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마마다!
“갈게. 가야지.”
내가 대번에 허락하자 비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약속 시각을 알려주고서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나도 고개를 내리고서 마저 산책하듯 유유히 근처를 거닐다가 처소 안으로 돌아가 원웅이 타 준 과일즙 섞은 얼음물을 마셨다.
* * *
약속한 날.
나는 밖에서 입을 옷을 한 겹 입고 그 위에 후궁들이 입는 겉옷을 한 겹 더 입었다.
여름이라 두 겹을 껴입으니 몹시 더웠지만 중간에 갈아입는 것보단 이게 낫겠지.
“네가 잘해야 해, 귀자야.”
“물론입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다행히 궁 하나를 혼자 사용하는 데다 귀자가 내 편이어서, 몰래 빠져나가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외궁까지 걸어가고, 그곳의 인적 드문 구석에 간 다음 겉옷을 벗어 귀자에게 건네며 당부했다.
“내가 올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해. 네가 없어도 일각 정도는 나도 널 기다릴게. 볼일이 급하면 어쩔 수 없으니까.”
“물론입니다, 마마.”
신신당부를 한 다음, 나는 몇 겹이나 쌓인 담을 넘었다.
담을 빠져나가고 나니 참. 바람이나 공기는 안이나 여기나 같지만, 그래도 뿌듯해진다.
처음 천소여 몸에 들어왔을 때는 기술만 남았지 내공과 근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무공을 사용하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담벼락도 넘어갈 수 있게 됐고.
이조차도 귀자의 도움이 없으면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옷매무새를 정돈한 다음, 태안루를 찾아 걸어갔다.
* * *
‘어디 가는 거지?’
그 뒷모습을 천빈에게 경고를 하러 왔다가 여기까지 쫓아오게 된 고궐이 유심히 살펴보았다.
고궐은 천빈의 옷을 들고서 서성이는 한 내관과 신이 나서 걸어 나가는 천빈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다가 천빈 쪽을 따라갔다.
* * *
태안루에는 전에도 온 적이 있어서, 길을 헤매지 않고 바로 찾아갈 수 있었다.
게다가 웬일? 전에는 입구를 가로막고 서서 자기들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들만 안에 들여보내 주던 이들이, 오늘은 날 보자마자 그냥 들여보내 주기까지 했다.
떨떠름해서 쳐다보자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는 걸 보니, 뭔가…… 얘기가 된 건가?
의아하지만 같이 손을 흔들어주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넓어.’
하지만 이렇게 넓은 다루 안에서 타천천을 바로 찾기는 어려워서, 나는 지나가는 점소이에게 여우같이 생긴 손님이 혹시 여기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이보게. 말 좀 묻겠소.”
“네…… 아아! 당신! 전에 손님 머리를 쟁반으로 때린!”
마침 붙잡은 이가 또 구면이라, 아주 잘된 일이었다.
“반갑소. 우리 이렇게 또 보는군.”
“반갑소? 반갑소? 아니 제 손님 머리를 그렇게 후려쳐 놓고 반갑단 소리가 나오십니까?”
“내 머리를 맞은 게 아니니까.”
“그런! 그렇지만!”
나는 미리 챙겨온 돈을 수북이 점소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점소이는 나만큼 마음이 넓어서, 그걸 받자마자 바로 우리의 과거를 미화시켜 주었다.
“이렇게 또 뵈니 참 좋습니다, 손님. 그래, 이번엔 누구 머리를 노리신다고요?”
“여우같이 생긴 손님.”
“음. 한 세 마리, 아니, 세 분 정도 봤습니다. 여자 하나에 사내 둘이었지요. 다 다른 일행이고요.”
“내가 찾는 건 사내요. 아, 키가 이만큼 크고 아주 잘생겼소.”
“하나는 못난 여우였으니 남는 건 딱 한 분이네요. 잘생긴 여우는 3층에 방에 계실 겁니다.”
“안내해주면-.”
점소이는 고개를 다부지게 저었다. 내가 또 자기 앞에서 손님 머리를 내려칠까 봐 걱정이 되나 보다.
하지만 이 점소이는 알아야 한다.
내가 정보호의 머리를 내려친 건, 그놈이 내 위치를 정파 개자식들에게 팔아먹으며 돈을 벌기 때문이었다.
그는 보이지 않은 뒤통수로 몇 번이나 나를 때렸으니, 나도 보이는 쟁반으로 그놈을 한 번 내려쳤을 뿐이고.
그렇지만 이런 말을 해봐야 소용없겠지. 나는 순순히 계단에 혼자 발을 디뎠다.
“안에서 세 번째 방 오른쪽입니다, 손님.”
“고맙소.”
“쟁반 하나 드릴까요?”
“괜찮소.”
그런데 점소이와 대화를 나누며 계단을 올라가고 있자니, 인기척이 바로 앞에 느껴졌다.
얼른 고개를 돌리고 멈춰 서서 올려다보자 마침 같은 방향에서 다른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루주님!”
점소이가 외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마주친 사람은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태안루주.
전에 봤을 때도 감탄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있네.
그가 나를 빤히 보기에, 나는 방긋 웃고서 옆으로 비켜주었다.
“나는 대인, 나는 대인.”
나는 ‘내 앞길을 막지 마라’면서 길에서 부딪쳤다고 행패를 부리는 악적이 아니다.
아주 너그러운 악적이지.
그런데 그를 스쳐 지나가고 있자니, 코앞에 풍성한 꽃다발이 내밀어지는 게 아닌가.
얼결에 그걸 받고 쳐다보자 태안루주는 덤덤히 말했다.
“선물.”
그러고는 저벅저벅 내려가는데…… 뭐지? 웬 꽃?
의아해서 꽃다발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계단 위쪽에서 무시무시한 시선이 느껴졌다.
얼결에 그쪽을 보니, 아주 고귀한 차림을 한 여인이 나와 태안루주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러나 싶어서 같이 쳐다보자, 여인은 점차 눈이 아픈지 눈가를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눈을 깜빡이고는 휙 돌아서 다른 데로 가버렸다.
‘뭐지?’
참 별일이 있네. 차 마시고 취했나.
의아했지만 일단 꽃다발을 들고 3층까지 올라가서 점소이가 알려준 대로 가장 안쪽 세 번째 오른쪽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타천천이 혼자 앉아 차를 마시다가, 힐긋 나를 보면서 웃었다.
“녕녕!”
반갑게 손을 흔들던 그는 내가 든 꽃다발을 보더니 감격해서 물었다.
“내게 주는 거야?”
이걸 들고 궁전에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는 해서 나는 순순히 그에게 꽃다발을 건넨 다음 맞은편에 앉았다.
타천천은 꽃다발을 품에 안고서 냄새를 맡아보더니 배시시 웃으면서 인사했다.
“고마워 녕녕. 여기서 녕녕의 향기가 나.”
아냐, 그건 태안루주의 향기야.
“날 왜 만나자고 했어, 녕녕? 보고 싶어서? 이거 주려고?”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그럼 이건 뇌물이야?”
“그건 그냥 주는 거야. 오다 주웠어.”
“녕녕은 부끄럼이 많구나.”
진짜로 오다 주운 건데. 정확히는 오다 받은 거지만.
어쨌건 이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는 그가 꽃다발을 내려놓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혹시 용화노가 사하비단에 들어간 적이 있어?”
타천천은 꽃다발이 그리 좋은지, 풍성하고 자잘한 꽃망울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녕녕이 내게 선물을 줬으니 알려주지. 잠시 들어왔다가 빠르게 나갔어.”
“왜?”
“애초에 노리는 바가 있어 온 거거든.”
굉장해, 용화노. 뒤통수의 화신인가. 여기저기서 뒤통수를 날리고 다니는구나.
“노리는 게 혹시 혼령술 비법이었어?”
타천천은 나를 힐긋 보더니,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져서 웃었다.
“뭐 아는 게 있구나, 녕녕.”
“죽은 장공주가 돌아왔어. 용화노가 그 근처를 머물고 있었고. 장공주는 그자가 자기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했어.”
“오호라. 재능 있는걸. 바로 성공하다니.”
“성공……인진 모르겠어. 장공주 안에 든 사람은 자기가 장공주가 아니라 주장했거든. 용화노는 그래도 안 믿는 것 같았지만.”
타천천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또 꽃다발을 쓸었다.
“처음부터 그자는 혼령술을 노리고 왔지.”
“그럼 어쨌든 고……용화노가 무슨 방법을 알긴 아는 거네?”
“방법을 알아냈으니 달아났겠지.”
“너랑은 관련이 없는 일이고?”
“내가 공주님을 깨워서 뭐에 쓰겠어.”
그건 그렇다. 장공주가 돌아와서 혼란스러운 건 떡돌이와 태후 마마뿐이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타천천이 묘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원하지 않은 엉뚱한 영혼이 장공주 몸에 들어왔다면 흥미롭네. 세 번째인가.”
“뭐가? 세 번째?”
“녕녕, 혹시 그 장공주란 사람 몸 상태 어떤지 가끔 내게 알려줄 수 있어?”
“내가 왜?”
말하고 나니 나는 타천천에게 질문할 게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얼른 말을 정정했다.
“좋아.”
타천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고마워.”
“물어볼 게 하나 더 있어.”
“말해봐 녕녕.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딨어.”
널렸겠지. 속으로 혀가 차졌지만, 지금 질문은 장공주에 대한 질문 이상으로 중요하기에 나는 신중하게 물었다.
“혹시 말이야. 내가…… 이렇게 지내다가 갑자기 다른 몸에 들어갈 수도 있어?”
“원래 몸?”
“아니, 정말로 다른 몸. 튕겨 나가는 것처럼 이 몸에서 빠져나와 다른 사람이나 동물 몸에 들어갈 수도 있어?”
“가고 싶어, 녕녕?”
씩 웃는 타천천의 미소가 너무 변태 같아서, 나는 치를 떨며 손을 저었다.
“가고 싶어서 묻는 게 아니라 걱정되어서 묻는 거야. 갑자기 다른 사람 몸에 가게 되면 그것도 힘들잖아.”
타천천은 꽃다발에서 손을 떼고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의 내 얼굴과 지금의 내 얼굴을 비교하려는 것처럼.
그 순간은 잠시 진지한 얼굴이었으나, 시선을 떼자마자 타천천은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내가 제대로 혼령술을 했다면 그럴 일은 없어, 녕녕. 하지만 전에도 말했던가? 내 혼령술은 아주 불완전해서 이것저것 아직도 시험 중이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모르겠어. 장공주 몸 상태를 알려달란 것도 내가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고.”
“그럼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는 거네?”
타천천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섬뜩하면서 저절로 배에 시선이 내려갔다.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두려움인지 투지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이 솟아서, 나는 주먹을 꽉 쥐고서 입술을 씹었다.
타천천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그런 내 모습을 구경하다가 말했다.
“내가 이 정도이니 속성으로 혼령술을 훔쳐 배운 용화노는 더 심할 거야, 녕녕. 장공주 몸이 돌아왔다 했지? 장공주는 죽은 지 몇 해가 지났으니 멀쩡한 몸일 리가 없어. 그런 상태인데 미숙한 용화노가 손을 댔으니, 어떤 부작용이 몰려들지 몰라.”
“부작용? 어떤 건데?”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나도 몰라 녕녕.”
“!”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꼭 알려줘.”
뭐야. 그렇게 말하면 무섭잖아. 하지만 타천천은 평소와 달리 지금은 장난치는 얼굴이 아니었다.
결국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와 비원이 염 귀인을 죽게 한 것 때문에 이제는 상대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내 몸이 걸려 있으니 이렇게 또 얽히게 되는구나.
안타깝고 갑갑했지만 어쩔 수 없겠지. 이런 상태가 평생 계속되진 않아야 할 텐데.
“그럼 이만 갈게.”
“벌써 갈 거야, 녕녕? 나랑 같이 놀지 않을래?”
마지막 말에 대답을 피하고서 밖으로 나오자, 아까 나를 노려봤던 그 돈 많아 보이는 여인이 나를 또 쏘아보았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저래 봐야 자기 눈알만 아플 텐데.
그냥 무시하고 지나간 다음, 나는 계단을 내려와 다루를 빠져나왔다.
이제 돌아가야지. 너무 오래 돌아다니면 내 궁녀들이 걱정할 거야. 회임도 했잖아.
그런데 내가 빠져나온 그 담벼락을 찾아 걸어가느라 인적 드문 곳으로 향하고 있자니, 옆에서 살기 담긴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래도 모른 척 쭉 걸어가고 있자,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졌을 때.
내내 살기를 보내던 사람이 골목길 사이에서 나와 내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옆을 보자 와! 용화노였다. 얜 절대로 복면을 안 쓰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고개를 기웃하며 물었다.
“너. 정체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