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반격을 기다리는 천년비
“천빈이 온수연에게?”
“네.”
“온수연이 보낸 서신을 보여주시오.”
황후가 눈짓하자 태감이 서랍 안에서 비단으로 싼 서신을 꺼내 바쳤다.
월요는 서신을 받아 중앙에 묶인 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비단이 펼쳐지며 안에 꾹꾹 눌러쓴 글씨가 나타났다.
“…….”
내용은 황후가 말한 대로였다. 천빈이 자신에게 용서를 빌라 요구했단 내용.
그대로 따라주면 벌을 거둘 수 있을지, 혹시 모욕만 당하고 가문에 피해를 끼치는 건 아닐지 황후에게 조언을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충분히 쓸 법한.
“서신을 가져가도 되겠소?”
“예.”
월요는 서신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 오원요에게 건네며 지시했다.
“기몽에게 이걸 주고 온수연의 필적이 맞나 확인하게 해라.”
“예, 폐하.”
다음날 오후.
기몽은 월요를 찾아와 온수연의 서신을 다시 바치며 보고했다.
“온 소저의 그간 필적과 흡사합니다. 화가 나서 힘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필적이 다를 정도는 아닙니다.”
월요는 눈살을 찌푸렸다.
서신을 받을 때 상황을 들었던 기몽은 황제의 안색을 살피다 조심스레 물었다.
“천빈 마마께서 온 소저를 부르셨다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
월요의 단답에 기몽은 조심스럽게 수긍했다.
“저도 천빈 마마께서 온 소저를 부른 건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기몽이 나간 뒤에도 월요는 생각에 잠겨 홀로 서재에 머물렀다.
“온수연에게 붙여둔 그림자는 죽기 전까지 천빈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온수연은 며칠 전에 황후에게 서신을 보냈다고 했지. 그땐 그림자가 살아 있을 때이니, 천빈이 온수연에게 접근했다면 그림자가 이미 보고했을 거다.”
오원요는 황제의 빈 잔에 차를 따라주며 황제가 중얼거리는 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월요는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등받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온수연은 누구를 만난 적도 없어. 하지만 서신을 받은 적은 있지…….”
오원요도 그 일은 알았다.
며칠 전, 온수연에게 붙인 사람이 보고하기를, 온수연이 서신을 받았는데 뒷간에서 그걸 읽고 처리까지 하고 온 터라 내용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엔 그저 사적인 내용이라 여겼는데.
“폐하께선 그 서신이 천빈이 쓴 거라 여기십니까?”
“아니. 천빈이 쓴 서신이라면 지금 황후가 가지고 있겠지. 아니면 온수연이 보관했을 거다. 하지만 온수연은 제 손으로 그걸 직접 없앴어.”
월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온수연에게 서신을 보낸 이가 범인일 확률이 높다. 비연궁 주위엔 호위가 많아. 자발적으로 온 게 아니라면 반드시 눈에 띄지. 서신을 보낸 자가 온수연을 근처로 오게 유도한 다음 죽여서 비연궁에 둔 거다.”
월요는 미간을 찌푸렸다. 상황은 짐작이 갔다. 문제는 범인이 짐작이 가지 않는단 점이었다.
“온씨 가문에서 저지른 짓은 아닐까요?”
승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평생을 눈총을 받으며 살아야 하니, 이런 식으로…….”
“그것도 가능하지.”
하지만 그 의심은 하루를 채 가지 못했다. 온수연의 모친이 자결한 것이다.
-천빈이 황제 폐하의 총애를 믿고 황후 마마를 핍박해 내 딸을 살해했다.
온수연의 모친은 이런 서신을 쓰고 목을 매 자결했다.
* * *
연달아 온씨 가문의 두 사람이 죽자, 천빈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다.
비연궁에서 온수연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천빈을 가엾게 여기던 이들은, 온수연의 모친까지 자진하자 천빈을 향해 의심스러운 시선을 슬며시 던졌다.
“그럼 천빈께서 온씨 소저를 잡아다 죽이기라도 했단 말이오? 그런 거라면 온씨 소저 시체를 왜 비연궁에 그대로 두셨겠소?”
“꼭 손으로 직접 죽이는 것만 죽이는 겁니까? 온 소저는 천빈 마마를 다루에서 본 것 같단 말을 한마디 했다가 큰 벌을 받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괴로워 자결한 걸지도 모르지요.”
“누가 자결을 제 심장을 뽑아서 하는데요?”
“말 잘했습니다. 그럼 살해당했을 텐데, 왜 시체가 천빈 외엔 아무도 지내지 않는 비연궁에서 발견됐답니까?”
대신들은 천빈이 끔찍한 시체를 처리하게 된 피해자이냐, 온수연이 죽게 몰아간 범인이냐를 두고서 자기들끼리 내내 싸워댔다.
보다 못한 월요는 천소여의 부친인 천 총서서에게 눈짓했다.
너도 나서라.
세력이 강한 외척일수록 경계하는 황제로서는 평소답지 않은 일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 있던 천 총서서는 황제가 나서도 좋다 허락하자, 앞으로 대여섯 걸음 나서며 언성을 높였다.
“천빈 마마께선 폐하의 비호 아래 늘 방에 틀어박혀 지내시는데 어떻게 온수연이 죽게 몰아가고, 죽인단 말이오! 내 눈엔 온수연이 제 발로 걸어와 거기서 자결한 것 같소. 함부로 폐하의 아기씨를 모욕한 죄를 하나도 뉘우치지 못하고 말이오!”
“지금 그, 그걸 말이라 하시오?!”
온수연의 부친이 목에 핏대가 서서 외쳤으나 천 총서서는 당당하게 코웃음 쳤다.
“30년간 벌을 받으며 살려니 막막해서 죽음으로 천빈에게 복수한 걸지도 모르지!”
“저 작자가!”
온수연의 부친이 천 총서서에게 뛰어들려는 걸 주위 대신들이 가까스로 잡았다.
그러나 내내 억지로 입을 다물고 있던 천 총서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혹시 황후 마마의 상궁이 장공주 전하를 해한 일로 온씨 가문이 위험해지자 일부러 온수연을 방패로 내세워서 화살을 돌린 건 아니오?”
“저자가 지금 뚫린 입이라고!”
분노한 온수연의 부친이 주위 대신을 뿌리치고 천 총서서에게 달려들어 수염을 잡아챘다.
지지 않고 천 총서서가 온수연 부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서 몸싸움이 벌어지자, 대신들은 둘을 말리느라 덩달아 뛰어들어야 했다.
하지만 천빈의 부친이 천 총서서가 나서면서, 다들 의심은 하면서도 차마 내뱉지 못했던 가능성 역시 제대로 표면에 드러났다.
* * *
그 이야기를 들은 황후는 모욕감에 입술을 물어뜯었다.
“정말로 끔찍한 가문이고 끔찍한 부녀지간이구나. 어떻게 감히 그런 식으로……!”
“고정하세요, 마마. 탕 궁의께서 최대한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 했습니다.”
“지금 안정이 되겠느냐? 우리 가문이 그 애를 죽인 거라니!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마마…….”
황후가 다시 비틀거리자, 궁녀는 또 황후가 쓰러질까 무서워 눈물을 글썽였다.
황후는 가까스로 호흡을 고르고서 침상에 몸을 기대며 지시했다.
“천빈 근처에 사람을 붙여라. 천빈이 어딜 가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또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전부 다 알아내. 처음은 장공주, 그다음은 수연이. 또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
* * *
“마마, 괜찮으세요?”
내가 멍하게 창밖을 보고 있자니 원웅이 과일을 앞에 내려두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응.”
하지만 나는 정말로 괜찮았기에 괜찮다고 대답했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신경 쓰지 않는다.
말로만 떠들어대는 자들. 궁에선 어쨌든 떡돌이만 안 흔들리면 되는걸.
내가 신경 쓰이는 건…….
“왜 심장일까?”
“네?”
“왜 굳이 심장을 빼서 죽였을까?”
처음엔 온수연이 혹시 용고를 먹고 죽었나 싶었다. 하지만 부검해보니 독은 안 나왔다고 했어.
그렇다면 정말로 굳이 굳이 심장을 뺀 건데. 왜? 경험자 입장에서 그건 정말이지 귀찮은 방식이었다.
원웅은 과일을 깎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께선 정말로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시네요. 저는 시체가 있던 곳 주위만 걸어가도 심장이 섬뜩해요, 마마.”
“그런 식으로 따지면 사람이 안 죽은 곳은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아, 원웅아.”
“으악, 마마! 그런 얘기 무서워서 싫어요!”
무서워하는 원웅을 좀 더 놀리려고 신이 나서 부채를 뺏어들 때였다.
“천빈 마마. 장공주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귀자가 들어와서 장공주의 방문을 알려주었다.
웬일이지? 전에 황후 궁녀가 팔을 뺀 이후 두문불출한다더니?
의아하지만 반가워서 얼른 들어오라고 하자, 곧 시원한 옷차림의 장공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천빈.”
장공주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부르더니, 다가와서 바로 포옹해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바로 왔네. 좀 늦게 알았어. 많이 놀랐겠지?”
“온수연 이야기를 듣고 와주신 건가요?”
장공주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내 팔을 잡고 걸어갔다.
혹시 팔이 또 떨어질까 봐 놀라서 유심히 살폈지만, 다행히 팔이 떨어질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맞은편에 앉아서 잘 보니, 전에 보았을 때보다 안색이 많이 밝아진 것 같기도 하고. 푹 쉬어서 그런가?
“공주 전하께선 요즘 몸은 좀 괜찮으세요?”
“나는 많이 좋아졌네. 이 와중에 나 혼자 괜찮아져서…… 그것도 좀 신경 쓰이지만.”
장공주는 그렇게 말하더니, 궁인들이 물러간 틈을 타 내게 머리를 가까이 붙이고서 속삭였다.
“당겨봤는데 지금은 팔도 빠지지 않는다네.”
“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계속 신경 쓰여서……?”
“왜 그러는가?”
고궐. 고궐이야!
급격히 몸이 나빠진 장공주.
무림 고수 같은 이가 지나가고 그 자리에 떨어져 있던 피. 며칠 뒤 죽은 온수연. 갑자기 몸이 괜찮아진 장공주.
고궐이 장공주를 고치기 위해 무언가 수를 쓴 거야!
그놈은 나랑 밖에서 부딪친 적도 있으니, 날 노렸을 만도 하고!
* * *
떡돌이 그림자들은 무능한가 봐. 대체 수가 몇인데 아직도 고궐을 발견하지 못한 거야?
물론 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고궐 그놈은 숨어다니는 데 도가 텄나 봐.
하지만 난 무능하지 않다. 나는 한 명이니까. 그림자들은 숫자가 많잖아?
고궐이 범인이라고 의심한 지 일주일. 이번엔 비연궁 다른 장소에서 태감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번에도 심장이 없는 시체였다.
그 때문에 요즘 궁궐 궁인들은 우리 비연궁 궁인들만 보면 꺼림칙하다고 피해 다닌단다.
이번 시체는 담벼락 바로 아래 떨어져 있어서 누가 봐도 그냥 담벼락 뒤에서 던진 건데도.
어쨌든 이 때문에 떡돌이는 내게 호위들을 붙여주고서 늘 그들과 함께 다니게 했다.
그래서 내 주위에는 내 원래 궁인들이 한 겹 있고, 떡돌이가 붙여준 호위들이 그 주위로 한 겹 있고, 좀 거리를 둔 곳에 황후가 붙인 감시자들이 한 겹 있다.
“좀 놀라게 해서 거리를 두게 할까요? 폐하의 호위야 그렇다 쳐도. 황후 마마께서 붙인 감시자들은 마마를 헐뜯기 위해 모여 있는 걸 텐데요.”
귀자는 이게 싫은지 내게 물었지만 나는 놔두라고 했다.
“알아. 하지만 그냥 둬. 상관없어.”
“의외로 마음이 좋으십니다, 마마. 왜 저자들을 봐주시는 겁니까?”
“고궐이 습격하면 방패로 쓰려고.”
“……방금 한 말을 취소해도 될까요?”
귀자는 자기가 한 말을 바로 취소해 버렸지만, 나는 말을 막 취소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정말 방패로 쓰려는 건 아니지만, 내가 황후가 붙인 사람들을 굳이 달고 다니는 데는 큰 뜻이 있긴 하다.
음. 나는 황후 사람들이 직접 고궐을 발견하게 만들 생각이다.
그러니까, 날 잡으려고 뛰어다녔는데 막판에 발견한 건 엉뚱한 사람이란 상황 말이다.
그러면 고궐을 발견하더라도 공치사를 하진 못할 거야.
게다가 그 과정에서 좀 다치고 죽겠지. 고궐은 강하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내 적들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