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돌을 부쉈어
기분 나쁘게 듣지 말란 소리가 두 번이나 나왔단 건, 말하는 사람도 알고 있단 거다.
자기가 기분 나쁘게 들릴 소리를 하고 있단 걸.
나는 입을 네모나게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떡돌이는 내 시선이 길어질수록 점점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말을 바꾸지는 않는 걸 보니, 정말로 신신당부하기 위해 온 모양이었다.
여기서 뭐라고 하겠는가.
“그럼 오지 말라 해.”
“!”
떡돌이는 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달래는 투로 말했다.
“누이는 네가 걱정되어 온 건데, 반숙아. 그저 고궐 이야기만 안 꺼냈으면 하는 거지 않으냐. 다른 이야기를 하지 말란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런 말을 듣기 싫으면 오지 말라니…….”
“고궐 이야기를 해보면 공주 전하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솔직히 말하자면, 반숙아. 너는 내 누이가 가짜이든 진짜이든, 무어라고 할 처지가 아니잖느냐.”
“!”
이번에는 내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인정하자면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맞는 말이라 더 화날 때가 있는 법이다.
떡돌이는 자기도 그 말을 꺼낸 게 좀 후회가 되는 듯 바로 사과했다.
“미안.”
나는 내 배를 손으로 감싸고서 그에게서 몇 걸음을 떨어져 앉았다.
“장공주가 진짜인지 가짜인진, 맞아. 상관없어. 하지만 고궐이 얽혀 있잖아. 그자가 내 아이한테 해를 끼치면 어쩔 건데?”
* * *
떡돌이가 나가고서 내가 침상에 움츠려 있자니, 원웅이 주저하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폐하께서 마마께 안 좋은 말씀을 하신 건가요? 안색이 나쁘세요.”
“속이 안 좋아서 그래. 그리고 폐하는…… 나쁜 말씀은 안 했어. 그냥 나더러, 장공주 앞에서 고궐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 한 거지.”
부성은 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도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았다고 생각해요, 마마. 어쨌든 그 일로 목숨까지 잃었던 분이잖아요.”
알아. 속으로는 떡돌이가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안다.
떡돌이는 장공주를 진짜 누이라 믿으니, 당연히 내가 그런 말을 꺼내는 게 싫겠지.
하지만 나라고 뭐 좋아서 말했겠어? 내가 장공주 상처받으라고 일부러 소금을 뿌렸겠냐고.
고궐 그놈이 내 새끼에게 피해를 끼칠까 봐 신경 쓰이는 걸 어떡해.
떡돌이가 ‘잘 살피겠다’고 갔으면 모를까, 철석같이 장공주가 진짜라고 믿는 상황이었잖아.
배를 감싸고 무릎에 이마를 대고 있자니, 갑자기 “악!” 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자 원웅이 커다란 호랑이처럼 씩씩거리고 있었다.
“원웅?”
황당해서 이름을 부르자, 원웅은 두 손으로 허공을 마구 휘저으면서 외쳤다.
“너무 화나요! 장공주 완전 여우 같아요! 마마께서 그 얘기한 걸 폐하게 그대로 고자질한 거잖아요! 그런 얘기 하지 말라고 자기가 말하던가! 굳이 폐하를 통해서 그런 말 하는 게 너무 얄미워요!”
* * *
“천빈 마마가 장공주 전하께서 고자질한 거라 오해하면 어쩌지?”
장공주의 상궁녀 유월이 걱정스레 하는 말에 치월은 차갑게 코웃음 쳤다.
“무슨 상관이야? 황후 마마도 아니고 그깟 후궁 하나를 우리 전하께서 두려워해야 한단 거야?”
“천빈은 회임을 했잖아. 천빈이 이 일로 마마를 오해해서 사이가 틀어지면 어떡해.”
“회임을 하면 입을 함부로 놀려도 된대? 그리고 천빈이 고궐 개자식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이미 사이는 틀어진 거였어. 고궐 이야기를 알고 있으면서 왜 굳이 전하께 그 얘기를 꺼내냐고.”
유월은 치월이 황제에게 천빈과 고궐 이야기를 꺼낸 게 영 신경 쓰였다.
천빈은 유일하게 회임한 후궁이었다.
황제의 총애는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지만, 천빈이 낳은 아이가 첫째 아이라는 건 절대로 변하지 않을 사실이고.
그런 천빈이 장공주를 미워하게 되면, 지금은 아니어도 나중에 안 좋지 않을까?
후일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여기서 욕을 하고 말았어야 할 일 같은데.
일이 너무 크게 번지는 게 무서웠다.
치월은 그런 동료의 표정을 보고서 콧김을 내뿜었다.
“우리가 안 나서면 공주 전하는 험한 소리를 듣고도 그냥 웃고 넘기셨을 거야. 그런 분이니까. 그러다가 어떻게 됐어? 결국…….”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치월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상처받고 돌아가셨어. 늘 참기만 하고 속내를 안 털어놓으니, 결국 큰 상처는 혼자 감당이 안 되어 돌아가신 거라고.”
“치월아.”
“이번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게 할 거야. 전하는 속상해도 참는 성정이시니, 내가 나서서 지켜드릴 거야.”
* * *
소란스러워 눈을 떠보니 원웅과 부성이 울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다가 옆을 보자, 탕 궁의가 내 손목을 진맥하고 있고.
“무슨 일이야?”
목소리도 잠겼네. 큼큼 목을 가다듬고 있자니, 부성이 훌쩍이며 대답해주었다.
“주무신다고 하셨는데 통 깨질 않으셔서요. 처음엔 늦잠을 주무시는가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일어나시고, 무례를 무릅쓰고 깨워도 깨어나지 않으셔서 어의를 불러왔어요.”
“정말? 나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마마는 계속 기절해 계셨으니까요.”
기절한 줄도 몰랐는데. 오히려 푹 자서인가? 몸이 가뿐하다.
탕 궁의를 보자, 궁의는 신중하게 진맥하던 걸 멈추고는, 내 손목에서 손을 떼고 하얀 천을 도로 회수하며 말했다.
“달리 병은 없으십니다, 마마. 심장이 느리게 뛰지만 이건 예전부터 있던 증세니까요.”
“그런데 왜 마마께서 쓰러지시고 정신을 못 차리시는 거예요?”
원웅이 항의하듯 묻자, 탕 궁의는 쩔쩔매며 의료 도구들을 챙겨 넣었다.
“글쎄요. 회임해서 그러신 게 아닐까요. 어쨌든 몸은 괜찮으십니다. 하지만 식사는 좀 더 잘 챙기시는 게 낫겠습니다, 마마. 기력이 쇠한 걸 보니 식사량이 부족하십니다.”
“자꾸 속이 안 좋아서.”
“그래도 잘 드셔야지요. 뭐든 드시고 싶은 걸 말씀하시고, 드시고 싶은 위주로 드십시오.”
탕 궁의가 나가자 원웅이 배웅하러 나갔고, 부성은 진맥을 하느라 잠시 빼두었던 팔찌를 도로 내게 끼워주었다.
“곧 탕약을 올릴게요, 마마.”
“지금은 몸이 많이 나아졌는데.”
“그래도요. 기운을 보하는 탕약인 데다 태아에게도 아무 문제가 안 되는 약이라니 곧 올릴게요.”
회임이란 게 생각보다 훨씬 힘들구나. 아직 초기인데도 이 정도라니.
아무래도 목표를 바꾸어야겠다. 아이는 하나만 낳아야겠어.
* * *
약효가 시간이 지나서 도는 건가?
멀쩡하던 속은 오히려 약을 먹고 나니 더욱 좋지 않아져서, 나는 다시 침상에 누워 끙끙댔다.
속이 안 좋은 건 팔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과는 다른 방식의 고통이었다.
못 참을 정도는 아니지만, 온몸에 기운이 쭉 빠져서 의욕이 아예 싹 사라지는 듯했다.
결국 보다못한 내 궁인들은 커다란 욕조 안에 따뜻하게 데운 물을 넣고 거기에 심신 안정에 좋다는 이름 복잡한 잎들을 마구 채워 넣어주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마마.”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데.”
“까딱하지 마세요. 들고 갔다 들고 와드릴게요.”
내가 늘어져서 중얼거렸지만, 원웅과 부성은 잠의를 벗긴 다음 목욕할 때 입는 얇은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고, 귀자는 나를 욕조까지 운반해주었다.
어쨌건 효과는 있어서, 따뜻한 물에 목까지 푹 담그고 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괜찮다!”
내가 활짝 웃고서 외치자, 두 궁녀는 내 어깨 위로 물을 찰박찰박 얹어 주었다.
“물장구치지 말고 푹 담그고 계세요, 마마.”
“하지만 넓어서 좋은걸. 게다가 몸이 바로 좋아졌어.”
“벌써요?”
“그럼.”
“우리 때문에 일부러 좋은 척하시는 건……”
“아니야. 정말 가뿐해. 아니면 약효가 이제 도나?”
나는 흐뭇하게 웃고서 몇 번 더 욕조 안을 왔다 갔다 수영하며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좀 쉬기 위해 변두리에 갔을 때는데, 분위기가 어째 좀 이상했다.
원웅과 부성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데, 원웅은 좀 화난 얼굴이고 부성은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왜 그래?”
뭔가 싶어 묻자, 부성은 “아닙니다.” 하고 바로 대답했지만 원웅은 “뭐가 아냐.”라고 톡 쏘고서 무릎을 굽혀 내 귀 부근에 대고 말했다.
“마마. 장공주님이 주신 팔찌가 좀 수상해요.”
“팔찌?”
“네. 마마께서 속이 안 좋다 하신 것도 팔찌를 착용한 이후부터고, 마마께서 속이 괜찮다 하신 것도 팔찌를 잠시 뺐다가 끼었을 때뿐이잖아요. 못 일어나고 계실 때도 진맥하러 팔찌를 빼니까 괜찮아지셨는데. 지금도 목욕하느라 팔찌를 빼고 오니 또 괜찮아지셨어요.”
“……어라.”
처음에는 원웅이 뭐라 하건 ‘말도 안 돼, 무슨 소리야’라고 말하려 했는데. 듣고 보니 좀 그런 것도 같다.
손목을 보았다. 지금 내 손목에는 아무 장신구가 없었다.
수상쩍긴 해서 빈 손목을 보고 있자니, 원웅이 화를 꾹 참으며 말했다.
“몇 시진을 지나도 속이 괜찮으시다면 그 팔찌 때문이 확실해요.”
진짜로 팔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욕을 마친 후에도 내 속은 아주 멀쩡했다.
간만에 식욕도 돌아와서 음식도 가득 먹었고.
멀쩡해진 상태로 잠의로 갈아입고 나자, 원웅은 화가 나서 팔찌를 꺼내다가 거의 깨부술 뻔했다.
“안 돼!”
부성이 몸으로 막지 않았다면 아마 진짜 부쉈을 것이다.
“안 되긴! 장공주가 이런 흉한 물건을 줘서 우리 마마가 계속 편찮으셨는데!”
“그래서 지금 안 끼잖아. 그러면 됐지 뭘 부수고 그래.”
“방에 두는 것도 불길하잖아!”
“부쉈다가 선황제 폐하께서 장공주님한테 하사한 물건을 부쉈다고 혼나면 어쩔 건데?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다고!”
“그건…… 그렇다고 안 좋은 기운이 나오는지도 모르는 걸 여기 두라고? 마마께 악영향이 갈지도 모르는데? 네 말대로라면 버릴 수도 없고 남한테 줄 수도 없잖아.”
그 말을 하면서 원웅이 팔을 휘둘렀는데, 갑자기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콰득’ 하고 우그러지는 소리.
놀라서 바라보니, 팔찌가 원웅의 손안에서 두 동강이 나 있었다.
“!”
부성이 기겁해 쳐다보자, 원웅은 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나 이렇게 힘 안 세!”
* * *
팔찌를 어떻게든 붙여 보기 위해서 궁인들이 모여서 끙끙대고 있으려니, 밖에서 “황제 폐하 납시오!” 하는 오 공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이럴 때 오다니!
나와 궁인들을 서로를 쳐다보다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궁녀들은 황급히 접착용 풀과 작은 붓, 부러진 팔찌 등을 황급히 감추었고, 귀자는 내 앞에 서책을 아무거나 빼서 놓아주었다.
나는 서책을 보는 척 신중하게 종이에 팔을 올렸다.
그 상태로 있자니 곧 문이 열리고서 떡돌이가 들어왔다.
“천빈. 쓰러졌다 들었다.”
잠행을 나갔다가 급히 오기라도 한 건지, 몹시 숨이 차 보였다.
“괜찮으냐?”
“괜찮아. 아주 괜찮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서책을 덮다가, 서책 아래에 팔찌 부스러기가 조금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하고서 서책을 도로 펼쳤다.
“공부 중이었어 공부.”
젠장. 실망한 것처럼 나가 놓고서는 그새 또 오다니. 뭐 어쩌란 건지 모르겠네.
“공부?”
“그럼.”
나는 떡돌이가 그만 돌아가 주길 바라면서, 바빠 죽겠는 척 계속 서책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떡돌이는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지, 내 등을 보듬어주면서 걱정했다.
“몸이 안 좋은데 공부는 무슨. 더 피로하기만 하지. 누워서 쉬거라. 아니면 같이 산책을 하자.”
고개를 저었지만 떡돌이 이놈은 청개구리라도 되나. 싫다는데 굳이 내 서책을 덮어버렸다.
“별로!”
순식간에 손을 뻗어 도로 펼쳤지만, 그 사이에 떡돌이는 팔찌 파편을 봐버린 듯했다.
잠시 주춤하는가 싶던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봤나? 봐서 이러는 거겠지?
비난 어린 시선은 아니었으나 여기서 딱 잡아떼자니 그것도 이상해서, 나는 결국 서책을 탁 덮고서 그에게 반만 거짓말했다.
“내가 힘이 좋아서 부쉈어.”
“돌을?”
“그래.”
떡돌이는 미묘한 표정으로 팔찌 부스러기를 집었다.
“이걸 네가 부쉈다고?”
“그래.”
내가 부순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하는 게 낫겠지.
내가 부수면 어찌어찌 넘어가지겠만, 원웅이 부쉈다고 하면 실수라도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내가 애써 거짓말로 넘기려는데, 뜻밖에도 원웅이 갑자기 떡돌이 앞에 무릎을 꿇더니 몹시 억울하단 얼굴로 외쳤다.
“제가 화나서 휘두르다 부수었습니다, 폐하. 하지만 저 팔찌 때문에 마마께서 몇 번이나 쓰러지셨어요! 저 팔찌는 마마께 좋지 않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