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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99화 (199/283)

##  199화. 대리 말싸움

저 표정은 나도 잘 안다.

누가 ‘저 자식 개자식이래’라고 말하면 놀라서 ‘저 사람이 개자식이라고?’ 할 때 나오는 표정이다.

즉, 태안루에서 날 노려보던 저 여자는 자기 옆자리에 앉은 여자에게 내 욕을 한 거다.

그걸 보자 기분이 나빠 인상을 찌푸리는데, 갑자기 옆에 앉은 촉비가 내 귀에 손과 입을 가까이 가져가더니 “재밌는 말 들은 것처럼 웃어요.” 하고 말했다.

의아하지만 시키는 대로 “하하하!”하고 웃으면서 옆을 보니, 촉비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노려보던 그 여자 쪽을 부드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여자와 그 옆자리 여자가 흠칫하더니 몹시 기분 나빠하는 게 아닌가.

그러고서는 자기들끼리 또 소곤거리려는데, 촉비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낭랑하게 까르르 웃으면서 “어머, 설마. 그럴 리가요.” 하고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게 아닌가.

평소에는 ‘어머’ 같은 말은 쓰지도 않으면서!

그런데 놀랍게도, 촉비가 그러고 나자 날 노려보던 여자는 더욱 표정이 굳어 있었다.

촉비는 맑게 웃으면서 부채를 들어 한번에 ‘촥’ 펴더니, 유유자적 흔들면서 부채 뒤에서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디서 눈에 힘을 주고 있어, XX XXX들이.”

“!”

촉비…… 욕 잘하는구나. 하긴. 촉비가 명문세가 딸은 맞지만 이래저래 고생 좀 하고 컸다 했지. 강하구나.

멍하게 감탄하다가 나는 다시 태안루에서 본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한데 웬걸? 이번에는 그 여자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게 아닌가.

걸음걸이는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웠지만, 두 눈은 전투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아니, 대체 왜? 전에 태안루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왜 저렇게 날 노려보는 거야?

물어본다고 대답해 줄 리가 없겠지. 물어볼 수도 없지만.

어쨌든 그 사이에 여자는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천빈 마마를 뵙습니다. 소녀는 온씨 가문의 수연이라 합니다.”

황후 가문 사람이구나. 옆에 앉은 온 귀인을 슬쩍 보았다.

사이가 좋진 않은 듯 온 귀인은 팔을 괴고서 온수연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다시 온수연을 보자, 그녀는 즐거워하는 눈으로 나를 한 번 내 배 쪽을 한 번 보더니 물었다.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천빈 마마. 하지만 전에 가까이서 뵌 적이 있는 분이라, 너무 반가운 마음이 들어 오게 되었어요.”

아까 노려볼 때와 달리 친근한 목소리였다.

눈은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여보시게. 목소리보다 눈부터 어떻게 좀 해봐.

“그런가.”

“그때 혼자서 다루를 돌아다니고 계셨지요. 사내들에게 꽃다발도 받고 하면서요. 귀한 집 소저로 보이는 분이 호위나 시비조차 데리고 다니지 않기에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천빈 마마셨군요?”

사내‘들’이라니.

앞에 놓인 구운 파를 씹으면서 쳐다보자 온수연은 재차 웃더니, 주위 사람들에게만 작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 마마. 바깥에 홀로 나와 사내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다가, 배 속의 아기씨가 다른 사내 아기씨라고 오해받으면 안 되잖아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탁상 아래에 있는 온수연의 다리를 걷어찼다.

내공은 싣지 않았지만 정강이를 찼더니 꽤 아픈지, 온수연은 웃다가 바로 비명을 질렀다.

“아!”

무공 익히지 않은 사람은 웬만해서 건드리지 않지만, 배 속 아기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건 참을 수 없다. 저건 위험한 발언이잖아?

온수연은 잠시 다리를 감싸고 끙끙대다가, 통증이 가라앉자 믿을 수 없단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지금 소녀를 때리셨어요?”

“아니.”

덤덤하게 대답하자, 온수연은 화가 나서 조금 언성을 높였다.

“방금 절 때리셨잖아요!”

그러고서 온수연은 옆의 촉비와 온 귀인을 번갈아 보았으나, 두 사람은 각기 팔을 괴고 다른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둘이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자, 온수연은 입술을 깨물더니 확 돌아서서 아까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구운 파를 하나 더 집고 씹으면서 보니, 자리로 돌아간 온수연은 다리를 감싸 쥐고 몇 번이나 끙끙거리다가, 나중에는 아예 절뚝거리며 황후 쪽으로 가고 있었다.

황후 곁으로 가자, 황후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대화 나누길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곧 황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무어라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지만, 얼핏 보니 ‘왜 꼴이 그러냐’라고 묻는 모양이었다.

온수연은 무어라 무어라 마구 떠들어대면서 눈으로 나를 가리켰다.

살짝 눈가를 소매로 닦는 걸 보니 운 것 같기도 하다.

황후가 입 모양으로 ‘천빈?’ 하는 게 느껴졌다. 내가 때렸다고 했나 봐.

황후는 반사적으로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도 반사적으로 웃어주자 황후는 인상을 조금 찡그리더니, 온수연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고서 또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게 효과가 있었나.

잠시 뒤. 황후의 측근 시녀가 내게 다가오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빈 마마. 황후 마마께서 물어보실 게 있다고 잠시 와보시라 하십니다.”

온수연이 과연 뭐라 했을까, 싶어서 나는 알겠다고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내가 일어서기 전. 촉비가 내 팔을 눌러 잡더니, 측근 시녀보다 더욱 배려심 깊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지, 영영? 천빈이 입덧을 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힘들어하고 있어서. 저기까지 가려니 너무 먼데.”

그 말에 영영은 촉비를 한 번, 싹싹 빈 내 앞 접시들을 한 번 보더니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전하지요.”

촉비는 영영이 돌아서 가자마자 자기 접시에서 음식을 덜어 내 앞에 놓았고, 온 귀인도 말없이 자기 접시에서 음식을 덜어 내 접시에 놓았다.

“다들 고마워요. 이거 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맞아요.”

그 배려에 고마워 인사하자, 촉비는 “먹지 마요. 이따 도로 회수해 갈 거예요.” 하고 단호히 말하더니,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서 충고했다.

“황후 마마께서 이쪽으로 오시면 입덧 때문에 움직이기 어렵다고 해요.”

“도로 가져간다고요?”

“입덧.”

촉비가 눈을 부라리기에 입가에 손을 대고서 구토하는 시늉을 하자,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이게 뭔가…… 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하고 있자니, 촉비의 말처럼 황후가 직접 이쪽으로 다가왔다.

황후가 다가오자 촉비와 온 귀인이 일어나고, 나도 슬그머니 따라 일어섰다.

황후는 내 앞에 음식물이 남들보다 두 배로 쌓인 접시를 빠르게 보더니, 곧 빙그레 웃으며 내 어깨를 눌렀다.

“회임했는데 조심해야지. 앉거라.”

“감사합니다, 황후 마마.”

온 귀인이 부축하는 시늉을 해주어서 얼결에 아픈 사람처럼 앉으면서 보니, 황후 뒤에서 영영이 내 접시를 쳐다보며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다.

나는 모른 척 다시 황후를 보았다. 황후의 옆에는 온수연이 붙어 있었다.

내가 온수연을 보자, 황후는 내게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천빈. 듣자 하니 내 사촌 동생이 천빈에게 무례를 저지른 모양이던데. 맞나?”

그 말에 ‘네’라고 대답하려는데 뒤에서 손이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감싸 쥐면서 대신 대답했다.

“황후 마마의 동생이라면 예절 바른 규수일 텐데, 그럴 리가 있나요.”

힐긋 어깨를 보니 길쭉하고 아름다운, 그야말로 섬섬옥수 같은 손이었다.

슬쩍 고개를 들자 연비가 서 있었다.

어느새 우리 주위는 모두 조용해져 있었다. 아니, 대체 이게 뭔 일이래?

당황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자, 황후는 잠시 가만히 있다 웃더니, 온수연의 어깨에 팔을 올려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내 사촌 동생이 천빈에게 무례를 저질러서, 천빈이 홧김에 이 아이의 발목을 걷어찼다 들었는데.”

그 말이 끝나자 몇몇 사람들이 뭐가 그리 놀랍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치마에 흙이 묻어 있네요.”

“꼭 걷어찬 것처럼 저 부분만 구겨졌잖아요.”

저 수군거리는 사람들. 온수연 뒤쪽에 서 있으면서 치마 앞부분이 보인단 건가.

황후는 나를 바라보며 다시 빙그레 웃더니 다독이듯 말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천빈, 회임한 몸으로 다른 사람을 걷어차는 건 좋지 않아. 아이가 뭘 보고 배우겠나.”

그 말에 몇몇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단호하게 거짓말했다.

“저는 걷어찬 적이 없어요. 황후 마마.”

그 말에 황후가 웃으면서 달래듯 물었다.

“그럼 내 사촌 동생이 처음 보는 자네에게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나.”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 이번에는 촉비가 말했다.

“황후 마마, 온 소저가 아까 이 앞으로 와서 천빈에게 인사를 올렸지요. 천빈은 회임을 해서 다리가 자주 붓고 발이 잘 저리답니다. 발을 펼칠 때 앞에 섰다가 조금 부딪쳐 놓고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이군요.”

황후는 촉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가 펴더니 웃으면서 물었다.

“설마 차는 것과 부딪치는 걸 구분하지 못하려고.”

촉비 역시 웃으며 또 대답했다.

“황후 마마의 말씀처럼, 처음 보는 사이에 누가 굳이 걷어차고 그러겠어요? 온 소저가 천빈에게 못할 말을 한 게 아니라면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그 말이 끝나자 온 귀인이 갑자기 “세상에.”라고 깜짝 놀란 목소리를 내어 사람들 관심을 자기에게 붙잡더니, 내 팔을 살짝 쥐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온 소저가 천빈 마마 앞에서 복중 아기씨가 누구 아기인지 어떻게 아냐는 식으로 막 빈정거렸어요. 그 말을 하고 나니 겁이 나서 황후 마마께 거짓말한 걸까요?”

같이 들었으면서 촉비가 “정말이야, 동생?”하고 묻자, 갑자기 촉비 동생이 된 온 귀인이 “네, 언니!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 하고 대답했다.

뒤에서 연비는 좀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이냐, 온 소저?”

놀랍게도 셋이서 말을 몇 마디 주고받더니, 황후가 내게 질문하는 분위기를 온수연을 추궁하는 분위기로 만든 것이다.

돌아가는 판에 끼지 못하고 눈을 굴리고 있자니, 생일 주빈의 특권으로 황후 바로 아래 상석에 앉아 있던 영빈이 다가오며 화를 냈다.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누가 감히 폐하의 첫 번째 아기씨를 두고 그딴 말을 하지?”

영빈은 연비 앞에서는 살살 기지만, 연비가 누구랑 싸운다 하면 갑자기 마교 행동대장처럼 변한다.

영빈의 목소리는 힘이 있는 데다 까칠하고 좀 무섭기까지 해서, 온수연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황후도 어쩌지 못하겠나 보다. 그녀는 온수연을 보더니 차갑게 혼을 냈다.

“온 귀인 말이 사실이냐?”

온수연은 “아, 아니에요!” 하고 부정했지만, 영빈은 악어처럼 한 번 입에 문 먹이는 놓지 않았다.

“그러면 처음 본다는 내 언니에겐 왜 갑자기 찾아간 거지? 정말 인사만 하러 간 거면 그런 오해도 하지 않겠지!”

“저는…….”

“집안 교육을 어떻게 받아먹은 거냐!”

와. 한 번에 온씨 가문 전체를 다 쥐어박았어. 이번에는 온 귀인까지도 움찔한다.

황후가 서늘한 눈으로 쳐다보자, 영빈은 웃으면서 덧붙였다.

“황후 마마께서 입궁하신 후로 본보기가 될 좋은 사람이 없다 보니 이렇게 망가졌나 봅니다.”

* * *

“저, 저 거짓말 한 거 아니에요 황후 마마!”

엉엉 우는 사촌 동생을 보며 황후는 한 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하지만 치마 아래 정강이에 파랗게 멍이 든 걸 보니 쥐어박을 마음도 빠르게 사라져서,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실질적으로 충고했다.

“맞아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맞아라.”

“설마 걷어찰 줄은 몰랐어요, 황후 마마!”

“나도 네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아기씨가 폐하의 아기씨가 아니라니!”

“그게-.”

“잘못했으면 그대로 끌려갈 수도 있는 말이었어. 네가 제정신이냐?”

“죄송해요, 황후 마마.”

영영이 온수연의 멍든 다리에 연고를 힘있게 바르자, 온수연은 다시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연신 닦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전 그것도 거짓말한 거 아니에요, 황후 마마. 태안루 주인 사내가 진짜 진짜 잘생기고 아름다운데요…… 그 사내랑 천빈이 분명 놀아나고 있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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