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나 시 좋아하네
날씨가 점점 무더워지고 있었다.
장공주의 두 궁녀는 점점 많아지는 풀벌레들이 혹시 방 안에 들어오기라도 할까 봐, 한쪽에 벌레를 쫓는 향을 피우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멀리서 여러 개의 등롱불이 줄지어 다가오는 걸 보자, 그들은 얼른 계단 아래로 내려가 황제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등롱 사이에서 나타난 건 역시나 황제였다.
“누이는?”
황제는 오자마자 장공주부터 찾았고, 궁녀들은 얼른 두 손으로 전각을 가리켰다.
“안에서 쉬고 계십니다. 몸이 부쩍 약해지셨어요.”
황제는 말없이 그들 사이를 지나쳐갔다.
궁녀들은 웃고 있다가, 황제가 안으로 들어가자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궁중에서 일해왔기에 주위 분위기를 살피는 데 아주 섬세하고 예민했다.
윗사람의 표정이나 말투, 동작만으로도 재빠르게 상황이 파악될 정도였는데, 그들이 느끼기에 지금 황제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다.
치월은 오 공공을 따라 들어가려는 온 태감을 낚아채다 물었다.
“무슨 일이야? 폐하께서 왜 저리 서늘하셔?”
온 태감은 힐긋 주위 눈치를 살피다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천빈 마마께서 쓰러지셔서 지금 몹시 화나셨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저도 못 해요.”
“천빈?”
온 태감은 고개를 빠르게 젓고서 얼른 안쪽으로 들어갔다.
온 태감이 들어가자, 오원요는 그에게 눈을 부릅떴다. 헛소리하지 말란 뜻이었다.
온 태감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서 얼른 말단 자리로 가 섰다.
황제는 이미 장공주와 마주 보고 서 있었는데,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표정이 이전보다는 어두웠다.
“무슨 일입니까?”
장공주의 질문에 황제가 오원요에게 눈짓하자, 오원요는 손을 휘저어서 대기 중이던 궁인들을 모두 밖으로 물렸다.
그러고서 자신도 나가자 장공주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황제는 가져온 팔찌를 내밀었다. 장공주는 팔찌를 받아 들고 놀랐다.
“이건 내가 천빈에게 준 아바마마의 파독 팔찌가 아닙니까.”
그녀의 눈길이 팔찌의 깨진 부분을 맴돌았다.
팔찌는 완전히 두 동강이 난 건 물론, 그 사이도 자잘하게 깨져 있었다.
“이게 왜……?”
“천빈의 궁녀가 쥐었는데 깨졌다고 합니다.”
“궁녀가? 아니, 얼마나 힘이 세길래?”
“평범한 궁녀입니다. 그래서 본인도 당황한 것 같았지요. 팔찌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장공주는 떨떠름해서 옥으로 된 팔찌와 황제를 번갈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천빈이 이 팔찌를 받은 후부터 내내 시름시름 앓았습니다. 어의도 다녀갔다 하고요.”
“천빈이요?”
“그러다 팔찌를 의심해 빼보니, 천빈은 멀쩡해지고 팔찌가 부서졌다는군요.”
장공주는 몹시 당혹스러운 얼굴로 동생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궁중 사람이지만, 황후 소생의 적녀인데다 선황제가 가장 아끼는 자식이라 다른 이들과 많은 암투를 벌일 필요가 없었다.
후궁들은 대부분 그녀와 잘 지내고 싶어 했고, 황후는 친딸이니 당연히 천금 만금보다 귀하게 여겼다.
선황제는 그녀가 불면 날아갈세라 어여삐 여겼고, 그녀는 자신이 받은 모든 애정을 잘 간직하다가 동복동생인 월요 황제를 보살피며 베풀었다.
그녀는 이런 일에 얽힌 게 처음이라 영 얼떨떨하기만 했다.
“나는……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천빈에게 주기 전엔 내가 계속하고 있던 팔찌였는걸요.”
“누이가 나쁜 마음으로 준 건 아니라 믿겠습니다. 누이는 형제자매들 중 제 유일한 혈육이니, 후궁들과 다툴 필요가 없으니까요.”
“!”
“혹시 누이. 이 팔찌를 천빈에게 주도록 누가 조언을 하거나 했습니까?”
월요의 질문에 장공주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장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이었다. 천빈은 독을 먹은 적도 있다 하니, 주면 좋을 것 같았어.”
한숨을 내쉰 월요는 앞으로는 주의해 달라며 팔찌를 내려놓고 돌아갔다.
월요가 나가자, 장공주는 눈가가 뜨끈해져서 침상에 털썩 앉았다.
억울하고 부끄러워서 입술이 저절로 떨렸다.
장공주는 정말로 이게 무슨 일인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동생이 총애하는 여인에게 호의를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이 팔찌를 받을 당시 수많은 이들이 부러워한 걸 떠올렸을 뿐이었다.
독살의 위험이 흉흉한 궁중에서 파독 팔찌는 아주 귀한 거니까.
그런데 호의로 베푼 일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머리를 후려치니, 저절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고궐 역시 이 일과는 관련이 없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을 되살려내고는 후회하는 척 구는 고궐을 지켜보며 상황을 파악하느라, 일부러 다른 사람인 척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적이 무엇이든 아직 고궐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해달라 한 적이 없었다.
뒤에서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앞에서는.
멍하게 팔찌를 부여잡고 있자니, 황제 일행을 배웅한 궁녀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공주 전하?”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뭔가…… 오해가 있던 모양이다.”
“오해라니요?”
“이 팔찌를 끼고 있더니 천빈의 몸이 쇠약해졌다더군. 팔찌를 빼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고.”
치월은 화가 나서 외쳤다.
“꾀병입니다. 그게 말이 되나요?”
유월도 분에 차 씩씩거렸다.
“그 팔찌는 마마께서 선황제 폐하께서 받으신 후 내내 착용하고 계셨고, 돌아오신 후에도 늘 끼고 계시던 건데 나쁜 물건일 리가 없잖아요.”
장공주는 팔찌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지시했다.
“후궁들을 담당하는 어의를 찾아가 천빈이 정말로 몸 상태가 나빠졌던 건지 알아보아라.”
다음날, 유월은 은밀히 탕 궁의를 찾아가 물었다.
“천빈이 몸이 안 좋다 들었는데. 괜찮은 건가요?”
“혼절해 깨어나지 못하셔서 찾아뵈었지요. 다행히 병이 있거나 이상한 걸 드신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영양이 너무 부족하셔서, 몸을 보하는 탕약을 처방해 드리고 왔지요.”
유월이 돌아와 이 이야기를 전하자 치월은 확신에 차 씩씩거렸다.
“꾀병이네요. 일부러 마마께서 팔찌를 주자마자 음식을 안 먹고 버텨서 쓰러진 거예요. 이 팔찌가 정말 해로운 물건이라면 어의가 알아차렸겠지요!”
치월은 장공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천빈은 자기에게 관심이 집중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여자가 틀림없습니다, 전하. 그러니 마마와는 총애를 다툴 필요가 없는데도 그러는 거예요.”
“제 생각에도 천빈은 멀리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전하.”
장공주는 부러진 아버지의 유품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천빈은 홑몸도 아닌데다 몇 번 해를 입어 쓰러진 적이 있다지. 낯선 날 뭘 믿고 믿으려 하겠느냐. 반갑다고 생각 없이 다가가버린 내가 경솔했다.”
장공주는 팔찌를 자신의 팔에 도로 차고서 힘없이 웃었다.
“너희들 말처럼 거리를 두는 게 낫겠다. 너희도 괜히 근처에 가지 말거라. 이 일로 비연궁 궁녀들과 싸우지도 말고.”
* * *
장공주는 이 일을 여기서 마무리 짓고자 했지만, 유월과 치월은 그럴 수 없었다.
이미 한 차례 장공주는 저런 태도를 보이다가 고궐에게 세게 뒤통수를 맞고 죽은 적이 있다.
여기서 또 물러섰다간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괴로워졌다.
“천빈은 공주 전하가 폐하와 가까운 게 싫어서 누명을 씌운 거야.”
“한 번 누명을 씌운 사람이 이대로 물러날 리가 없어. 분명 또 해코지를 하려 하겠지.”
“공주 전하는 고궐 그놈 때문에 다른 사람과 혼인할 마음도 없으시고, 폐하와 태후 마마께선 공주님에게 원치 않는 재가를 강요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계속 여기서 사셔야 하는데, 천빈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지낼 순 없어.”
“지금도 저러는데, 적장자를 낳아서 기르면 얼마나 목이 빳빳해지겠어? 공주님을 괄시해대겠지. 그러다 아이가 크면…….”
“천빈이 또 공주님을 적대하면 천빈이 낳은 아이를 뺏어오자. 천빈은 냉궁에 쳐넣거나 쫓아내버리고. 그러면 아이가 크더라도 괜찮아. 공주님을 따를 테니까.”
두 궁녀가 몰래 숨어서 속닥이는 소리는 장공주의 침상까진 들려오지 않았으나, 근처 나무 위에 숨은 고궐에겐 들려왔다.
‘천빈?’
고궐은 천빈이란 여자가 장공주에게 누명을 씌운단 이야기에 불쾌해져서 인상을 찌푸렸다.
후궁 하나를 죽이는 건 손쉬운 일.
순간이지만 그는 밤중에 천빈을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두 궁녀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나자 고궐은 마음이 바뀌었다.
지금 장공주는 기억이 없다며 자신이 다른 사람이라 주장하지만, 그는 분명 장공주의 영혼을 불러오는 방법을 썼다.
기억이 없어도 그녀는 장공주였다.
그리고 기억을 찾는다면, 장공주는 아마 두 궁녀의 말처럼 사내라면 질색할 것이다.
더이상 다른 이와 재가하지도 않을 거고.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사내를 만나 사랑한다면 좋겠지만…….
천빈이 낳은 아이를 기르는 게, 외로운 장공주에게 힘이 될지도 몰랐다.
고궐은 궁녀의 말을 계속해서 주워 담다가, 담벼락 너머로 내려서며 눈을 빛냈다.
‘어쨌든 그 천빈이란 여자. 경고를 한 번 해두는 게 낫겠군.’
* * *
‘고궐 그 새끼. 지나가다 잡히면 내가 왜 악적 중에서도 제일 악적으로 악명이 더 높았는지 알려주마.’
태교를 위해서 시집을 펼치자, 마음에 쏙 드는 단어가 들어왔다.
돌. 물. 흙.
이 시를 쓴 시인은 말했다. 이 세 가지 안에 모든 답이 있다고.
정말 맞는 말이다. 나도 그 단어들을 보자, 고궐을 상대할 해답이 주르륵 펼쳐진다.
돌. 이 돌로 고궐의 머리를 찍어 버리리라.
물. 이 물에 고궐의 머리를 담가 버리리라.
흙. 이 흙에 고궐의 머리를 묻어 버리리라.
역시 옛 성인들은 위대하고 시인들은 시원하다.
한 자 한 자 아주 깊은 뜻이 담긴 것이, 여기를 봐도 고궐을 해칠 마음이 샘솟고 저기를 봐도 고궐을 해칠 마음이 샘솟아 무척 흐뭇했다.
“그 시가 마음에 드시나 봐요, 마마. 표정이 많이 밝아지셨어요.”
“응 원웅. 이 시인 참 마음에 드네.”
내가 흐뭇하게 웃자, 원웅과 부성은 회임을 하고 나니 내가 좀 더 인자하고 멋진 마마가 된 것 같다며 감탄했다.
나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뒷장을 펼쳤다.
뒷장에 나온 게 보자…… 칼과 도끼로군?
충심은 칼같이. 암, 칼 좋지.
결단은 도끼로 찍듯이. 아, 도끼 좋지.
그런데 재밌게 시집을 반 정도 읽었을 때였다.
누군가 창문을 갉아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창문을 열어도 아무도 없고…….
“마마? 왜 그러세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시집을 덮고 일어났다.
“산책을 좀 해야겠어.”
원웅과 부성은 동그란 부채를 들고 따라나서서, 양옆에서 내게 부채질을 해주었다.
나는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받으며 천천히 거닐다가, 나뭇잎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빛을 보자마자 얼른 두 사람의 부채를 아래로 누르며 지시했다.
“혼자서 바람을 쐬고 싶으니까 둘 다 들어가 봐.”
“하지만 마마, 회임도 하셨는데…….”
“더우실 거예요.”
“비연궁엔 다른 후궁들은 오지 못하잖아. 괜찮아. 산책 끝나고 먹게 얼음 넣고 시원한 음료수나 만들어 줘.”
내가 부채 하나를 가져다 쥐고서 얼른 돌아가라고 허공에 부채질을 하자, 두 사람은 마지못해 물러났다.
그들이 멀어지자 나는 구름이 움직일 때마다 희미하게 반짝여대는 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거기서 위를 올려다보니, 나무 사이에 비원이 몹시 불편한 자세로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창문 긁어대길래 얘가 온 줄 알았지.
“무슨 일이야?”
내 질문에 비원이 대답했다.
“단주님께서 수도에 오셨습니다. 마마께서 뵙고 싶어하신다는 말을 전했더니, 태안루에 오실 수 있는지 물으셨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