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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92화 (192/283)

##  192화. 난처해진 사람들

떡돌이는 내 귓불을 이로 아프지 않게 잘근거리다가 “응?”하고 되물었다.

“누님?”

“응.”

그의 손을 내 손 안에 품고 조몰락거리면서 고개를 위로 들자, 쭉 뻗은 긴 목덜미가 보였다.

“어떻게 생각해?”

떡돌이는 대답하는 대신 내 귀에서 입을 떼고 되물었다.

“너는?”

“내가 먼저 물었잖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여서.”

맞아. 많지. 그런데 이 말을 떡돌이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진 않아야 할 텐데.

주저했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 생각엔 장공주 전하가 가짜 같아.”

떡돌이는 내 말에 눈썹을 치켜뜨더니,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는 걸 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지. ‘천소여’와는 제대로 대화해 본 적이 없었지만, 누님과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왔으니까.”

“넌 전하가 진짜라 생각한단 거야?”

“그래.”

떡돌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누님은 진짜야.”

“내 생각에는…….”

“반숙이 너는 내 누님과 한 마디도 나눠본 적이 없지 않으냐. ‘천소여’가 입궁했을 때도 누님은 이미 없었고.”

“그건 그런데.”

“한데 왜 가짜라 생각하지?”

다행히 떡돌이는 아직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는다. 아니 ‘다행히’가 아닌지도 몰라.

내 의심을 농담으로 들을 정도면, 정말 한 치도 의심하지 않고 있단 거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공주 전하가 내 궁에 산책하다 들어왔는데.”

“그래. 들었다. 마주쳤다면서.”

“말을 이상하게 하더라고.”

“원래도 장난기가 많은 분이라. 연기도 잘하고.”

“그게…… 결정적인 게 하나 더 있어.”

말해보라는 듯 떡돌이가 나를 따뜻하게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기분 나빠 보이진 않는다. 이걸 듣고서도 저 기분이 그대로일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해야겠지?

“너무 말을 이상하게 하기에 한 번 더 확인하러 공주 전하 처소에 가봤거든. 거기서 실은 누굴 봤어.”

“누구를?”

“네가 싫어하는 사람.”

내 손을 조물거리던 떡돌이의 손이 순감 움찔했다. 그가 내 손을 얼른 놓았다.

“고궐?”

“어.”

“……넌 고궐 얼굴을 본 적 없잖아.”

“공주 전하가 대놓고 고궐이라 부르던걸.”

“!”

“공주 전하, 그러니까 전하 안에 들어간 사람 말이야. 일부러 들어간 건 아닌 거 같았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거든. 절대로 그쪽은 고의가 아니야. 근데 공주 전하 몸을 깨운 건 고궐이 맞아. 둘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

떡돌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때로는 침묵이 더 무서울 때도 있다.

나는 연신 뒤돌아 그의 표정을 살폈으나, 떡돌이는 말과 함께 표정도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고궐 말이야. 네가 무림인일 거라 했잖아. 네 말이 맞아. 나도 아는 얼굴이었어.”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떡돌이가 나를 한결 기운 없어진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누군데?”

“용화노라고. 나만큼 악명을 떨치던 무림인.”

‘나만큼’이란 말은 뺄걸. 짧게 후회하지만 말은 무를 수 없다.

나는 이불을 만지작거리면서 그가 반응하길 기다렸다.

좀 긴 시간이 지난 후. 떡돌이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뭘 염려하는지 알겠다, 반숙아. 하지만 누이는 진짜야.”

“그렇지만 본인 입으로-.”

“난 내 누이를 못 알아볼 만큼 바보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나도 알아봐.”

“…….”

“하지만 고궐에 대해선 알아보마. 그자나 무슨 목적인지. 누님을 이용하려는 건 아닌지.”

그래. 실컷 알아봐라. 몰라. 난 할 수 있는 건 다 말해줬다.

그걸 어디까지 받아들이는진 떡돌이 네 몫이지.

고개를 끄덕이고서 나는 몸을 옆으로 굴려 내 자리로 간 다음 이불을 끌어당겼다.

두꺼운 이불을 이마까지 덮자, 이불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척 뒤돌아 누워버렸다.

나는 심신이 노곤해. 잘 거다. 말 걸지 말라.

* * *

다음날. 떡돌이가 먼저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나는 눈을 감고서 아는 척하지 않았다.

떡돌이가 돌아가고 반 각 정도를 더 침대에 머문 후에야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서 배에 손을 얹었다.

“마마? 괜찮으세요?”

원웅은 세수할 물을 운반해 오다가 그걸 보고는, 세숫물을 탁자에 내려놓고 놀라서 다가왔다.

“배가 아프세요?”

“아니 아픈 건 아니고. 속이 좀 안 좋아. 어제 너무 많이 먹었나.”

아닌 거 같은데.

“탕 궁의를 불러올까요?”

“아니, 괜찮아.”

배가 아픈 것도 아닌데 뭘. 손을 젓자 원웅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말했다.

“회임을 하면 막 입덧도 하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마마.”

“그런가?”

“네.”

구역질이 나오진 않지만, 구역질도 속이 안 좋으니 나오는 거겠지? 그러면 임신 때문에 이런 게 맞나보다.

내가 배에서 손을 떼자, 원웅이 그제야 세숫물 담은 대야를 발치로 가져와 깨끗한 천에 물을 적셔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혹시 모르니 식사는 가볍게 드시는 게 낫겠어요, 마마.”

원웅이 부성에게 말을 전한 건지, 이후 나온 식사는 죽이었다.

막상 식사를 하고 나니 그래도 몸이 좀 괜찮아져서, 나는 근처에 산책도 다녀왔다.

그런데 책이나 읽을까, 싶어서 침상에 기대어 앉자마자 태후 마마가 보낸 궁녀가 찾아와 말했다.

“태후 마마께서 장공주 전하께서 오신 걸 기념하신다고, 식구들이 모두 모이는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십니다, 천빈 마마.”

“그런가.”

“예. 하지만 천빈 마마께선 회임하셨으니, 몸 상태를 여쭙고 상태가 좋지 않으면 쉬라 하셨습니다.”

잠시 배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지금은 속이 괜찮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나도 갈게.”

궁녀가 떠나자 원웅은 바로 걱정부터 했다.

“그냥 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까 속도 안 좋으셨는데.”

“그런데 지금은 멀쩡한걸.”

게다가 떡돌이가 장공주가 자기 누이라고 필사적으로 내 말을 반대해서인가.

장공주 쪽도 한 번 더 보고 싶고…….

* * *

하지만 가마를 타고 금룡궁으로 가는 도중부터 나는 내 결정을 후회했다.

다시 속이 안 좋아진 탓이었다.

“마마, 괜찮으세요?”

괜찮다고 했지만 결국 식사를 하면서도 내내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 팔찌는 선황제 폐하께서 공주에게 준 보물이로군. 공주가 천빈에게 주었느냐?”

태후 마마가 내 팔찌를 알아보고, 장공주와 내가 사이가 좋은 것 같다며 기뻐했지만, 같이 박자를 맞추기도 어려웠다.

결국 식사를 마치자마자 나는 속이 안 좋다 말하고서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역시 궁의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마마?”

“괜찮아. 배가 아픈 건 아닌걸. 구역질도 안 나고.”

그런데 두시진 정도 지나갔을까.

속이 가까스로 좀 편해져서 시원한 공기나 쐴까,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장공주가 나를 찾아왔다.

“아까 보니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이 되어 와 보았네.”

커다란 과일을 한가득 가져온 장공주는 궁녀를 시켜 부성에게 과일 바구니를 전하고는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공주 전하.”

“어의를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속만 좀 안 좋은 거여서요. 회임하면 이런 증세가 있다고들 하고요.”

“그런가.”

장공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폈다.

조금 쉬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걱정되어 온 사람에게 가라고 하긴 뭐해서, 나는 탁자를 가리켰다.

“차 한 잔 마시고 가세요, 전하.”

장공주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실례가 아닐지, 제안을 거절하고 가주는 게 실례가 아닐지 눈에 띄게 주저하다가, 결국 내가 가리킨 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얼른 한 잔만 마시고 가겠네.”

얼른 마시고 간다더니. 장공주는 자리에 앉자마자 부성이 내온 차를 정말 빠른 속도로 마시기 시작했다. 뜨거울 텐데도.

그걸 보고 있자니, 딱 보면 안다고, 장공주는 자기 누이가 확실하다던 떡돌이의 어제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내 차를 한 모금 한 모금 홀짝이며 장공주를 유심히 살폈다.

화려하게 아름다운 얼굴은 떡돌이와 많이 닮아 있었다.

개원이랑 개시시만큼 쏙 닮은 건 아니지만, 누가 봐도 혈연 같아.

문득 장공주 안에 들어 있는 사람에게 고궐에 관해 물어보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궁금해졌다.

가짜 장공주는 고궐의 목적을 알까? 진짜 장공주라면 정색하겠지만 가짜 장공주는 과연……?

떡돌이는 장공주가 진짜라 확신하고 있지만, 역시 나는 이 사람이 자기 입으로 장공주가 아니라고 하는 걸 봐서인가. 가짜 같다.

그리고 그 배후에 고궐이 있단 게 몹시 신경 쓰인다.

떡돌이를 봐봐. 장공주가 본인 입으로 자신이 장공주가 아니라 했다는 데도 내 말을 믿지 않잖아.

고궐이 이런 관계를 이용하려 들면? 그러면 어쩌지?

한 번 더 떠볼까?

하지만 내가 떠봐도 될까? 떡돌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 사람을 장공주라 생각하는데.

내가 떠보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자니, 차 한 잔을 다 마신 장공주가 나를 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가? 내게 할 말이 있는가?”

주저하다가, 딱 한 번만 더 떠보자 싶어 나는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저기, 그런데 공주 전하는요. 고궐과는 어떻게 만난 거예요?”

고궐은 장공주에게 있어서는 발바닥에 박힌 가시이자 역린 같은 존재지.

이 사람이 진짜 장공주라면 뭔가 반응이 클 거다. 가짜라면 별로 없을 거고.

하지만 장공주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녀는 표정이 굳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하게 탁자를 내려다보며 찻잔을 손톱으로 긁을 뿐.

“나는…….”

그러다가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지만.

“이만 가보겠네.”

그건 대답이 아니었다.

장공주는 고궐에 대해 자기 생각을 들려주는 대신,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이 안 좋아 보여 걱정되어 온 건데. 되레 더 방해만 하고 가는 게 아닌가 미안하군.”

장공주가 돌아가자 부성이 찻잔을 치우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놓고 그런 말을 해도 괜찮을까요?”

“뭐 좀 확인한다고.”

“뭐를요?”

“……아니야.”

어쨌든 이젠 여기까지. 당분간은 더 손대지 말아야겠어.

나중에 속이 좀 가라앉으면 고궐, 용화노 쪽을 조사해보든가 해야지.

저절로 배 위에 손이 올라갔다. 사

실 장공주나 고궐 일은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건 아니지. 예전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내 배속에 떡돌이와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있잖아.

고궐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떡돌이에게 해를 끼치려 든다면, 이 아이에게도 피해가 오게 된다.

장공주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떡돌이에게 중요한 일이니 더 나서지 않더라도…… 고궐 쪽은 나도 더 알아봐야겠어.

* * *

저녁이 되자 다시 속이 좋지 않아져서 침상에 드러누워 뒹굴뒹굴하고 있을 때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문밖에서 오 공공의 목소리가 나더니, 떡돌이가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잠옷 차림도 아니었고, 편한 복장을 들고 따라온 태감도 없었다.

“왔어?”

어쨌건 그를 맞이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데, 떡돌이가 손을 저어 원웅과 부성에게 나가라 지시했다.

두 사람이 나가자 떡돌이는 내 곁에 오더니, 침상에 걸터앉으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왜 그래?”

쉬이 말문을 열지 못하는 게 의아해서 묻자, 떡돌이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쁘게 듣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반숙아. 이건 짐이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왔다.”

“뭐가?”

“누님께 고궐 이야기는 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

“누님께 고궐은 네게…… 그자와 같다. 누님을 궁지까지 몰아간 사람이고, 누님은 물론 우리 온 식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다.”

“…….”

“네가 짐을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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