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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96화 (196/283)

##  196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넌 정체가 뭔데?”

나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목에 닿은 검 끝이 위협적으로 살을 조금 파고들어 왔다.

“질문은 내가 한다. 너는 대답만 해라.”

그 상태로 용화노는 차갑게 말했다.

일말의 온정조차 없는 날카로운 목소리는 그의 악명과 꼭 어울렸다.

저런 주제에 ‘고궐’로 지낼 때는 초기 평판 관리를 잘한 게 신기할 정도다.

나중에야 다들 뒤통수를 맞고 고궐에게 이를 갈았다지만, 처음에는 다들 고궐을 사랑에 목을 매는 선량한 청년으로 여겼다니까.

하지만 고궐이 악명이 높건 악명을 잘 숨기건 목소리가 차갑건,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왜냐. 나는 용화노보다 악명이 더 높으니까.

용화노의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재빨리 몸을 틀어 그의 팔을 꺾고, 뒤통수를 벽으로 눌렀다.

아플 정도로 세게 이마를 벽에 부딪친 그가 반격을 위해 팔에 힘을 주었으나, 그의 팔은 이미 내가 꺾기 딱 좋게 자세가 잡혀 있었다.

이런 자세의 장점은 용화노가 힘을 쓰면 쓸수록 본인 팔이 부러질 위험이 더 커진단 거지.

그가 작게 이를 갈았다. 욕을 뱉는 것 같기도.

“이제 대답은 네가 해야겠구나.”

나는 위엄 있게 말하고서 용화노의 뒤통수를 벽을 향해 더욱 세게 눌렀다.

‘이거 참.’

하지만 용화노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하필 멀지 않은 곳에서 순찰을 도는 위병들이 나무판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운이 좋구나.”

내가 혀를 차고서 그의 머리를 놓아주자, 용화노는 나를 확 뿌리치듯 돌아서서는 바짝 날을 세웠다.

그 순간, 나는 단도를 휘둘러 그의 이마에 금을 그었다.

“!”

별 이유는 없었다. 이렇게 해두면 나중에 그가 숨더라도 찾아내기 쉬울 것 같아서. 못 찾아내더라도 혼자 아프긴 하겠지.

눈을 마주 보고서 방긋 웃자,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아차. 혹시 내가 너무 천년비처럼 행동한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용화노와 싸운 적이 몇 번 있지만 이마에는 금을 안 그었어. 목에 그었지.

그러는 동안에도 순찰을 도는 위병들의 나무판 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나는 그를 놓아주고 방긋 웃고서 어깨를 두드려 신호했다.

“먼저 앞장서시게.”

* * *

‘어딘가…… 말하는 게 익숙한 느낌이었는데.’

고궐은 이마에 소매를 댄 채 사용하지 않는 건물 뒤편에 잠시 앉아 생각했다.

이마에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위치가 문제였다.

눈 위쪽이다 보니 자꾸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눈 위로 흘러내렸다.

평범하게 궁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눈 위로 피가 흐르건 말건 상관없지만, 그는 숨어 지내는 처지였다.

오래전부터 궁전에 머문 사람은 그의 얼굴을 알지도 모르니, 이 상태로 돌아다니기 힘들었다.

결국 고궐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며 지혈하다가, 피가 느리게 새어나갈 즈음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장공주의 처소로 가니 그녀는 마당에 평상을 놓고 앉아 여름 공기를 쐬고 있었다.

고궐은 잠시 나무 옆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함께 즐겁게 지낼 적, 장공주는 더운 날이면 치마를 무릎까지 올리고 얼음물에 발을 담갔다.

고궐은 옆에서 부채질을 해주었고, 궁녀들은 장공주에게 체통이 상한다며 제발 치마 좀 내려주십사 부탁했다.

장공주는 그럴 때마다 오만가지 핑계를 대며 절대로 다리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궐과 눈이 마주치면 쑥스럽게 웃으면서 부채에 날아가는 척 몸을 휙 옆으로 뉘었다.

“…….”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시선을 느낀 건지 장공주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 웃는가 싶던 그녀는 고궐의 이마를 보더니 놀라서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입모양으로 ‘상처’라고 말하는 듯했다.

고궐이 이마 위로 손을 올리자, 그녀가 평상에서 내려와 곁으로 다가왔다.

“이마가 왜 그래요?”

고궐은 자기 이마를 얼결에 가리며 거짓말했다.

“못에 베었습니다.”

그는 베인 상처를 두고 넘어졌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주도면밀한 변명에 장공주는 “아파 보여.” 하고 중얼거렸다.

기억을 잃기 전 장공주는 늘 그에게 하대했기에, 고궐은 그녀의 지금 말투가 너무 어색했다.

기억을 찾으면 원래 말투가 돌아올까?

고궐은 한 손을 계속 이마에 둔 채 부탁했다.

“괜찮으시면 연고를 받아 갈 수 있겠습니까?”

“방으로 들어가요. 내가 치료해줄게요.”

장공주는 선뜻 말했지만 고궐은 놀라서 뒤로 몸을 뺐다.

“방에 피 냄새가 뱁니다.”

“지금은 별로 피 안 나는 거 같던데.”

“그래도 밸 겁니다. 게다가 궁녀들은 제 얼굴을 압니다. 안 들어가는 게 옳습니다.”

“하지만 많이 베인 거 같아요.”

“이마 주위에 피가 굳어서 그렇지, 실제로는 거의 다치지 않았습니다.”

고궐이 딱 잘라 거절하자, 장공주는 그럼 여기에 있어 보라며 방 안으로 홀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니, 공주의 측근 상궁 두 명이 각기 수를 놓고 장부를 적고 있었다.

“유월. 외상에 바르는 월고약이랑 호문가루를 가져와.”

장공주가 긴 침상에 앉으며 지시하자, 유월은 얼른 장부를 내려놓고 비상약들을 쌓아두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유월이 바로 약을 찾아오지 못하자, 치월도 수틀과 바늘을 내려놓고 슬며시 유월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잘 왔어. 너무 많아서 찾기가 어렵네. 외상약들은 거의 쓰지 않잖아. 같이 좀 찾아줘.”

유월이 안도해서 말하자 치월은 유월과 정반대 방향에서부터 작은 서랍에 붙은 글씨를 하나하나 살피며 말했다.

“그런데 외상약은 왜 가져오라 하시는 거야? 게다가 두 종류나? 보통은 하나만 쓰지 않나?”

“나야 모르지.”

장공주는 두 궁녀가 돌아올 때까지 창밖에 시선을 던진 채 기다렸다.

그 표정은 싸늘하고 눈빛은 냉담했지만, 방 안에는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그녀의 낯빛을 볼 수 없었다.

일각 정도가 지나자 마침내 유월이 나무 쟁반에 뚜껑 덮인 작은 상자 두 개를 들고 들어와 장공주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전하.”

장공주는 아까의 차가운 표정을 금세 지우고 평소처럼 따뜻하게 웃으며 받아들었다.

“고마워. 그리고 목이 말라서 그런데. 유월, 모후께 가서 그제 내게 타주셨던 차가 뭐였나 여쭈어보고 좀 받아와. 밤이니까 치월, 너도 같이 가고.”

“공주 전하는…….”

“나는 이 안에만 있을 건데 뭘. 그리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니 괜찮아.”

장공주의 명령에 두 궁녀를 서로를 한 번씩 쳐다보고 밖으로 나갔다.

궁녀들을 따돌린 장공주는 월고약 뚜껑을 연 다음 거기에 호문가루를 뿌리고서 조그만 나무 절구로 둘을 잘 섞었다.

이후 다시 월고약 뚜껑을 덮고서 밖으로 나가자,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나무 아래가 유독 더 새까맣게 보였다.

그곳으로 가자 고궐이 벽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앞으로 반보 나왔다.

“이걸 이마에 바르면 빨리 나을 거예요.”

장공주가 월고약을 내밀자 고궐은 꾸벅 인사하고서 두 손으로 약통을 받아들었다.

“바르고 돌려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나는 새로 받아오면 되니까. 그쪽이 가져가서 매일 약을 발라요. 궁녀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나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친절하게 웃은 장공주는 돌아서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궐은 그 뒷모습을 애달프게 바라보다가, 장공주 처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빈 전각으로 들어갔다.

버려진 전각이라 청소도 되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먼지가 자욱했지만, 여름이라 이런 곳에서 자도 얼어 죽을 일은 없었다.

고궐은 문 근처에 앉아 약 뚜껑을 열고 검지에 약을 찍었다.

그러나 약을 이마에 바르려던 찰나. 그는 호문가루 냄새를 맡고 손을 멈칫했다.

“…….”

외상약에 호문가루를 뿌리면 약효는 더욱 좋아지지만, 둘 다 성분이 강하다 보니 독성 또한 강해졌다.

돌팔이가 아니라면 두 개를 합쳐서 사용하게 하는 의원은 없었다.

고궐은 손을 주춤하다가 착잡한 눈으로 장공주가 건넨 약상자를 바라보았다.

* * *

잠시 죽은 공주가 살아 돌아와 궁궐이 떠들썩해지긴 했지만, 그리고 아직도 떠들썩하지만, 상대적으로 내명부는 빨리 진정되었다.

그녀는 황제의 동복 누이이지 후궁은 아니었고, 본인도 평소 태후와 잘 지낼 뿐 후궁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만날 일이 없으니 후궁들은 장공주에 관해 호기심이 빠르게 식었고, 동쪽 구역은 다시 평화로워졌다.

나 역시 장공주와 얽히는 일이 사라졌다.

파독 팔찌 사건 이후 장공주는 내 방에 찾아오지 않고 나를 부르지도 않았다.

태후 마마께 문안을 가도 태후 마마만 있지 장공주는 없어서, 아예 마주칠 일이 없었다.

원웅과 부성은 이런 상황에 안도했다.

“팔찌 건으로 폐하게 한소리들은 게 분명해요.”

“또 허튼 수를 쓰다가 폐하게 밉보일까 봐 몸을 숙이고 있는 거예요.”

두 궁녀의 추측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번에는 내 쪽에서 장공주를 만나고 싶어졌다.

타천천 때문이다. 그가 장공주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자기에게 한 번씩 알려달라 해서.

장공주는 혼령술에 미숙한 고궐이 되살려냈으니, 어디에서 부작용이 나올지 모르는 상태라 했지.

부작용이 나타난다면 타천천이 빨리 알고 연구를 해야 한다.

그래야 부작용을 줄일 방법도 찾을 수 있고, 혹시 내 몸에 나타날지 모를 부작용도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장공주와 얼굴조차 못 보고 지내면, 부작용이 나타나도 알아챌 시기를 놓치는 거 아닐까?

게다가 고궐.

그날 이후 밤에 여기저기 돌아다녀 봐도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걸 보니 장공주 처소 근처에 숨어 있는 모양인데…….

‘도무지 속내를 모르겠어.’

하지만 팔찌를 돌려보낸 내가 장공주를 만나자고 하면 이번엔 그쪽에서 날 안 만나려 하겠지?

* * *

장공주를 피해 놓고, 이번에는 장공주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나…… 고민하면서 연못을 멍하게 보고 있을 때였다.

뜻밖에도 거북이가 보였다.

“저거 거북이잖아?”

연못에 거북이도 키워? 놀라서 귀자를 보자, 귀자가 아부하는 투로 물었다.

“잡아드릴까요?”

거북이 잡아서 뭐 어쩌려고. 나는 됐다고 손을 저으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도로 손을 내렸다.

“마마?”

거북이! 거북이 하니까 떡돌이랑 주고받은 말이 생각나네. 타천천이랑 한 말도 생각나고.

타천천이 그랬지.

내 몸은 장공주 몸보다는 안정적이지만, 자기도 혼령술이 완벽한 건 아니라 다른 데로 영혼이 튀어 나갈 부작용이 아예 없다고는 못 하겠다고.

떡돌이는 내가 거북이 몸에 들어가면 어쩐다 했더라. 잘 길러준다 했던가.

“…….”

“마마? 왜 거북이를 그리 노려보시는지……”

“귀자야.”

“예.”

“하나만 잡아 와. 다치지 않게.”

귀자는 의아해하면서도 거북이를 잡아다 주었다.

“이걸로 뭘 하시려고요?”

뜬금없이 거북이를 가져오라니 궁금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설명할 수 없는 거지만.

어쨌든 잘 됐어.

* * *

그날 밤.

나는 떡돌이 옆에서 곤히 자다가, 떡돌이가 완전히 잠에 곯아떨어졌을 때 슬그머니 침상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서 병풍 뒤로 가서 아까 대야에 넣어둔 거북이를 들어 올린 다음, 그걸 내가 누워 있던 자리에 옮겨두었다.

자. 이렇게 해두면 떡돌이가 내가 거북이가 됐을 때 날 어떻게 대할지 알 수 있겠지.

나는 재빨리 잠행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천장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기고 인기척을 최대한 죽였다.

그 상태로 몇 시진이 지나자 마침내 떡돌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떡돌이는 늘 새벽에 일어나지만, 여름이라 아직도 날은 밝았다.

나는 떡돌이의 표정과 눈동자를 똑똑히 주시했다.

처음에 떡돌이는 옆을 보아도 내가 없단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래는 안 봤으니까. 그는 태연히 하품을 하고서 자기 이마만 문질렀다.

그러다가 좀 더운 듯 이불을 아래로 내리고서 다시 옆을 보았다가, 또 정면을 보았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

그 상태로 열 정도를 세었을 즈음. 떡돌이는 엄청난 속도로 옆에 놓인 거북이를 쳐다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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