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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01화 (201/283)

##  201화. 너도 못하잖아

“폐하, 영빈 마마의 생일 축하 연회 때 한 소저가 천빈 마마의 앞에서, 마마의 복중 아기씨를 두고 무엄한 말을 하였는바, 이 일이 후궁들 처소를 넘어 소신의 귀까지 들어왔습니다.”

회의 도중, 갑자기 앞으로 나선 운월이 또박또박 뱉는 말에 대신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니, 저자가 미쳤나?

이런 이야기는 귀로 듣고도 절대로 뻐끔하지 말아야 할 종류의 소문이었다.

소문을 말한 사람도 전한 사람도 고한 사람도 어떻게 엮어 들어갈지 모르는 소문.

그런데 소문을 듣자마자 어전에서 대번에 고해바치다니. 머리 굵은 대신들이 당황할 만도 했다.

“등룡. 등룡.”

그의 친우는 슬그머니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렸다. 그러나 운월은 거침없이 말을 퍼부었다.

“폐하, 그 무엄한 말을 뱉은 소저는 내명부 사람이 아니며,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엔 외명부에서 온 손님들도 많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외부에서도 전했을 테니, 모진 소문이 백성들의 귀에까지 흘러갈까, 신은 그게 염려됩니다.”

어전 안이 싸늘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바람이 불어 잎이 떨어진다면, 그 소리조차 들릴 것이다.

다들 돌처럼 굳은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웬 신입 하나가 갑자기 폭탄을 들고 와서 어전 회의실에 집어 던진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잠깐의 정적 후.

“뭐라 하였느냐.”

황제가 서늘한 목소리로 물으며 앞의 탁자를 ‘쾅’ 소리가 나게 주먹으로 내리쳤다.

대신들은 더욱 조용해졌다.

궁궐 안의 소문은 몹시 빠르다. 그들 모두 등룡 운월이 뱉은 소문에 대해 들었다.

누구는 혀를 찼고, 누구는 이용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고, 누구는 고개를 저었으나, 어쨌든 증좌조차 없는 한 소저의 주장일 뿐이었다.

진위여부도 확실치 않은 주장.

아직 그들은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제대로 조사해보지도 못했다.

조사하려는 움직임이 있단 말은 들었지만.

그런데 뭐 조사도 대처 방법도 없는 상황에서 저 주둥이 가벼운 신입이 다짜고짜 저런 소문을 고해바치다니!

“폐하, 그런 소문이야 온갖 기이한 것들이 많고 사람들도 헛된 말을 장난삼아 내뱉지요. 운 등룡이 아직 나이가 어려 폐하 앞에서 괜한 소리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소저가 그런 말을 했단 것부터가 헛소문일 확률이 높지요.”

온씨 가문 사람들은 조금 정신이 들자마자 재빨리 소문과 함께 온수연에 대한 이야기도 전부 거짓으로 넘겨버렸다.

소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진위여부를 알기도 전에 온수연이 끌려 나오는 건 위험했다.

중립파 역시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그런 소문이 도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단 생각에 온씨 가문을 조금 두둔했다.

“운 등룡이 나이가 젊어 폐하께 이런저런 걸 다 고해바치고 싶은가 봅니다.”

“운 등룡, 폐하 앞에서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네. 저잣거리 소문을 하나하나 다 고해바치면 폐하의 눈과 귀를 어지럽힐 수 있단 걸 왜 모르는가.”

그래도 운월이 눈을 빳빳하게 뜨고서 멀뚱히 황제만 보고 있자, 대신들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황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면사 위로 드러난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서늘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황제가 소리쳤다.

“그런 소문이 많고, 사람들이 장난삼아 떠들어? 또 그런 이야기가 들린 적이 있단 말이냐? 짐의 빈을 어찌 알기에 이런저런 소문을 떠들어대!”

‘나 오늘 제일 열심히 일했다’라고 말하면 ‘너 빼고 다 놀았단 말이냐, 너만 일했냐, 다른 사람은 놀았냐’라고 꼬투리를 잡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황제의 말이 꼭 그러했다.

대신들은 황제의 호통에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폐하, 소신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그런 소문이 돈 건 이번이 처음이옵니다, 폐하. 그저 그만큼 허무맹랑한 소문이 많단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럼 이런 소문이 돈 게 처음인데 짐에게 얘기하지 않으려 했단 뜻인가. 천빈과 짐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게, 아니, 그게 아니라…….”

“공들이 보기엔 짐의 아이에 대한 헛소문이 장난삼아 떠들어도 되는 소문이란 뜻인가!”

“망극하옵니다, 폐하!”

대신들은 황제가 복식호흡으로 외치자 황급히 절을 했다.

“제대로 소문에 대해 말하라, 등룡. 감히 그런 헛소문을 시작한 이가 누구이냐.”

“온씨 가문의 소저인 수연이라 하옵니다.”

운월이 이름까지 고해바치자 온씨 가문 대신들의 표정이 붉그락푸르락 변했다.

“헛소문일 것입니다, 폐하.”

“그런 일이 있었다면 왜 다들 이리 조용하겠습니까. 천빈 마마께서도 진즉에 화를 내고 온 소저를 벌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황제는 더욱 세게 탁자를 두드리며 외쳤다.

“영빈의 생일 축하 선물을 전하러 간 짐의 태감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짐의 태감이! 이래도 헛소문이라 우길 셈이냐!”

황제의 호통에 황후파 대신들의 안색이 빠르게 파래졌다. 황제의 태감이 직접 들은 거라고?

“짐은 그 이야기를 듣고 몹시 화가 났는데, 짐에게 그런 헛된 소리를 전해주는 이는 운월뿐이로구나. 나머지는 짐의 귀가 먹었다 여기는가.”

다시 어전 안이 조용해졌다.

“자진케 하라!”

그러다 황제가 차갑게 외치자, 대신들의 얼굴에선 더욱 핏기가 사라졌다.

좌칙승상은 조카가 말 좀 함부로 했다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기겁해서 외쳤다.

“폐하, 그 아이는 아직 철부지 아이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그게 옳은 말인지 제대로 판단조차 못 할 정도입니다. 아이가 경솔하게 말했다고 하나, 그 일로 이미 황후 마마께서 크게 벌을-.”

“그러니까 공은, 황후가 알고 크게 벌 내린 일을 두고. 그런 일은 없었다 한 건가.”

“!”

황제는 말꼬리를 잡는 게 선수였다.

좌칙승상이 말을 잇지 못하자, 이를 지켜보던 우칙승상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폐하. 비록 그 소저가 말을 함부로 하였으나, 아직 어린 소저이고 그 자리에서 황후 마마께서 직접 나서 매듭지으신 일이니, 부디 황후 마마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기회를 주시길 청하옵니다.”

우칙승상의 말에 좌칙승상은 이를 갈았다.

얼핏 들으면 자기편이지만, 교묘하게 일의 책임을 온수연에서 황후로 돌리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우칙승상이 조카를 위해 나섰다지만 그래도 그의 친딸은 황후였고 온수연은 조카딸이었다.

좌칙승상의 두둔이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한 사람이 책임져야지요’라고 나서면 가문 전체가 우스갯거리가 될 처지라, 그는 주먹을 꽉 쥐고 말을 삼켰다.

월요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면사 아래로 차갑게 웃었다.

원래 온수연을 이 일로 자진시킬 생각까진 없었다.

그들을 한 번 흔들어보기 위해 한 말일 뿐.

“좋다. 황후의 체면을 보아 자진하진 않아도 좋다.”

월요의 누그러진 말투에 온씨 가문 사람들이 잠시 안도하는 찰나.

“하나.”

덧붙여진 말에 그들이 다시 긴장했다.

“그 철없이 던진 말에 짐의 아이와 천빈은 불경한 소문에 휩싸이고, 그 소문으로 큰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황후가 빠르게 일을 마무리해 헛소문이란 걸 그 자리에서 확인하고 벌하지 않았다면 필시 그리되었겠지.”

좌칙승상은 혀를 깨물었다. 또 이렇다. 이번엔 황제가 황후를 가지고 방패막이로 쓰고 있다.

황후가 나서서 그 소문이 헛소문인 걸 밝히기라도 한 것처럼 몰아가지 않는가.

누군가 이 일을 또 거론한다면 황후가 온수연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거라 몰아갈 셈이 분명했다.

“그 아이는 입이 가볍고 헛소문 만들기를 좋아하는 듯하니, 앞으로 30년간 입을 열지 말라 하라.”

입을 다물란 명령은 온수연이 받았으나 대신들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 사이, 가장 먼저 폭탄을 던진 운월은 대신들 틈에 조용히 숨어 몸을 수그렸다.

* * *

“뭐? 그게 벌이야?”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 부성이 온수연이 큰 처벌을 받게 되었단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말을 하는 내내 부성은 아주 기쁜 얼굴이었다.

내 질문에 오히려 원웅이 “그럼요!” 하고 외쳤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사람들 없는 데서 말하면 되잖아.”

그러나 부성은 바로 부정했다.

“그렇게 쉽지 않아요, 마마. 당연히 감시할 사람을 옆에 붙이지요.”

“그래?”

“네. 옆에 감시하는 사람을 둔 채 입을 계속 닫고 살아야 하는 거라고요. 당연히 혼인도 못 할 테지요.”

“혼인은 왜?”

“옆에 감시하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아하. 이 벌의 핵심은 입을 막는 게 아니라, 옆에 감시자를 붙여두는 거구나.

게다가 온수연은 온씨 가문 사람이니, 자연스럽게 떡돌이의 사람도 그 가문에 같이 따라가서 온갖 걸 보고 들을 수 있겠어.

당연히 온씨 집안사람들은 황제의 귀를 옆에 달고 다니는 온수연을 피하겠지.

온수연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도 그 집안에서 고립되는 것이다.

혼인도 같은 맥락으로 못 하겠지.

온수연과 결혼하면 신방에도 황제의 감시자가 따라 들어와 옆에 있을 건데, 어느 미친 자가 자기 아들을 그런 신부와 혼인시키고 싶어 할까.

친구도 사귀기 어려울 거다. 무슨 말을 하건 감시자가 같이 있는 건데, 누가 그녀에게 말을 걸려 할까.

이거 참. 황실 사람들은 별의별 수로 사람을 괴롭히는 데 도가 텄구나.

“아주 잘 됐어요. 그러게 함부로 그딴 말을 왜 해서는.”

“그러니까요.”

그런데 한창 두 궁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귀자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내게 다급히 알려주었다.

“마마. 황후 마마께서 이리로 오십니다.”

원웅과 부성은 입을 비죽였으나, 황후가 온다는 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 황후에게 인사를 올렸고,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잠시 뒤, 황후가 내 처소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그녀에게 꾸벅 인사했다.

“황후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황후는 어두운 얼굴이었다. 황후도 자기 사촌 이야기를 들었구나.

하긴. 나보다 먼저 들었겠지. 더 정보력이 좋을 테니.

그런데 나는 왜 찾아온 거지?

눈치를 보고 있자니, 황후가 손을 저어 알아서 사람들을 물렸다.

긴히 할 말이 있나 봐.

두 손을 모으고서 가만히 있자, 황후는 앉으라 하더니 자신도 상석으로 가 앉으며 물었다.

“천빈. 온수연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느냐.”

“들었습니다, 마마.”

역시 황후도 온수연에 대해 들었구나. 그런데 온수연 이야기를 듣고 왜 날 찾아왔지?

의아하지만 가만히 있자니, 황후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천빈. 회임했을 땐 마음을 너그럽게 가져야 한다 들었네.”

“그런가요?”

“듣기 싫은 말 한마디 때문에 태교를 망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가요?”

“……폐하께서 굳이 벌을 내리지 않더라도 온수연 그 아이는 이미 폐하의 진노를 산 게 사방에 알려졌으니, 집안에서 입지가 낮아질 거네. 폐하의 미움을 샀으니 격이 맞는 집안의 적자들은 그 아이와 혼인하지 않으려 들겠지. 굳이 이런 벌을 내리지 않더라도 이미 그 아이는 이전처럼 살 수 없어.”

“아아. 그렇군요.”

적당히 응수는 하고 있는데 황후가 내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역시 모르겠다.

일단 반사적으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자니, 황후가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폐하께서는 천빈의 말은 잘 들어주시지. 특히 회임까지 하였으니 더욱. 천빈. 공덕을 쌓는 셈 치고, 폐하께 천빈이 잘 말씀드려 온수연에게 내려진 벌을 거두어 줄 수 없겠느냐?”

“죄송합니다, 황후 마마. 저는 이런 걸 잘 몰라서요. 폐하께서 적절히 처벌하시지 않으셨을까요?”

“폐하께선 이성적인 분이시지만, 천빈을 아끼는 마음이 강하시지. 홧김에 엄한 처벌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그럼 직접 말하던가. 자기는 황후잖아.

떡돌이가 내 말을 잘 들어주긴. 걔는 자기 말만 잘 듣는다고.

“……싫은 모양이군.”

“사람은 누구나 말실수를 할 수 있는 게 맞아요, 황후 마마. 하지만 황후 마마, 제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실수를 황후 마마께 한다면, 황후 마마께선 절 너그럽게 용서해주실 건가요? 아무 벌도 안 주시고요?”

“당연하지.”

“구라.”

“!”

“이렇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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