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그가 경고한 일
개시시는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에 소금이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천빈과 소원해진 건 맞다. 하지만 개시시는 천빈을 이상한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범인이 아니라면서. 범인이 아닌데도 수군거림을 들었으니, 천빈 역시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아니, 그녀는 황후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왜 제게 해주시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마마.”
결국 개시시가 솔직하게 말하자 황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자넨 솔직해. 궁전 안엔 이리저리 돌려 말하는 이들이 많지. 나 역시 그렇고. 하지만 자넨 그러지 않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자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네.”
황후가 처음 친척인 온 귀인보다 자신에게 잘 대해준 건 사실이었다.
천빈을 적대하는 분위기에 끼지 못해 결국 황후와 데면데면해지긴 했지만…….
“천빈도 자네처럼 시원스럽고 솔직하지. 폐하께선 천빈의 그런 성격을 좋아하시고. 자네가 천빈보다 먼저 입궁했다면, 폐하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자네였을지도 몰라.”
“저는…… 아닙니다, 마마.”
“예를 들자면 그렇단 거지. 이미 일어난 일 순서를 어찌 바꾸겠나.”
“…….”
“자네가 솔직하게 말했으니 나도 솔직하게 말해주겠네. 본궁은 폐하께서 묻고 싶어 하는 일을 나서서 들출 마음은 없네. 장공주의 허물을 들추면 폐하께 미운털이 박히겠지. 물론 자네에게 그런 짓을 시키지도 않을 거야. 자네가 내 사람이 될 거라면, 뭐 하러 그렇게 만들겠나?”
“그러면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장공주와 천빈은 친하지. 두 사람이 틀어지길 바라네. 자네는 장공주를 찾아가서, ‘천빈에게 이런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며 몇 마디 해주기만 하면 되네. 천빈이, 시체가 여럿 발견된 날 입가에 피를 묻힌 장공주를 보았단 이야기를 했다던가. 그런 식으로.”
“!”
“내가 나서면 안 되냐 묻고 싶겠지? 안 돼. 본궁은 장공주를 도우려다 상궁의 실수로 이미 사이가 틀어졌거든. 본궁이 나서면 천빈과 사이가 틀어지는 게 아니라 장공주를 협박하는 모양새가 나버려.”
“그렇군요.”
개시시는 멍하게 대답했다. 황후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기면서도,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런 거라면 황후 아래의 다른 사람에게 시키면 되지 않을까?
아니, 이미 황후 파인 사람이 장공주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누가 봐도 이간질 티가 난다.
‘그렇지만 꼭 내가 이런 걸 해야 할까?’
“천빈과 한때 친하게 지내서 그러나?”
“……예, 마마. 자연스럽게 멀어지긴 했지만 혼자 조금 원망할 정도이지, 피해를 주고 싶진 않습니다.”
“장공주와 사이가 틀어지는 정도로 천빈에게 큰일이 생기진 않을 거야. 천빈은 누가 뭐래도 폐하의 장손을 낳게 될 귀한 몸이 아닌가. 반면 장공주는 귀한 몸이지만 그것뿐이지.”
황후의 말에 개시시는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녀는 이런 모략이나 암계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 정도도 못 해준다면…… 우린 한배를 타기 어려우니 돌아가게.”
“마마!”
“한배를 탔으면 그 배를 지키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하지. 후궁들만이 아니야. 심지어 본궁도 마찬가지지. 본궁의 힘으로 본궁의 사람들을 지켜야 해. 그런데 자네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배에 오르기만 하겠다고? 유감이지만 자네가 원하는 게 그런 거라면, 자네는 파벌 없이 지내는 게 낫겠군.”
“마마, 저는…….”
“이 정도도 못 해주는 동료를 우리가 믿을 수 있겠나?”
개시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제 신발 끝을 쳐다보다가 가까스로 애원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 * *
개시시는 홀로 멍하게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황후는 ‘원하지 않으면 관두라’고 했다. 관둘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계기로 개시시는 황후 측에게도 적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런 은밀하고 사적인 이야기까지 다 들어 버렸지 않은가.
‘천빈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그렇더라도 황후의 적이 되는 건 마찬가지겠지. 오히려 박쥐 취급을 받을지도 몰라.
사정을 다 아는 개시시의 측근 궁녀는 걱정스럽게 개시시를 바라보았다.
친정에서부터 따라온 시녀이기에, 이 측근 궁녀는 개시시가 이런 일을 불편해하는 걸 알고 있다 보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개시시가 묻자, 측근 궁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일단 황후 마마가 시킨 일을 해야 합니다, 소주.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황후 마마께 밉보일 거예요. 천빈은 폐하께서 보호해주시지만, 소주께선 아니잖아요. 황후 마마께 밉보이면 궁전에서 생활하기 힘들어집니다.”
“그러면 천빈은…….”
“앞으로 황후 마마가 또 무슨 일을 시킬지 모르지만, 지금은 황후 마마 말씀이 맞아요. 이 일만으로 천빈이 곤란해지진 않을 거예요. 공주님과 틀어질 뿐이죠. 일단 이 일을 한 다음 적당히 상황을 보면서 황후 마마와 거리를 두던가 계속 곁에서 지내던가 판단해야 합니다.”
“괴롭구나.”
“소주, 천빈 마마께선 소주께서 누명을 쓸지도 모를 상황이었는데도 바로 수사청에서 소주 이름을 말했단 걸 잊지 마세요.”
측근 궁녀의 말이 옳다고 여긴 개시시는 차분한 옷으로 바꿔 입고 장공주를 찾아갔다.
“개 답응 아닌가.”
장공주는 자신의 처소 연못가에 있다가 개시시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개 답응이 날 찾아오다니 신기하군.”
장공주는 얼른 들어오라며 개시시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가?”
개시시는 불안감에 자꾸 말려 들어가는 어깨를 가까스로 펴고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실은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 공주님께도 말씀드려야 할 듯해 왔습니다. 그게 옳은 거 같아서요. 하지만 제가 이 이야기를 드렸단 건 비밀로 해주세요.”
장공주는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일인지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해달라고?”
“무슨 말씀을 드리든 비밀로 해주세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가. 무서운데.”
장공주가 웃는 사이, 그녀의 궁녀인 치월이 찻잔을 가져와 두 사람에게 놓고 물러났다.
개시시는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실은 시체가 많이 발견된 날에요.”
시체 이야기에 장공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아. 그래. 그 날. 그 날이 왜 그러나.”
“……천빈이 밖에서 장공주님을 보았다고 해서요.”
“난 그날 밖에 나가지 않았는데.”
“천빈 말론…… 공주님이 입가에 피를 묻히고 있었다 했습니다.”
“내가?”
“예.”
장공주는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그런. 천빈이 뭔가 잘못 본 거겠지.”
“네. 천빈도 어두워서 확신할 수는 없다 말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다고요.”
“하지만 자네에겐 얘기했군.”
“!”
“둘이 친한 사이인가?”
“저는…….”
“전에 보니 별로 안 친해 보이던데.”
개시시가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자, 장공주는 무슨 일인지 알겠단 표정으로 웃었다.
개시시가 이간질을 하는 거라 여기는 투여서, 개시시는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황후가 무서워 어쩔 수 없이 오긴 했지만 저런 시선을 받자 몹시 부끄럽고 억울했다.
그녀도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야 그렇다 쳐도, 장공주 본인은 수많은 궁녀와 태감들을 죽인 살인귀가 아닌가!
“장공주님이 아니라고 하시니 아닌 거겠지요. 천빈에게도 그 이야기를 전해주겠습니다, 전하. 천빈도 안심할 거예요.”
“그래. 꼭 전해주길 바라네. 몸이 불편해 배웅은 하지 않겠네.”
* * *
개시시가 인사하고 나가자, 장공주는 혀를 찼다.
그녀는 후궁들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돌아가는 정황을 아예 모르진 않았다.
특히 천빈은 태후가 아끼는 후궁이기도 해서, 몇 가지 이야기는 태후에게도 들었다.
태후는 천빈이 원래는 개 답응과 친했는데, 좋지 못한 일에 같이 얽히면서 사이가 멀어졌다고 했다.
이후로 천빈은 다른 후궁들과 가깝게 지냈고 개 답응과는 데면데면하는 것 같다고, 둘이 오해 때문에 사이가 벌어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런데 천빈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내게 말해봐야…….’
장공주는 고개를 젓고서 남은 차를 마시다가, 치월을 부르려 했다.
그러다 문득 장공주는 며칠 전, 자신이 잠들기 전에 입은 옷과 깨어난 후 입은 옷이 바뀌어 있었단 게 떠올랐다.
그날이 하필 그 시체 여럿이 발견된 날이었다.
“……설마.”
혹시나 하면서도 장공주는 치월을 부르는 대신 찻잔을 들고 그녀를 찾아갔다.
그 생각을 하자 심장이 거세게 뛰어서, 걸으면서 잠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찻잎을 모아 두는 창고 쪽에서 치월과 유월이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빈이 뭔가 봤다고?”
“그래, 개 답응이 분명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았어.”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천빈은 그때 자기 처소에 있었다 했는걸. 그래서 천빈이 그간 사건에 대한 누명을 벗었잖아.”
“직접 보든 측근이 보든 누가 본 거 아니야? 장공주님이 온통 피범벅이 되어서 방에 계시는 걸 보고 우리도 얼마나 놀랐어.”
장공주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게 무슨 소리지?
“넌 장공주님이 정말 그 일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아니. 장공주님이 무슨 수로 그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겠어? 목격자거나 그러시겠지.”
“하지만 피가…… 입가에 묻어 있었잖아.”
“입가에 묻은 게 아니라 입가에도 피가 튄 거야.”
“어쨌든 천빈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면 조심해야 해.”
장공주는 더 듣지 못하고 황급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찻잔을 아무 데나 내려놓고서 비틀거리며 긴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러나 심장이 거세게 뛰어서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지? 사건이 있던 날, 자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니? 게다가 정말로 입가에 피가 묻어 있었다고 한다.
그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그리고 욱신거리는 통증 사이로 무언가 사람들의 놀라는 표정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들 괴물을 보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아. 머리가 아파. 머리가 너무 아파.’
* * *
“타천천이 사라졌다고?”
월요는 상소문을 읽다가, 특수 감옥의 간수가 급히 보고한 일에 놀라 시선을 들었다.
“예, 폐하.”
“어쩌다가?”
“창살도 그대로이고, 손을 묶어둔 줄도 그대로인데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빠져나가는 걸 본 사람도 없습니다.”
“……잡혀 온 게 아니라 잡히러 온 거였나.”
월요는 미간을 찡그리고 중얼거렸다.
“수배령을 내릴까요?”
타천천이 천빈의 몸 상태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월요는 쉬이 결정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쪽에서 타천천을 수감해 넣으려 하면, 무림인들은 관이 무림에 관여하려 든다 여겨 자기들끼리 똘똘 뭉칠지도 모른다.
타천천을 무력으로 잡아 온다면 그건 관이 아니라 또 다른 무림인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한참 월요가 이 일을 이야기하는 도중이었다.
또 다른 태감 하나가 다급히 안으로 달려오더니, 사색이 되어 외쳤다.
“폐하! 폐하! 장공주님께서 갑자기 미, 미!”
“똑바로 말하라.”
“미치신 것 같습니다! 무차별로 사람들을 공격하며 다니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