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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02화 (202/283)

##  202화. 왜 나만 비밀을 털어놓는 것 같지?

황후는 나를 새파래진 안색으로 쳐다보았다.

“용서해주실 건가요?”

그러다가 내가 웃으면서 청하자, 그녀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해주지.”

“고맙습니다, 황후 마마. 마음이 넓으시네요.”

“그래. 이젠 네가 온수연을 용서할 차례인가.”

“전 마음이 안 넓어요, 황후 마마.”

하지만 황후의 무뚝뚝한 얼굴은 내가 온수연 용서하기를 거부하자 대번에 변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 얼굴에 똥 묻은 행주를 집어 던지기라도 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별로 모욕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오신 김에 같이 차 마시고 가실래요?”

너무 대놓고 거절했나 싶어서, 결국 이번에는 내가 몸을 숙이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황후랑 싸워서 좋을 건 없으니까.

“눈치가 없구나.”

별로 효과는 없었지만.

“아니에요.”

“그래서 뻔뻔하고.”

에고. 화났나 봐. 황후가 일어선다.

“오늘 일을 기억해두마. 너도 기억해두어라. 그래야 다음에, 네가 용서를 청할 일이 있을 때 양심껏 입을 다물지.”

“전 어떤 기억이 머리에 남을지 미리 구분하지 못해요, 마마. 시간이 지나 봐야 알아요.”

황후는 내가 말을 한마디 할 때마다 싫은가보다.

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나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휙 몸을 돌려 그대로 나가버렸다.

“황후 마마를 배웅합니다.”

인사도 안 받아줘…….

게다가 밖에 나가서도 그런 표정이었나. 황후가 돌아가자, 원웅과 부성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와 물었다.

“마마, 괜찮으세요?”

“황후 마마께서 굉장히 무서운 얼굴로 나가셨어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요?”

무슨 일은 없었지. 그냥 대화한 것뿐인걸.

“별로. 근데 내가 싫으신가 봐.”

“그건 당연하고요.”

“왜?”

“집안끼리도 사이가 나쁘고. 오늘 일도 있고. 황후 마마는 혼인한 지 오래도록 아이가 없는데, 마마께선 바로…… 물론 마마도 바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회임도 하셨고. 결국 장손은 마마께서 가지셨고. 같은 편도 아니고. 좋기가 더 힘들지 않을까요?”

“그런가?”

* * *

“마마, 가마에-.”

“되었다.”

황후는 가마에 오르지 않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황후의 측근 상궁인 영영은, 그 기운 없이 걸어가는 황후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다 이를 갈았다.

“대체 천빈 그년이 뭐라 한 거야.”

“쉿. 아직 비연궁 근처입니다.”

태감인 징봉이 놀라서 손가락을 입에 댔지만, 영영은 화를 누르지 못하고 계속 씩씩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황후는 정처 없이 걸어가다가 근처에 있는 호수에 가서야 멈추어 섰다.

겨울이라면 어두울 시각이지만 여름이라 날이 밝았다.

황후는 호숫가에 가만히 서 있다가 영영을 보며 지시했다.

“영영. 다들 거리를 두고 물러나라.”

영영이 불안해서 호숫물을 보자, 황후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뛰어들지 않아. 조용히 있고 싶을 뿐이니 물러나거라.”

황후의 사람들이 결국 명령을 받아 멀찍이 물러나 서자, 황후는 그제야 힘을 뺀 표정으로 새파란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황제의 사랑을 받는 황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당히 후궁들을 잘 다스리면서 무난하게 지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치게 총애받는 후궁도 지나치게 냉대받는 후궁도 없이 그렇게 잘.

그러나 갑작스럽게 툭 튀어나온 천빈의 존재에 모든 게 혼란에 빠져 버렸다.

황제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온 국민이 정실 아내인 그녀가 황제의 마음을 한 조각도 받지 못한 걸 아는 상황은 그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그런데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가까이에서 무언가 꺾는 소리가 났다.

황후가 그쪽을 쳐다보니, 황제의 복장에 얼굴에 까만 면사를 쓴 이가 서 있었다.

황후는 그 눈빛을 보자마자 연금이란 걸 알아차렸다.

황제의 대역으로 선정된 인물이니만큼 연금은 눈이나 입매가 황제와 흡사했으나, 확연히 다른 게 하나 있다면 바로 그 눈빛이었다.

그녀를 볼 때 황제의 눈빛과 연금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서, 황후는 연금과 황제를 정확하게 구분해냈다.

황후가 몸을 돌려 그를 보자, 연금은 주저하다 천천히 다가오더니 손에 든 꽃을 건넸다. 수레국화였다.

황후는 얼결에 그걸 받아들었다.

“무엇이냐.”

“슬퍼하시는 듯해…….”

대답하는 연금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황후는 그가 먼발치에서 자신을 보고 왔단 걸 알아차리고서 입술을 꾹 닫았다.

그녀는 연금이 건넨 수레국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연금은 그 내리깐 눈꺼풀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아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위로가 황후를 더욱 자존심 상하게 만들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비참한 모습을 보였다는 게 고통스러웠다.

이를 알아차린 연금은 눈치를 보다가 물러서려 했지만, 그보다 앞서 황후가 수레국화를 호수에 툭 던져버렸다.

“!”

보라색 수레국화가 호수 물 위에 둥둥 떠서 흘러가자, 자신이 황후를 불쾌하게 만들었단 걸 알아차린 연금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꿇지 마라.”

그러나 무릎을 다 굽히기 전, 황후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연금은 주춤 멈추고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황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남들이 볼지 모른다. 그 모습을 하고서 비굴하게 굴지 마라.”

“마마.”

그 시선 그대로 황후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가버렸다.

황후가 자신이 두고 온 궁인들 쪽으로 가자, 연금은 그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황후가 가마에 올라 떠나버리자, 연금은 호수에 아직 떠 있는 수레국화를 바라보았다.

수레국화는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뒤로 밀려나서, 처음보다 거리가 더 멀어져 있었다.

연금은 그쪽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그래도 연금은 물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며 손을 최대한 뻗어서, 어떻게든 그걸 건지려 해보았다.

그러다 손끝에 닿을락 말락 하는 순간.

휘청이면서 물에 빠지려는 그를, 누군가 황급히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천년비를 보러 가다가 놀라 뛰어온 비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비원은 놀랐으나, 방금 전 물에 빠지려 했으면서도 연금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원은 자기가 더 놀라 숨을 몰아쉬다가, 연금이 손에 쥔 물에 젖은 꽃과 손등의 상처를 발견했다.

‘저 꽃을 건지려다가 다치신 건가?’

아무래도 호수 안쪽에서 뾰족하게 올라와서 수면 위로는 잘 보이지 않는 바위에 긁힌 듯했다.

“놀랐습니다. 홀로 이런 위험한 행동을 하시다니요.”

“괜찮다. 잠시 마음이 어지러웠을 뿐.”

비원은 황제에게 손이 다쳤단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망설였으나, 그사이 연금은 바로 돌아서서 가버렸다.

하지만 수레국화는 놓지 않고 쥐고 있다.

비원은 그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 * *

“뭐냐. 표정이 왜 그러냐.”

또다시 거울을 이용해서 날 불러낸 비원은 자기가 불러놓고 자기가 몹시 귀찮단 표정이었다.

덩달아 뚱하게 묻자, 그는 손을 저었다.

“아니, 오다가 폐하를 뵈었는데 표정이 어두워서 말입니다.”

“아, 그래?”

“싸웠습니까?”

“나야 모르지.”

“예?”

그 삐돌이가 어디서 삐졌다가 어디서 풀리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삐지면 쫓아낼 뿐. 그런데 떡돌이가 이 근처에 왔던가?

“그보다 난 무슨 일로 부른 건데?”

“단주님께서 전하라셨습니다.”

“타천천이?”

비원이 쪽지를 내밀어서, 나는 그걸 받아 펼쳐보았다.

-죽은 지 오래된 몸으로 만든 강시는 쉽게 바스러짐. 일반 강시는 이럼. 장공주의 팔이 쉽게 빠진 것도 비슷한 부작용 같음. 만약 같은 종류의 부작용이라면, 전에는 당겨서 빠졌지만, 어쩌면 가만히 있어도 무너질지도 모름.

장공주 몸이 무너져내릴지도 모른다고?

* * *

방에 돌아왔는데도 타천천이 쓴 편지 때문에 영 심란했다.

진짜인가? 그래서 고궐이 장공주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무르는 건가?

아니, 그런데 고궐은 장공주를 배신한 나쁜 놈이잖아?

아니, 나쁜 놈이라도 일부러 곁에 머무를 수도 있긴 해.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장공주 몸이 멀쩡해야…….

아니지, 혼령술과 강시술을 더 많이 아는 타천천도 아직 그 분야에 미진하다는데.

타천천한테 방법을 훔쳐 가서 장공주를 부활시킨 고궐이 여기까지 생각을 하긴 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밖에서 “황제 폐하 납시오!” 하는 소리 들려온다.

얼른 벌떡 일어서자, 떡돌이가 곧장 안으로 들어오다가 물었다.

“응? 표정이 왜 그러하냐?”

“내 표정이 왜?”

“어두운데? 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황후가 다녀갔다면서. 그 때문이냐?”

“아니. 황후 마마가 오히려 기분 상해서 나갔어.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그런데 왜 이러지?”

“그러는 폐하는 이젠 괜찮아?”

내 궁녀들 말로는 떡돌이가 어전 회의 때 굉장히 무섭게 화를 냈다던데. 고함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릴 지경이었다고.

게다가 비원도 떡돌이 표정이 안 좋다 했고.

“화났지. 감히 그런 헛된 말을 내뱉다니. 하지만 차라리 그 소저가 생각 없이 말을 뱉어 다행이다 싶다.”

“왜?”

떡돌이는 겉옷을 벗어 옆에 두고 침상에 앉더니 내 배를 쓸며 말했다.

“그 소저가 영민하게 굴었으면 네가 태안루에 다니다가 현장에서 발각됐을지도 모르니까.”

“그런가?”

“그래.”

“그럼 앞으론 변복하고 얼굴도 가리고 다녀야겠어.”

“안 다닐 생각은?”

“없는데!”

떡돌이 표정이 어두워진다.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드나 보다.

나는 그가 표정이 어두워지자마자, 내 배를 내보이며 계란이에게 말을 거는 척해 보였다.

“응, 계란아. 계란이는 아빠가 웃는 게 좋다고? 엄마도 그래.”

원웅이 알려준 방법인데, 효과가 좋았다. 떡돌이가 멍하게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으니까.

“점점 머리를 잘 쓴다니까.”

그러다 궁녀들이 들어와서 탁자에 저녁 식사를 차려놓자, 떡돌이는 손을 저어서 시중을 들려고 대기 중인 궁녀와 태감들을 물렸다.

그러고는 궁인들이 모두 나가자, 자기가 손수 조기구이 살을 발라서 내 그릇에 놓아주었다.

내가 받아서 먹자, 이번에는 계란을 통째로 양념해서 구운 걸 반 잘라서 입에 넣어주었고, 내가 그것도 잘 먹자 떡돌이는 또 생선 살을 발라주었다.

하지만 내가 음식을 받아먹으면서도 연신 그의 눈치를 살피자, 떡돌이는 대번에 눈치채고서 물었다.

“왜 그러느냐?”

“태안루 말이야.”

태안루 소리가 나오자 떡돌이는 젓가락질을 멈추더니, 나중에는 아예 내려놓으면서 놀렸다.

“이제 말할 생각이 드나 보구나. 조기구이에 넘어오다니.”

“뭐래. 조기 때문이 아니거든요?”

타천천이 서신으로 보낸 장공주 몸 때문이지.

내가 말을 멈추자, 떡돌이가 자기는 절대로 입을 안 열겠다고 손으로 제 입을 가리더니, 계속 말해보라 손짓했다.

주저하다가 나는 말을 계속했다.

“태안루에는 내 영혼을 다른 데로 옮겨준 사람이 있어서 보러 간 거야.”

“거기까진 짐작했다.”

“그 사람이 타천천이야.”

“…….”

“안 놀라네?”

“‘천년비’가 사하비단과 접점이 없다가 그쪽에 갔단 말을 들었을 때. 네가 그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

“뭐야? 근데 왜 안 말했어?”

“짐작을 한 거지 확신한 건 아니었다.”

그게 그거지. 어쨌든 안 놀라니까 말하긴 쉽네.

“내가 천소여 몸에 들어오는 걸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쨌건 은인이긴 하고. 앞으로 내 몸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까. 뭐라 말하기가 좀 그랬어. 사하비단이 요즘 사고도 많이 친다며.”

슬그머니 변명을 하며 살피니, 떡돌이는 내 말이 그럴듯하다고 수긍하고 있다.

다행이야. 안심하고 있자니, 떡돌이가 다시 젓가락을 들며 물었다.

“한데 그자는 왜 널 도운 거지?”

“몰라, 그 변태.”

내게 생선을 또 발라 주려는 것 같았는데.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눈썹이 위로 쭉 올라가 되물었다.

“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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