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화. 목적이 무엇입니까
“천빈. 반숙아. ……천년비.”
“왜 삼 단계로 나눠서 불러?”
점점 가까워지는 순서냐. 멀뚱히 그를 쳐다보자, 떡돌이가 내 손에 들린 시집을 스윽 가져간다.
뭐야 내 시집은 왜 가져가.
시집을 보다가 다시 그를 보자, 떡돌이가 시집이 들려 있던 내 손에 자기 손을 놓아두며 중얼거렸다.
“네가…… 날 위해서 무언가, 네게 조금이라도 해가 될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타변태랑 거래하러 간 거 때문에 그래?”
“그래.”
떡돌이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나는 밝게 웃으면서 당당하게 턱을 올렸다.
“나한테 고맙지 않아? 난 폐하를 위해 그런 행동도 했어.”
하지만 떡돌이는 고맙단 말 대신, 나를 착잡하게 보기만 했다.
치켜들었던 턱이 점점 내려갔다. 안 고마운가 보네.
“왜 이렇게 표정이 무거워?”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그런 행동,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고맙다 말하고 치우면 안 돼?”
“고맙지 않다.”
“!”
뭐 이 자식아? 내가 험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떡돌이는 내 눈썹 끄트머리를 잡고 아래로 꾹 내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전혀 고맙지 않다.”
“왜?”
“화가 났다.”
“그러니까. 왜?”
“넌. 짐이 짐을 희생해 널 살려주면. 네 기분은 어떨 거 같으냐.”
“네 몫까지 열심히 살 거야. 계란이도 잘 기를게.”
“!”
왜 저렇게 충격받은 얼굴이지? 이해가 가지 않아 계속 쳐다보았더니, 떡돌이는 한참 만에 한숨을 내쉬고서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기대었다.
“그래. 짐의 잘못이다. 너는 사상이 좀 유달랐지. 역지사지해보라 해선 안 됐어.”
“무슨 소리야 자꾸. 계란이가 이해가 안 된대. 똑바로 말해줘.”
“짐은 너와 다르다. 네가 짐을 위해 너 자신을 아프게 한다면, 짐은 고맙게 여기고 힘내서 살지 못해. 짐은…… 무너진다.”
“정신머리가 약하구나.”
“!”
떡돌이가 두 번째로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약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떡돌이는 황제답게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짐은 정신이 약해. 그래서 그런 걸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까…… 짐을 위해 네가 그런 짓을 하는 건, 절대로 짐을 위한 게 아니다. 알았느냐?”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란 거야?”
“짐을 위해, 아니, 그 누구를 위해서도 널 희생하진 마라.”
“내가 하고 싶어도?”
“타천천이 아니라 네가 변태로구나.”
“!”
나는 그를 째려보다가, 아까 그만큼 시원하게 인정했다.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걸 좋아하진 않아. 그냥 폐하를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야. 희생이라 할 것도 없었어. 한두 달 정도 궁 밖에 나가서 살다 오면 된다 여겼는걸.”
“그자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줄 알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해, 폐하.”
떡돌이는 내 손을 꼭 잡고서 손등 위에 입을 가져다 대며 중얼거렸다.
“악적 천년비. 악접답게 그냥 네 안위만 신경 써다오. 응?”
“뭐래.”
“약조해다오.”
“뭐를.”
“다음에 또 짐과 너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널 위해 행동하기로.”
“……폐하는? 폐하도 그럴 거야?”
“?”
“폐하도 폐하와 나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폐하를 위해 행동할 거야? 난 그런 거 싫은데.”
난 나도 떡돌이를 위해 행동하고, 떡돌이도 날 위해 행동해줬으면 좋겠는데. 떡돌이는 이런 거 싫은가.
하지만 연인이라면 이런 사이가 아닐까?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건가?
떡돌이는 나를 잠시 멍하게 보다가, 웃으면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조하마. 짐은, 널 위해 행동하겠다. 너는 짐이 없어도 잘 산다니까.”
“떡돌아…….”
말이랑 표정이 다른데? 왜 손가락에 힘이 이렇게 꽉 들어갔어?
* * *
황후는 이마에 대고 있던 물수건을 집어 꽉 틀어쥐었다. 깨끗한 피부 위로 파랗게 핏줄이 돋아났다.
그녀의 다른 쪽 손에는 수사청에 심어 놓은 사람이 가져다준 측근의 유서가 있었다.
비밀 암호문으로 적어둔 유서가.
황후는 소리를 죽인 채 눈물을 흘렸다.
-범인은 장공주입니다.
-누군가 우리 입을 막으려 합니다.
-처자식을 부탁드립니다.
‘범인은 장공주입니다’라는 필체와 뒤의 두 문장은 필체가 달랐다. 세 문장 모두 필체가 달랐다.
다른 때 적혔고, 적을 때마다 위급해지고 있단 뜻일 것이다.
황후는 입술을 깨물고서 어깨를 떨었다.
그들은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 그런데도 살해당했다. 장공주가 살인귀라는 걸 봐버려서!
‘황제다.’
황후의 호흡이 점점 무거워졌다.
‘황제야. 그가 자기 누이를 지키기 위해 내 사람들을 죽인 거다.’
그녀는 들고 있던 물수건을 집어던졌다.
물수건은 값비싼 화병에 맞아 아래로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졌다.
오랫동안 욱신거리던 머리가 지나친 분노로 오히려 맑아졌다.
황후는 침상에서 일어나며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내 부하들은 천빈을 따라갔으니, 내 부하들이 본 건 천빈도 보았겠지. 그러나 죽은 건 내 부하들뿐. 천빈과 황제는 한패일 터.’
그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둘 다.’
* * *
“요즘 너무 무서워요, 마마.”
하품을 하면서 침상에 드러누워 시집을 읽다가 졸다가 하고 있는데, 부성이 차를 들고 들어오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린다.
“뭐가?”
안 그래도 지루했던 터라 시집을 얼른 내려놓고서 묻자, 부성은 찻잔을 침상 옆 탁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수사청에서 또 사람들이 죽었대요.”
“어이구.”
고궐 짓이로구먼. 떡돌이가 고궐을 잡으러 보냈는데. 그전에 먼저 죽였나 보네.
하긴. 고궐이 타천천에게 그 얘길 듣고서도 시간이 좀 지나서 나와 떡돌이가 그쪽으로 갔으니.
고궐은 잡혔을까?
“그나마 마지막 시체는 우리 궁에서 안 나왔으니 다행이지요. 또 우리 궁에서 나왔으면 사람들이 수군거렸을 건데. 그렇죠?”
고궐은 잡혀야 해. 나쁜 놈!
* * *
“너무 나빠요.”
개시시는 종이를 펼쳐놓고 글씨를 쓰다가 옆을 보았다.
궁녀가 먹을 갈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뭐가?”
개시시가 웃으며 묻자, 궁녀는 볼이 튀어나와서 또 툴툴댔다.
“천빈 마마요.”
“!”
“전에는 우리 소주랑 그렇게 친하게 지내 놓고서. 잘 나갈수록 소주를 모른 체하잖아요.”
궁녀의 날카로운 말에 개시시는 말 없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궁녀를 말리지 않는 거로 보아, 역시 맺힌 게 있는 듯했다.
천빈이 그녀의 이름을 기몽 장군에게 말하는 바람에 누명을 쓸 뻔했던 일이 아직도 앙금으로 남아 있는데, 그걸 풀지 못한 채 방치하자 응어리가 점점 쌓여간 탓이었다.
“소주는 천빈이 따돌림당할 때 같이 따돌림당하면서까지 편을 들어주었잖아요. 그러다가 가면 사건 때문에 촉비랑도 완전히 틀어졌고요. 그런데 천빈은 소주를 괴롭힌 촉비랑 친하게 지내고…….”
“…….”
“천빈 때문에 소주는 황후 쪽에도 끼지 못하고 촉비 쪽에도 끼지 못하고 있어요. 너무해요!”
“되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탓이지.”
개시시는 중얼거리고서 다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 종이를 다 채우고서 붓을 내려놓는데, 밖이 약간 수선스럽더니 황후의 측근 궁녀인 영영이 나타났다.
“개 답응께 인사드립니다.”
영영은 개시시에게 인사를 올렸고 개시시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녀는 황후와 별 접점이 없는데, 왜 갑자기 황후의 궁녀가 찾아왔지?
“무슨 일인가?”
의아해서 묻자 영영이 아무것도 아니란 듯 대답했다.
“황후 마마께서 병상에 계속 있으셨더니 답답하다며, 오랫동안 개 답응을 보지 못했으니 보고 싶다 하십니다.”
보고 싶을 사이가 아닐 텐데……?
개시시는 여전히 의아했지만, 황후가 부르는 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알았네.”
개시시는 대답하고서 궁녀에게 겉옷을 가져오란 눈짓을 했다.
얇은 여름용 겉옷을 걸치고서 개시시는 영영을 따라 황후궁으로 걸어갔다.
황후는 침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우아하고 조용한 모습으로.
“황후 마마. 소첩을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개시시가 인사를 올리자, 황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서 영영에게 지시했다.
“개 답응에게 의자를 가져다주어라.”
개시시는 영영이 준 동그란 의자에 앉아 황후의 눈치를 살폈다.
쓰러졌다더니. 황후는 아직 안색이 좋진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정말로 왜 부른 걸까?
“내가 왜 불렀나, 궁금한가 보구나.”
“……황송합니다.”
“아니. 궁금할 만도 하지. 우리는 그리 가깝게 지내진 않았으니.”
“송구합니다, 마마.”
“천빈과 촉비가 가까워지면서 중간에서 떠버렸다지?”
의아한 기분은 황후가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자,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비수에 찔린 표정으로 황후를 당황해 쳐다보았다.
황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친절하지도 쌀쌀맞지도 않은 그런 얼굴.
“저는…….”
“그럴 수도 있지. 사람 사이는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예…….”
“하지만 처음부터 친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자네와 천빈처럼 친하다가 틀어지면 다시 돌아가기 어려워. 특히 중간에 촉비처럼 둘을 틀어지게 한 원인이 끼어 있다면. 그렇지?”
“네.”
“천빈도 천빈의 입장이 있으니 마냥 탓할 수는 없겠지.”
“…….”
“하지만 이대로는 자네가 안 됐어. 자네는 천빈과 친하게 지내면서 다른 후궁들과는 그리 교류하지 않았잖나.”
황후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정곡을 계속해 찔러대자, 개시시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도 황후가 이 틈을 타서 천빈을 욕하는 건 아니어서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다. 그저 좀 씁쓸할 뿐.
황후는 그런 개시시를 물끄러미 보다가 본론을 꺼냈다.
“촉비도 있으니 다시 자네가 천빈과 친하게 지내긴 힘들 거야. 그렇지만 궁전에선 독불장군으로 살아남기 어려워. 그래서 자네를 불렀네.”
“예?”
“자네가 날 따르겠다 약조한다면, 내가 자네를 지켜주지.”
“!”
개시시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래서 부른 거구나.
하지만 그녀는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황후의 제안을 무작정 거절하자니 이젠 황후까지 적으로 돌리게 될 것 같고, 그렇다고 넙죽 받아들이자니 그래도 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안 될 것도 없다 싶어서, 개시시는 조용히 대답했다.
“따르겠습니다, 황후 마마.”
“그래.”
황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쁜 내색 없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개시시는 오히려 그래서 마음이 더욱 편해졌다.
‘필요에 따라 인맥을 만드는 것도 이곳에서 살아남는 방식이겠지.’
“하지만 개 답응. 내가 답응을 믿어도 좋다는 걸, 그 전에 먼저 보여주었으면 하는데.”
“네?”
“심부름 하나만 해주겠나?”
“심부름……이라면……?”
황후가 눈짓하자, 영영이 개시시의 궁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황후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아 무서운 눈으로 개시시를 보았다.
“궁인들 시체가 대거 발견된 날. 그날은 천빈의 비연궁에 시체가 있지 않았지. 그럴 수밖에. 천빈이 비연궁에 있지 않았으니까.”
“네?”
개시시는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혹시…… 설마…… 그 말씀은…… 마마께선 천빈을…….”
“아니. 천빈은 범인이 아니야. 범인이라 의심했지만 아니었지. 천빈에게 사람을 붙여서 알게 되었네. 그녀도 오해를 산 거였어.”
“아…….”
개시시는 안도해서 황후를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황후는 온수연에 대한 일로 천빈을 싫어할 텐데. 왜 갑자기 두둔하는 것처럼 말하지?
“범인은 장공주라네.”
개시시는 벌떡 일어서서 두려운 눈으로 황후를 보았다.
“마마, 그건……!”
“천빈은 입을 다물었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계속해서 장공주에 의한 희생자가 나오겠지.”
개시시는 겁이 나서 손이 하얗게 질렸다.
황후는 대체 뭘 원하는 거지? 뭘 시키고 싶어서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