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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08화 (208/283)

##  208화.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월요는 말없이 타천천을 바라보다가 건조하게 지시했다.

“끌고 가라.”

지시가 내려지자마자 곁에 있던 승언이 손짓을 하고, 물러서 있던 호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수많은 황제의 그림자들이 타천천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절로 겁에 질릴 만큼 무서운 광경이었으나, 타천천은 여유로웠다.

그는 내 예상이 맞는다면 여기서 달아날 정도로는 강할 텐데.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갔다.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황제의 부하들을 따라갔다. 그가 떠나간 뒤 남겨진 건 쌉싸름한 공기뿐이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젓가락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 생각 안 하고 끌고 가라 했어?”

“생각은 했다. 그런데 너무 많아.”

난 이럴 때 참 곤란해. 뭐라고 위로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

“폐하.”

“응.”

“나랑 비무할까?”

하지만 한바탕 검을 휘두르다 보면 조금 기분이 가실지 모른다.

내 제안에 떡돌이는 주춤하다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었다.”

“폐하.”

“응.”

“아니야. 아무것도.”

* * *

타천천을 끌고 가라 하긴 했지만 그가 장공주를 고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사람인지라, 떡돌이도 그 이상 손을 대진 못했다.

사실 떡돌이는 고문을 해서라도 타천천을 움직이려 했지만 내가 말렸다.

“고문하기도 전에 자결할 거야. 그러지 마.”

떡돌이는 믿지 않으려 했지만 사실이다.

비밀을 간직한 자들은 적에게 잡히면 자결해 버린다. 대의가 커서가 아니라, 그편이 수월하니까.

사실을 털어놓는다고 해도 적이 아량을 베풀어 살려줄 가능성은 적으니, 고문당한 뒤 입막음 당해 죽을 바에야 그냥 정보를 안 주고 죽어버리겠단 태도 때문이었다.

그러니 떡돌이가 타천천을 자극하면 그는 그냥 죽어버릴 확률이 높았다.

그 상태로 하루 정도가 지난 뒤.

타천천이 아직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직접 그를 만나러 감옥 안에 들어갔다.

* * *

“이야, 녕녕.”

타천천은 감옥 안에서도 여유롭게 앉아 있다가 내가 나타나자 웃으면서 인사했다.

손을 뒤로해 묶고 있는데도 여유로운 태도였다.

떡돌이가 정말로 고문하진 않았는지 몸에 별다른 상처가 생긴 것 같지도 않고.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사하고 싶은데 손이 뒤로 묶여서. 손을 못 흔드네, 녕녕.”

“안 흔들어도 돼.”

“그러면 서운하잖아. 팔을 빼서라도 흔들어줄까?”

“뭐 물어보러 왔어.”

“알아. 넌 항상 뭔가를 물어보러 오니까.”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먼발치에 서 있던 간수 하나가 간이용 의자를 가지고 다가왔다.

간수가 의자를 감옥 안에 놓아주고 멀리 떨어지자 타천천이 웃음을 터트렸다.

“몰래 보러온 건 아닌가 봐.”

“누구랑 달라서.”

“신뢰받고 있구나, 녕녕.”

“노력하는 중이야.”

“이곳 생활이 마음에 드나 봐?”

타천천은 계속 질문하려는 태세였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는 대신 그를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뭘 원하는 거야?”

“뭐가?”

“타천천. 그댄 도망칠 수 있는데도 도망치지 않았잖아. 왜 여기까지 순순히 잡혀 왔어?”

타천천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그거 물어보러 왔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그랬잖아. 폐하의 목숨을 주면 장공주를 치료해주겠다고.”

당시에는 너무 놀라워서 별달리 생각나는 게 없었는데. 시간이 가시자 타천천이 한 말이 의심스러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타천천이 떡돌이 목숨을 노릴 일이 없는 탓이었다.

“아니잖아. 너 폐하 목숨 원하는 거 아니잖아.”

결국 이 부분을 대놓고 지적하자. 타천천은 빙그레 웃더니 철창 사이로 활짝 웃었다.

“나에 대해 잘 아네, 녕녕.”

“뭘 가지면 장공주를 도와줄 거야?”

“글쎄.”

타천천은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말할 생각이었다면 진작 말했겠지, 녕녕?”

“장공주 전하를 도우면 안 될 이유는 있어?”

“장공주 전하의 동생이 날 여기 가두었잖아, 녕녕.”

어쩐지 여기 마주하고 있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그에게 더 묻길 포기하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서 멀찍이 떨어진 간수를 부르기 전. 그가 말했다.

“사모해, 녕녕.”

자주 뱉는 말이지만, 이럴 때 뱉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힐긋 고개를 돌리자 그가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를 보다가 나는 전에도 몇 번 한 말을 한 번 더 해주었다.

“네가 아무리 연극을 해도 안 믿어. 갑자기 왜 또 그 말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차피 너도 알잖아. 내가 널 믿지 않는 거.”

한때, 아주 잠시지만 그가 날 연모한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

개원이처럼 연인 관계가 된 건 아니지만, 그가 날 연모한다는 착각은 잠시 했지. 아니라는 걸 바로 알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 나는 타천천이 농담처럼 저런 말을 해도 절대로 휘말리지 않는다.

그러고서 이번에는 진짜로 나가려는데 타천천이 다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황제가 줄 수 없는 거야, 녕녕. 내가 원하는 건 나만이 줄 수 있어.”

“뭐?”

“그러니 내게 대가를 주고 장공주를 고쳐달라 해도…… 글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그럼 떡돌이한테도 그렇게 말하라고 반박하려는데, 갑자기 타천천이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네가 날 배신한 건 좀 슬프다, 녕녕.”

그 말을 듣는데 아주 조금 양심에 타격이 왔다.

그가 왜 장공주를 고쳐주지 않을 거라면서 황제의 목숨을 달라느니 어쩌니 하는 엉뚱한 말을 뱉는진 모르겠지만, 어쨌건 용고를 먹고 죽은 날 구한 건 실제로 타천천 아니던가.

그러니 나도 비원이 후궁들 사이에서 수상한 짓을 하고 다닌단 걸 알면서도 떡돌이에게 타천천에 대해 함구하고 있었고.

그런데 그걸 딱 정면으로 찌르다니.

“…….”

말없이 서 있자 타천천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해서. 알고 있으라고 말해준 거야, 녕녕.”

* * *

천년비가 조금 시무룩해진 걸음으로 나가자, 슬픈 빛을 띠고 있던 타천천의 얼굴에 바로 미소가 돌아왔다.

‘내 귀여운 녕녕. 누군가의 악행에 꼭 정당한 이유가 있진 않아.’

타천천은 닫힌 문을 보며 생각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문이 열리자 기대 어린 눈길로 그쪽을 보았다.

이번에 들어온 건 황제 쪽이었다. 가라앉은 표정의 황제.

면사로 얼굴의 반을 가렸지만 충분히 표정을 짐작할 수 있다.

“번갈아 보네.”

타천천은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월요 황제가 창살 근처로 가자 간수가 다시 의자를 가져오려 했다.

그러나 월요 황제는 손을 들어 의자를 가져오지 못하게 했다.

“곧 나갈 거다.”

간수가 물러서자 월요는 뒷짐을 지고 타천천을 보았다.

장공주를 고쳐주면 그를 사면해 주겠다는 제안은 월요 입장으로서는 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사하비단에 대한 조사는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곧 정파를 움직여 그들을 몰아낼 것이다.

거기에서 수장인 타천천을 빼주겠단 것이니, 절대로 작은 제안이 아니었다.

그러나 타천천은 그걸 거부했다.

승언과 오원요는 타천천이 그의 목숨을 요구했다며 몹시 분개했지만, 월요 역시 타천천이 정말로 자신의 목숨을 달라고 하는 건 아니라 여겼다.

“화는 좀 풀렸나.”

타천천이 그의 목숨을 거론한 건 천년비가 그를 데리고 온 게 화가 나서 그냥 한 말일 것이다.

월요가 느끼기엔 그랬다.

“화라니요.”

“짐이 천빈과 나타나서 몹시 화나 보이던데.”

“!”

예상대로 타천천은 월요가 천빈을 거론하자 아주 조금 반응을 보였다.

태연하게 미소 짓던 얼굴이 조금 흔들린 것이다.

월요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천년비는 타천천이 왜 자신을 구한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아닌가. 타천천이 천년비를 사모하는 것.

월요는 타천천이 아까의 평온해 보이는 미소로 돌아가자 다시 입을 열었다.

“화가 좀 가라앉은 것 같으니 다시 묻지. 네가 장공주를 치료한다면, 네가 한 일을 모두 덮어줄 것이다. 아예 없던 일로 해주지. 어떤가.”

타천천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천빈 마마를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장공주 전하를 말끔하게 고쳐드리겠습니다.”

“헛소리.”

월요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천빈도 누이도 모두 소중한 존재였다. 한쪽을 구하기 위해 한쪽을 달라니.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천빈 마마를 모셔간다고 제가 천빈 마마를 감히 가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분이 원치 않으시면 전 그분 곁에 갈 수도 없으니까요. 저는 천빈 마마를 후궁에서 풀어달라 요구하는 겁니다.”

“!”

“천빈 마마를 풀어주지 않으시면 장공주 전하는 괴물이 되어 결국 돌아가실 겁니다. 게다가 전과 달리, 이번에는 명예까지 망가지겠지요. 하지만 천빈 마마를 풀어주신다고 해서 천빈 마마가 돌아가시진 않습니다. 명예가 잘못되지도 않고요.”

타천천이 그럴듯하게 속삭이는 말에 월요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그래도 월요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타천천이 웃으면서 미묘한 말을 뱉었다.

“폐하께선 저번에도 이번에도 공주님을 지키지 못하시는군요.”

“!”

* * *

“내 부하들이 아직도 수사청에 잡혀 있다고?”

천빈과 황제가 타천천을 찾아 몇 번 오가는 동안, 황후는 자신의 처소에서 초조하게 그녀의 심복 부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명을 쓰고 체포된 게 아닌 부하들은 시간이 지나도 나오기는커녕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어디에 나갔다 들어오신 후로 수사청엔 전혀 가지 않으셨답니다.”

“기몽 장군은?”

“계속 수사청에서 일하고 있다 합니다, 마마.”

황후는 쓰러지듯 긴 의자에 앉았다.

어의는 그녀에게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 탓일까. 목덜미부터 뒤통수 부근이 강하게 욱신거려왔다.

* * *

두통을 앓기는 월요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타천천을 가두어 둔 데서 벗어나 자신의 처소로 돌아오자, 오원요는 그의 무거운 겉옷을 받아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차라리 타천천 그자의 거래를 받아들이시는 게 어떨까요?”

월요가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자 오원요는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말을 이었다.

“절대로 천빈 마마를 포기하잔 뜻이 아니옵니다, 폐하. 천빈 마마는 강하지 않으십니까. 게다가 그자가 원하는 것도 천빈 마마를 죽여 달라거나 해쳐 달란 게 아니니까요. 타천천의 거래를 받아들이는 척해서 우선 장공주님을 구한 뒤, 천빈 마마를 다시 궁으로 들이시면 됩니다. 말을 잘한다면 천빈 마마께서도 도와주실지도 모릅니다.”

승언은 황제와 오원요를 번갈아 보았다.

오원요의 말도 일견 그럴듯했다. 하지만 승언은 오원요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주저하다가 오원요와 반대 의견을 냈다.

“폐하. 천빈 마마께서 먼저 제안하신다면 모를까, 그 일은 절대로 폐하께서 받아들여선 안 될 일입니다. 어쨌든 장공주님을 위해 천빈 마마를 포기하겠단 게 아닙니까. 천빈 마마께 몹시 불쾌할 일입니다. 게다가 그 섬뜩한 자가 천빈 마마가 궁전에서 나가게 되면 무슨 해코지를 하려 들지 모르지 않습니까.”

* * *

그리고 모두가 각자의 생각에 잠기게 된 늦은 저녁 시간.

여전히 등 뒤에 손이 묶인 채 여유롭게 감옥에 앉아 있던 타천천의 입가에 마침내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네가 언제 오나 기다렸지. 용화노.”

이윽고 그의 앞에 복면을 써서 얼굴을 가린 커다란 이가 나타났다.

하지만 타천천은 그를 용화노라 확신하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아니, 고궐이라 해야 하나?”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이 찌푸려졌다.

“내가 올 거란 걸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안 게 아냐. 자네가 오길 바라고 잡혀 온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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