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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09화 (209/283)

##  209화. 그들의 이야기

타천천의 여유로운 태도가 용화노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타천천은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용화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는, 원래 그가 남에게 선을 그을 때 쓰는 말투로 돌아갔다.

“음. 못 알아들으면 됐습니다.”

그 태도에 용화노는 기분이 상했지만, 지금은 그의 기분을 챙기러 온 게 아니었다.

그는 장공주에 대해 물어보러 온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타천천이 먼저 장공주에 대해 물었다.

“그래, 우리 장공주님 상태는 어떤가요? 폐하부터 천빈 마마, 그리고 그쪽까지 이 난리인 걸 보니 좋진 않은 게 분명한데.”

용화노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화내지 않나?”

타천천과 손을 잡기로 해 놓고서 그의 비기라 할 수 있는 혼령술과 강시술 일부를 훔쳐내 달아났다.

훔쳤다고 해도 그저 눈으로 보고 필요한 것만 외운 정도이지만.

만약 시간이 조금이라도 넉넉했더라면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장공주가 상대란 건 몰랐지만, 타천천이 부활을 직접 돕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렇게 오래 기다리기엔 그와 장공주에겐 시간이 많이 없었다.

타천천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왜 화를 내나요?”

“……안 난다고?”

“알아서 실험 재료가 되어 줬잖아요. 그런데 내가 왜?”

“!”

“솔직히 내가 만드는 강시들은 다 소중한 강시들이라. 이렇게 극단적으로 실험해 볼 염두도 안 나거든요.”

타천천이 방긋 웃는 순간, 용화노는 눈이 뒤집혀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쾅 소리가 나며 타천천이 창살에 턱을 부딪쳤다.

용화노는 눈을 번뜩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실험 재료? 실험 재료라고?”

타천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둑질도 제가 해. 실험도 제가 해. 화도 제가 내. 이상한 사람이네.”

용화노는 그 말에 손에서 힘을 풀었다.

타천천이 옳았다.

장공주를 실험 재료라 표현하는 그에게 화가 났지만, 어쨌든 그녀를 안전하지 못하게 부활시킨 건 자신이었다.

설령 시간이 없었다 해도.

대신 용화노는 창살을 타천천 멱살 쥐듯 꽉 틀어잡고서 장공주의 상태에 대해 자신이 아는 대로 다 이야기했다.

“처음엔 괜찮았다. 완벽했어. 오히려 강시 몸이라 그런가, 힘이 많이 세지기까지 했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안색이 창백해지고 자주 어지럼증을 호소했지. 나중엔 팔을 살짝 잡아당겨도 팔이 빠질 정도로 몸의 관절이 약해졌고. 쓰러지는 일이 많아졌어. 왜 그런가 이유를 찾아보려 했는데, 어느 날 밤 보았다. 그녀가…… 혼자서 처소를 빠져나가 사람의 심장을 빼 먹는걸.”

“어휴 무서워라.”

타천천이 눈을 빛내며 추임새를 넣었다.

재미있어하는 태도에 분노한 용화노는 그를 죽일 듯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공주는 무공을 익힌 적이 없어. 강시가 된 후 힘이 세졌지만 그것뿐이었지. 그러나 처소를 빠져나갈 때 공주의 모습은 평범한 사람 같지 않았다.”

“음.”

“돌아온 뒤에는 곧장 잠에 빠지더군. 몇 시진을 연달아 자고 일어났을 땐 몸 상태가 처음으로 돌아가 있었어. 그리고…… 다시 되풀이되는 거다. 이게 계속.”

“아하.”

타천천은 필요 없는 추임새를 계속 넣다가 용화노가 말을 멈추자 얼른 물었다.

“그거 말곤? 말할 게 없나요?”

“더 있어야 하나?”

“지금 공주 몸 안에 있는 영혼. 공주 영혼은 맞습니까?”

타천천의 질문에 용화노는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당연하다.”

“진짜요?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일부러 날 모른 척하고 있지만 그녀가 확실해. 본인도 모르게 나오는 사소한 습관이나…… 날 죽이려 드는 것까지. 전부.”

그 말에 타천천은 급격히 실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녕녕. 정보 전달이 제대로 안 됐잖아. 다른 사람 영혼이라더니.”

타천천은 장공주 몸속에 다른 영혼이 있길 바란 모양이었다.

용화노는 이를 눈치챘지만, 일단 그가 아쉬운 입장이기에 화내는 대신 요청했다.

“장공주를 고칠 방법을 알려다오. 너 외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타천천은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부정했다.

“안 될걸요.”

“안 된다니?”

“장공주 몸이 기본 토대 아닙니까. 그러면 어쩔 수 없답니다. 그 몸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걸요.”

“!”

“안 무너지려면 그냥 이대로 지내야죠.”

시체 처리나 잘해 줘요, 덧붙인 타천천의 가벼운 말에 용화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분노 때문인지 심장이 철렁해서인지 스스로도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 눈빛을 보며 타천천이 혀를 찼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몸이 영혼의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영혼도 몸의 영향을 받는단 사례가 지금 나오고 있답니다. 그러니-.”

타천천의 말이 끝나기 전 용화노가 그를 붙잡았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공주 영혼을 다른 몸으로 옮길 수는 없나?”

“나도 불확실한 분야라서. 확신할 수 없는데요.”

“그래도 시도해보면? 강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몸에?”

그 절박한 시선을 보며 타천천이 다시 혀를 찼다.

지금까지 그가 본 사례 중 강시가 되지 않은 ‘막 죽은’ 사람의 몸에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간 경우는 딱 두 건이었다.

1번 사례는 그가 이런 경우도 가능하단 걸 인지하게 된 사건이었고, 2번 사례인 천년비도 그가 의도한 건 아니었다. 실패가 만든 성공이지.

타천천은 장공주가 3번 사례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아니라니.

“죽은 자의 영혼을 처음 불러들이는 것도 실패할 확률이 이리 높은데. 다른 몸에 옮기는 거라……. 원래 몸으로 옮기는 거라면 모를까, 원래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기는 거라니 사실 자신 없군요.”

“지금보단 낫지 않을까?”

“공주를 다른 몸에 옮기려다 영혼도 몸도 잃기보단, 그냥 공주가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도록 지켜주는 게 나을 겁니다. 공주가 사람을 공격할 때마다 이성을 잃는 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르니까. 그게 깨지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요?”

무심하지만 진지해 보이는 말에 용화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때, 문밖에서 무언가 소리가 났다. 간수가 이쪽으로 오는 듯했다.

용화노는 음울한 눈으로 타천천을 바라보다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 * *

틈을 보아 감옥을 빠져나간 용화노는 장공주를 찾아갔다.

새로운 희생물을 먹은 그녀는 다시 건강하고 혈색 있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호숫가에 앉아 손으로 물을 찰랑이다가 이따금 공기를 느끼려는 듯 눈을 감고 얼굴을 든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용화노의 눈앞에 과거의 기억이 흘러갔다.

* * *

“날…… 이용했느냐.”

“용서하십시오.”

“날 사랑하긴 했느냐?”

공주의 슬픔과 분노는 절제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녀는 이성을 잃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금 슬픈 사실을 대하듯 그렇게 물었다.

그는 주저하다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용서하십시오.”

거짓 사랑을 한 번 더 속삭이는 건 쉽다. 그러나 어차피 의도가 들통난 판에 사랑을 속삭여 무얼 하겠는가.

차라리 냉정하게 말하고 정을 끊어내자, 그게 낫다고 여겼다.

그 말을 뱉고 그가 그때 뭘 했던가.

그는 자신이 공주에게 일부러 접근했단 게 새어나간 경위를 머릿속을 훑고 있었다.

진실을 아는 건 신뢰할 만한 동생들이었는데. 그중 누가 입을 함부로 열었을까.

머릿속엔 그 생각뿐이었다. 공들인 일이 깨졌다는 생각과 함께.

공주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으나, 그녀는 모든 걸 갖춘 고귀한 여인이 아닌가.

그에게 받은 찰나의 상처 정도는 얼마 가지 않아 잊어버릴 거라 여겼다.

주위에서 볼 수 없는 모습에 잠시 들뜬 마음은, 그녀와 걸맞는 상대가 나타나면 옛 추억으로 스러질 거라고.

사실 일이 새어나가지 않았을 때도 그는 공주의 마음이 언젠가는 다른 곳으로 향할 거라고 여겼다.

그는 저 바닥에 있는 사람, 남들보다 더 늦게 햇빛을 받는 사람이고, 그녀는 누구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

하늘이, 태양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한 시진 뒤. 떠날 준비를 하던 그는 공주가 호수에 뛰어들어 자결했단 이야기를 들었다.

공주를 위로하기 위해 동생이 곁에 있었는데, 공주는 멍하게 서 있다 그대로 물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주위에 사람들을 물린 상태라 곁에 있던 건 동생뿐이어서 결국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고.

그 순간.

용화노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단 느낌을 태어나 처음으로 받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공주가 죽은 호숫가에 서 있었다.

호숫가에 비단보가 덮여 있었다. 그 아래로 한쪽 신발이 벗겨진 발이 보였다.

옆에서는 황태자가 혼절하듯 울고 있었고, 궁녀들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를 본 황태자가 다가와 무어라 했던 것 같다.

무어라 했는진 아직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그녀의 발뿐이었다.

물속에서 찰랑거릴 때마다 드러났던 발.

그가 두 손에 넣고 간지럽히듯 주물러주면 금세 치마 사이로 도망가던 발.

황태자가 그를 쥐고 흔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그녀가 사람들을 물리고 동생만 곁에 두었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그는 어린 황태자를 붙잡고 소리치고 말았다.

“왜 잡지 않았습니까!”

황태자의 표정이 상처로 일그러지는 걸 보았고, 소식을 듣고 온 황제가 붉어진 얼굴로 그를 잡으라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황태자를 뿌리치고 달아났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만들어 둔 피난처까지 왔을 때.

그는 눈물로 앞이 범벅이 되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며칠을 그렇게 울고 흐느끼기만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덤덤하게 자신을 추궁하던 공주가 죽었다는 걸.

자신 때문에,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던 그녀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걸.

그러다가 용화노는 깨달았다.

자신이 만약을 대비해 피난처에 들여놓은 짐 중엔 돈이 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모두 다 그녀의 손길이, 추억이 닿은 것들뿐이었다. 자신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단 걸.

“날 사랑하긴 했느냐?”

그녀가 마지막에 한 질문이, 어떤 대답을 해줄까 고르고 고르다 회피해버린 그 질문이 그의 가슴에 칼날처럼 박혀 들어왔다.

“사랑했나 봅니다.”

손을 보니 물에 젖은 신발 한 짝이 있었다. 그새 그것만 가져온 게 분명했다.

용화노는 입술을 깨물고 신발을 끌어안았다.

소리 죽여 울어보지만 그녀는 이미 죽은 후였다. 그 때문에.

공주가 사랑 때문에 자결했단 이야기를 숨기기 위해 그녀는 병사로 꾸며졌다.

공주를 기만한 그의 짓거리는 그녀의 체면을 위해 묻혔다.

공주의 장례식 날, 그는 먼발치서 그녀의 장례식을 바라보며 맹세했다.

그녀가 그 때문에 잃은 것들. 그녀가 원래 누려야 했던 모든 삶. 그걸 되찾아줄 거라고.

그리고 그는 평생 그녀의 뒤에서 그녀를 위해 속죄하며 살리라고.

* * *

장공주가 고개를 돌리면서 빠르게 스쳐 지나간 용화노의 상념이 깨졌다.

눈이 마주치자 장공주는 이전처럼 맑게 웃었다.

용화노의 심장이 뒤틀렸다.

그녀는 괴물이 아니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자신이 괴물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를 위해 평생 괴물이어도 괜찮았다.

계속 사람의 심장을 먹어야 한다고? 먹으면 된다.

그녀가 피를 보기 전에 자신이 피를 보면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더럽고 위험한 것따윈 모른 채 잃어버린 행복을 누려주기만 하면 된다.

하늘에서도 그녀를 탓하진 못할 것이다. 모든 악행은 그가 저지른 것이니.

“물가는 위험합니다. 다른 곳에서 노시지요, 전하.”

거기에 장공주가 대답하기 전, 잠시 자리를 비웠던 궁녀들이 오는 소리가 났다.

용화노는 근처의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숨겼다.

궁녀들은 물가에 있는 장공주를 보자 반사적으로 흠칫하다가, 서둘러 다가와 그녀를 잡았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공주님. 요즘 살인귀가 돌아다닌다고 해요. 무섭습니다.”

“네. 안에서 노세요.”

장공주가 궁녀들의 부축을 받아 멀어지는 모습을, 용화노는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다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수사청을 보았다.

공주를 본 자들을…… 모두 죽이자.

* * *

떡돌이 상태를 보기 위해 그의 처소로 갔을 때였다.

문 앞에 오 공공이 보이지 않았다. 승언이도 없었다.

생각해보다가, 떡돌이 별채 뒤에 있는 후원이 생각났다.

떡돌이가 생각할 게 있으면 거기에 틀어박힌다 했지. 혹시 거기서 울고 있지 않을까?

위로해주어야지.

얼른 그쪽으로 가서 전처럼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런데 은신해서 후원 안으로 들어가고 있자니, 나지막한 소리가 났다.

“타천천의 제안은 거절해야겠다.”

“폐하!”

“천빈을 후궁에서 내보내면 장공주를 살려주겠다니. ……역시 이건 아니다. 하나를 구하기 위해 하나를 바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타천천이 그런 제안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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