”
어의가 물러나자, 오원요가 슬그머니 황후의 눈치를 보다 물었다.
“황후 마마. 천빈 마마께서도 많이 염려하고 있으실 텐데. 천빈 마마께도 폐하 상태를 알려드릴까요?”
“되었다. 걱정할 테니 깨어나서 폐하께서 찾으시면 그때 알려라. 회임하였는데 이런 일에까지 신경 쓰게 할 순 없지.”
황후의 말은 천빈을 염려하는 것처럼 들려서,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오원요는 재차 같은 질문을 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잠시지만 황제가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궁을 통솔할 사람은 황후와 태후가 아니던가.
“예, 마마.”
오원요는 허리 숙여 인사하고서, 복도에 선 그림자 하나에게 슬쩍 눈짓하며 입 모양으로 ‘태후 마마’라고 말했다.
태후도 슬슬 소란을 듣고 상황을 알아내려 하고 있겠지만, 이쪽에서 먼저 제대로 알리는 게 나으니까.
“그대도 나가 보게.”
황후는 오원요도 나가게 한 뒤.
황제와 둘만 남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고서 황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장공주가 소란을 피운단 이야기에, 그녀는 측근들이 붙잡는 것도 뿌리치고 밖으로 달려 나와 보았다.
장공주가 소란을 피우는 게 혹시라도 개시시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닌지, 대체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 했다.
만약 장공주가 개시시의 말을 듣고 난동을 부리는 거라면 이 일이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보게 된 광경은…… 예상 이상이었다.
수많은 병사와 그림자들이 쓰러져 있고, 황제 역시 가슴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장공주는 단순히 난동을 부리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이성이 없어 보였으며, 그녀와 싸우는 건 천빈이었다.
‘천빈이 무공을 익힌 적이 있나?’
물론 황제가 천빈의 청으로 무림인 하나를 불러와 무공을 가르치게 한 일은 그녀도 알았다.
그렇지만 고작 몇 개월 배우고서 그렇게 강해질 수 있나?
그림자들이 달라붙어도 이기지 못하던 그 ‘복면 쓴 수상한 자’와 장공주를 대번에 제압할 정도로?
하지만 황제도 오원요도 그림자들도 그 모습을 그리 이상하게 보진 않은 걸 보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무공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사실 이 부분은 단정 짓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천빈은 장공주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이 일은 과연 어떨까.
‘일단 장공주를 만나 봐야겠다. 그녀가 개 답응에 대한 이야기를 할 만한 상태인지 아닌지 확인해야겠어.’
* * *
“잘 자는구나. 넌 정말 짐이 없어도 잘 살려나 보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저절로 번쩍 눈이 떠졌다. 나는 상체를 일으키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어. 하지만 떡돌이가 웃으면서 말 거는 소리가…… 들린 거 같았는데.
“원웅. 원웅.”
“네, 마마.”
장막을 들추며 부르자, 원웅이 당직을 서고 있다가 얼른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목이 마르세요? 따뜻한 물을 가져다드릴까요?”
“아니. 저기, 폐하 목소리가 들린 거 같아서.”
“폐하요?”
“혹시 폐하가 오셨어?”
“아니요. 안 오셨어요, 마마.”
“그래…….”
“네. 염려 말고 주무세요.”
그런가. 하지만 정말로 떡돌이가 곁에서 말하는 것 같았는데. 게다가 그 목소리. 정말로 실감 넘쳤어.
나는 원웅을 내보내고서 정신을 집중해서 주위에 인기척을 살폈다.
하지만 떡돌이로 여겨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숨어 있는 기척은 귀자 정도뿐.
“꿈인가.”
떡돌이가 다치는 모습을 보고 제대로 상태를 확인하지 못해서 이런 꿈을 꾸나 봐.
……아무래도 내일은 황후가 말려도 찾아가 봐야겠어. 오원요라도 내게 살짝 언질을 주겠지.
* * *
다음날. 나는 씻고 옷을 입은 다음, 대충 아침 식사를 끝내고서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비연궁 밖으로 나가려고 보니, 문 앞에 수많은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냐.”
황당해서 묻자, 병사 중 하나가 꾸벅 인사하고서 말했다.
“어제 좋지 않은 일이 있어 궁 안이 어지럽고 위험하니, 천빈 마마를 지키란 명이 있었습니다.”
“폐하가?”
“아니요. 황후 마마께서 내리신 명이십니다. 폐하께서는 어제 일로 부상을 입어 병상에 계십니다.”
어제 일이 있긴 했지만 다 해결이 됐을 텐데?
“폐하를 보고 와야겠다.”
나는 병사에게 비키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웬걸.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으면서도 비키지 않았다.
“안 비키네? 왜 안 비키지?”
내가 묻자, 그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까 내게 대답한 병사가 다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천빈 마마. 황후 마마께서, 천빈 마마께서는 위험하다고 말려도 듣지 않고 늘 돌아다니시니, 절대로 나가지 못하게 막으라 하셨습니다.”
“그럼, 지키는 게 아니라 가둬두라 한 거네?”
“아닙니다, 마마. 절대로 그런 게 아닙니다. 황후 마마께선 천빈 마마를 위해-.”
밤에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떡돌이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상황이 안 좋단 확신이 들었다.
떡돌이가 아직 의식을 못 찾았구나. 떡돌이가 깨어 있다면 황후가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없어.
떡돌이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판단을 내리자마자, 나는 내 주특기를 발휘해 피를 토해냈다.
“감히 나를 가두…… 허어억!”
“악! 마마!”
“감히 회임한 마마를 이렇게 만들다니!”
“마마! 마마!”
“마마나 아기씨가 잘못되면 다 당신들과 황후 마마 탓이야!”
내가 왈칵 피를 뱉으면서 비틀거리자, 원웅과 부성은 비명을 지르면서 병사들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이를 본 병사들도 사색이 되어 외쳤다.
“어의를 불러와라!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