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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10화 (210/283)

##  210화. 널 위해 한, 네가 원하지 않는 일

타천천 그 새끼는 나랑 대체 뭔 원수를 졌나. 아니, 원수를 졌으면 날 살리지도 않았겠지. 원수를 진 건 아니야.

원수를 진 건 아닌데 왜 그딴 요구를 해?

걔는 대체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사랑하는 척은 그렇게 해대는 거지?

그가 무언가를 연구하고 싶다면 시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연구해야 한다. 그게 가장 미지의 세계일걸?

“후우…….”

한숨이 나오네. 젠장. 이 상황에서 떡돌이가 날 위해 장공주를 포기하면 어떻게 되겠어?

‘떡돌아, 감동이야!’ 하는 마음은 오래 못 갈 거다.

떡돌이가 날 보면서 이전처럼 편하게 웃을 수 있을까? 내가 미워서가 아니라 장공주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날 보면 누이가 생각나니 이전처럼 편하게 올 수 없을 테고, 그런 날이 겹쳐지다 보면 결국 마음이 식어가겠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잖아.

나도 뭐. 떡돌이가 그러고 있는데 혼자 가슴 아파하며 “떡돌아…… 날 봐줘.” 이러고 있을 성격은 아니다.

떡돌이가 날 멀리하면 나도 멀리하겠지.

“…….”

좋아. 타천천이 원하는 게 내가 후궁에서 나가는 거야? 아, 좋아, 해주겠어.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면 되는 거 아냐. 아이가 있으니 돌아오기 어렵진 않겠지.

한…… 한 달. 어쩌면 두 달. 이 정도만 후궁 생활을 관두자.

결심이 서자마자 나는 머리 장신구 하나를 빼서 내가 서 있는 곳에 내려놓고 타천천이 있는 특수한 감옥으로 걸어갔다.

내 얼굴을 아는 간수들은 굳이 날 막지 않고 물러섰다.

나는 그들 사이를 지나가 계단을 내려갔다.

타천천이 갇힌 감옥 앞에 멈춰 서자, 그가 동그란 원형 의자에 긴 다리를 쭉 펼치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 상태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타천천은, 내가 바로 앞에 서자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환하게 웃으며 나를 불렀다.

“녕녕. 나 보러 왔어?”

저러고 있으면 안 지겹나.

게다가 손이 뒤로 묶인 채 며칠을 보냈는데 어떻게 밥을 먹지?

나는 그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엿들었어.”

“응? 무슨 소리야, 녕녕?”

“내가 후궁에서 나오면 장공주를 고쳐주겠다 했다며.”

“응?”

타천천이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히죽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누가 그래?”

“네게 그 제안을 받은 사람이 그러겠지.”

“그런가.”

“그 제안. 내가 받아들일게.”

나는 허리를 숙여서 그와 눈을 맞추었다.

“후궁에서 나갈 테니까. 장공주를 고쳐줘.”

두 달 나가는 것도 나가는 건 맞지. 암.

타천천의 눈이 더욱 가느스름해졌다.

* * *

“승언아.”

“예, 폐하.”

“저 눈에 잘 보이는 장소에 반듯하게 놓여 있는 커다랗고 무거워 보이는 장신구가 무엇이냐.”

월요의 질문에 승언은 눈치를 보다가 얼버무렸다.

“높은 귀족 여인의 장신구 같습니다.”

“짐이 천빈에게 깜짝 선물한 장신구 같진 않으냐. 100년 단위로 한 움큼씩만 나오는 귀한 기하석으로 만든 보석 같은데.”

하지만 황제가 이미 다 알면서 묻는 듯하자 승언은 결국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 눈에도 그리 보입니다.”

월요는 보란 듯 바위 위에 놓여 있는 보석 앞으로 다가가 그걸 집었다.

떨어뜨리면 무슨 소리든 소리가 날 게 분명한 장신구. 크고 무게도 나간다.

그런 장신구가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있단 건, 이 보석의 주인이 일부러 내려두고 간 게 틀림없었다.

월요는 보석을 내려다보다가 흠칫했다.

“천빈이 우리 대화를 들었나 보다.”

“대화라면…….”

“타천천의 제안.”

놀란 승언이 월요를 쳐다보았다.

부담을 느낄까 봐, 일부러 월요는 타천천의 제안에 관해 천빈에게 아예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천빈이 담을 넘어와서 대화를 듣고 갔다니…….

“무공 고수가 연인으로 있으니 너무 번거롭구나. 틈만 나면 담을 넘으니. 내 그림자들은 그걸 또 못 잡고.”

뼈 있는 월요의 중얼거림에 승언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월요는 장신구를 그대로 든 채 곧장 몸을 돌렸다.

“감옥으로 가자. 제안을 받아들이게 둘 순 없다.”

승언과 오원요는 굳은 얼굴로 얼른 황제를 따라붙었다.

“폐하.”

감옥 안에 도착하자 간수가 보자마자 바로 알려주었다.

“천빈 마마께서 안에 들어가 계십니다.”

월요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나마 안에 들어가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니 다행이었다.

제안을 받아들이고서 일전에 개원과 떠난 것처럼 타천천과 둘이 훌쩍 떠났더라면 붙잡을 수조차 없지 않은가.

‘정말 반숙이 너는…….’

월요는 보란 듯 천빈이 놓고 간 장신구를 움켜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천빈은…… 그녀는…… 이걸 자신이 좋아할 거라 생각하나?

누군가를 희생시켜 누군가를 구하는 건 절대로 그가 원하는 선택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하더라도 싫은 선택을, 천빈이 억지로 하게 만들려 하다니. 최악이지 않은가.

천빈은 배려라고 한 행동이지만 이건 절대로 배려가 아니었다.

월요는 화까지 났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지만 점차 당혹스러움이 가시자 그사이를 분노가 채워갔다.

너무 화가 나서 환청이 들릴 지경이었다.

“이 개새끼!”

그리고 멀리서 보이는, 감옥 창살 사이로 손을 넣어서 누군가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뭔가를 잡아당기는 천빈의 환상…….

“?”

환상이 아닌가? 환상치고는 너무 거칠다.

“이 개새끼!”

환청 역시도 거칠다.

월요는 빠른 걸음으로 걷던 걸 멈추고서 눈을 비볐다.

눈을 비비고 내리자, 화가 나서 창살 사이로 누군가를 열심히 공격 중인 천빈이 분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는 누군가의 머리카락…….

“아아! 녕녕! 내 머리! 내 머리카락!”

“천빈?”

당황한 월요는 총총걸음으로 다가가며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천빈이 휙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화가 난 표정인지, 평소에는 순하게 축 처진 눈썹이 야차처럼 올라가 있었다.

“천빈? 뭐, 뭐 하는 게냐?”

당황한 월요가 묻자, 천빈은 그제야 손에 쥐고 있던 걸 놓더니 씩씩거리며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타천천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장공주 고치는 법 모른대!”

월요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몇 번 깜빡이다 물었다.

“뭐?”

“저 자식이 내가 후궁에서 나가면 장공주 전하를 고쳐줄 거라 했다며! 받아들이겠다고 했더니, 모른대! 장공주 전하 고치는 법 모른대! 자기도 못 고친대!”

“!”

월요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잠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천빈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지만, 어떤 조건으로도 누이를 고칠 수 없다는 건 충격이었다.

월요가 비틀거리자 승언이 얼른 그를 부축해주었다.

월요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곧 천빈보다 더 무서운 얼굴로 타천천을 노려보았다.

“너!”

타천천은 천빈에게 쥐어뜯기던 몸을 뒤로 빼며 하하, 난감한 척 웃었다.

“당연히 안 받아들일 줄 알고 한 말인데. 설마 두 분이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한 줄은 몰랐네요.”

월요는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서 타천천을 죽여버리고 싶어졌다.

천빈이 왜 타천천 이야기만 나오면 뚱한 표정이 되는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저자는 매번 저런 식인가?

그 분노가 밖으로 나오기 전. 타천천은 생글 웃으면서 그들의 분노를 옆으로 돌려주었다.

“대신 공주 전하의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몸이 허물어질 때마다 심장을 주면 됩니다. 지금처럼.”

월요는 다른 충격에 다시 정신이 멍해졌다.

타천천은 그 반응을 즐겁게 지켜보면서 말을 이었다.

“단, 공주 전하가 절대 자신이 하는 끔찍한 일들을 알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듣자 하니 공주 전하는 심장을 빼먹을 때 이성이 사라진다면서요? 그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일 겁니다. 그게 무너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휘몰아치는 충격에 월요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가 그는 타천천의 말 중 이상한 부분을 알아챘다.

“듣다니? 누구에게 들었단 거냐?”

천빈에게 들었나, 싶어 천년비를 힐긋 보다가 월요는 다시 타천천을 보았다.

타천천의 입꼬리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대하듯 실룩 올라갔다.

“고궐에게 들었습니다. 그쪽도 공주를 구해 달라고 절 찾아왔었거든요. 바로 여기로.”

“!”

* * *

타천천이 장공주에게 도움이 안 된다 한들 떡돌이는 여전히 그를 해칠 수 없을 거다.

내가 있으니까. 내게는 도움이 될 테니까.

이 때문에 떡돌이는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 확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나는 타천천을 한 번 쏘아보고서 얼른 그 뒤를 따라갔다.

떡돌이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내게 무어라 말을 할 거라 생각했지만, 떡돌이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내 손을 한 손으로 잡고서 오 공공에게 지시했다.

“오원요. 장공주 일을 비밀에 묻어야 하니, 고궐은 수사청에 잡아둔 목격자들을 모두 죽이려 할 거다. 그곳에 사람들을 보내서 고궐을 잡아 와라.”

목격자들을 구하라……가 아니라 고궐을 잡으라고 지시를 내리네.

게다가 명령을 내리는 눈동자가 흉흉하다. 타천천 말에 분노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 * *

“대체 내 부하들은 언제 놓아주는 건지.”

황후는 긴 의자에 앉아 쓴 탕약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어의는 제발 머리 아픈 생각은 더 하지 말고 계시라 말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측근들 중 강한 자들이 통째로 사라졌는데 마음이 편안할 리가 없었다.

무슨 일로 잡혀간 건지, 뭘 목격한 건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범인으로 잡혀간 게 아니라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불안해졌다.

궁궐에서는 ‘봐선 안 될 것’을 본 죄로 죽는 이들도 많았다. 혹시 그들도 그런 걸 본 거라면…….

그때. 문밖에서 우당탕탕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곧 그녀의 장태감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장태감은 황후의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냐.”

황후는 탕약을 내려놓는 것도 잊고 물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장태감이 전할 소식이 좋지 않단 걸 알 수 있었다.

장태감이 울먹이며 외쳤다.

“황후마마. 수사청에 수감된 이들이 모두 죽었다 합니다!”

손가락에 힘이 쭉 빠지며 들고 있던 탕약 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황후마마!”

* * *

한 시진 정도를 기절했던 황후는 깨어나자마자 어의를 모두 무르고 장태감에게 지시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그자들과의 사이에 정해둔 암호가 있다. 그들이 무언가…… 억울한 게 있다면 암호로 적어 숨겨두었을 거다. 감옥 안 어딘가에 숨기거나 믿을 만한 자에게 맡겼겠지. 수사청에 우리 사람이 하나 있으니, 그자에게 말해 그 쪽지를 찾아와라.”

* * *

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소란스럽지만, 비연궁 내부는 평화롭다.

나 역시 밖에서는 여기저기 뛰어다녔지만, 이 안에서는 최대한 침착하게 시집을 읽으려 노력 중이다.

우리 계란이는 배 속에서부터 아주 온갖 일을 다 보는구나.

괜찮을까? 배 속에 아기가 있을 때는 보기 좋은 것만 보고 듣기 좋은 말만 들어야 한다 했는데. ……타천천한테 개새끼라 하지 말걸.

얼마나 그렇게 후회하고 있었을까.

“황제 폐하 납시오!”

오 공공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더니, 떡돌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침상에서 몸을 기댄 채 고개만 돌려 그를 보았다.

아까 감옥 앞에서 떡돌이는 표정이 별로 안 좋았어. 지금도…… 면사 때문에 입이 안 보이지만 눈은 찌푸리고 있다.

나는 떡돌이가, 내가 자기를 위해서 타천천과 거래한 걸 알면 몹시 감동받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머리 장식도 놓아두고 갔다. 혹시라도 그가 다른 오해를 할까 봐.

그런데 왜 저렇게 표정이 안 좋을까?

괜히 시집을 펼쳐서 그를 곁눈질하고 있자니, 떡돌이는 무거운 얼굴로 침상에 걸터앉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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