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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90화 (190/283)

##  190화. 때로는 무거운 진실

치솟는 불만은 삼켰다. 목소리를 여러 번 들려주는 건, 복면 차림을 한 사람에겐 좋지 못한 행동이니까.

그때. 이번에는 뒤에서 장공주가, 정확히는 장공주 몸에 들어간 누군가가 용화노를 불렀다.

“아는 사람이에요, 고궐?”

‘고궐’이라고.

세상에. 깜짝이야. 용화노가 고궐이었다고?

나와 함께 무림 사적에 이름을 올린 악명 넘치는 무림인 용화노가 고궐이라고?

맙소사. 용화노와 고궐 사이의 공통점이라곤 악명 넘치는 것뿐인데?

아니…… 분명 떡돌이가 고궐이 무림인일 거라 하긴 했어. 전혀 안 잡히는 걸 보면 무림인이 틀림없다고.

세상에. 생각해보니 공통점이 여러 개잖아.

무림인이고, 악명 넘치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궐이 용화노였다니.

“쥐새끼 같군.”

차분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나는 계속 용화노와 싸우는 중이다.

그리고 용화노는 내가 자기 검을 쏙쏙 피하는 게 싫은 모양이지.

내가 그와 세 번 붙어 세 번 다 이긴 천년비란 걸 알게 된다면, 자존심이 좀 덜 상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

어쨌든…….

벽 너머 태감들의 인기척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그를 걷어차고 담벼락 위로 뛰어 바로 달아났다.

용화노는 장공주가 신경 쓰여서인지, 잠시 쫓아오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어 섰다.

돌아보니 그가 죽일 듯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웃으면서 손가락 욕을 해준 다음, 나는 얼른 내 처소로 돌아갔다.

어쨌든 성과가 있었네. 장공주는 가짜였어. 나 같은.

* * *

침입자를 쫓는가 싶던 고궐이 돌아오자, 우두커니 서 있던 장공주가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가며 물었다.

“방금 뭐였어요? 괜찮은 거예요?”

장공주가 초조하게 그의 팔을 붙잡자 고궐은 움찔하다가, 슬그머니 그 손에서 옷을 빼냈다.

마치 닿아선 안 될 게 닿은 것처럼.

“내가 혹시 말실수를 한 거예요?”

그녀가 걱정스레 묻는 목소리에 고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장공주는 자신의 두 손을 모아 쥐고서 가냘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익숙하면서도 낯선 눈길에 고궐은 마음이 아릿해졌다.

장공주는 다시 걱정스레 물었다.

“저기. 우리, 여기 꼭 있어야 하는 거예요? 난 정말 장공주란 사람이 아닌데. 여기서 이러고 있으려니 너무 무서워요.”

“공주님은 공주님이십니다. 여긴 공주님의 집이고, 태후마마는 공주님의 친모이십니다. 폐하는 공주님과 동복형제이니, 공주님은 손꼽히게 귀한 분이십니다. 당당하게 계세요.”

그래도 장공주의 표정에선 조금도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난 장공주가 아니라니까……. 그거야 그렇다 쳐도. 그쪽이 장공주를 다시 부활시킨 거라면 목적이 있을 거 아니에요. 혹시 날 이용해서 뭔가를 하려는 거예요?”

“아닙니다.”

“정말, 정말 이렇게 있기만 하면 된다고요?”

“네. 그냥 이렇게. 잃었던 시간만큼 행복하게. 이렇게 지내시면 됩니다.”

봄기운이 거의 다 빠진 달빛 아래에서 고궐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장공주는 긴장했던 어깨를 떨어뜨리고서 중얼거렸다.

“아니, 난 장공주가 아니라니까……. 공주 행세하다 걸리는 거 아니냐고요.”

* * *

사실 먼저 후궁 몸을 차지하고 살고 있는 입장인지라, 장공주에 대해 떡돌이에게 말하는 게 나을지 아닐지 좀 고민을 하긴 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제일 혼란스러운 건 장공주 몸에 들어간 본인일 테고.

그런데 고궐, 용화노를 보고 나니 말하는 게 낫겠다 싶다.

고궐이라면 떡돌이가 미워하다 못해 이를 박박 가는 새끼 아니던가. 장공주의 뒤통수를 치고 간 놈.

그런데 장공주를 부활시킨 게 그놈이라고? 분명 꿍꿍이가 있다. 없을 리가 없어.

떡돌이에게 얘기하고서 잘 대처하라 해야겠다.

그러면서 장공주 몸속에 들어가게 된 사람 입장에서도 좀 변호를 해주면 되겠지.

그 사람은 그냥 자기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니, 그런 건 염두에 두어 대처하라고.

“마마, 괜찮으세요?”

“응? 왜 그래?”

“계속 주먹을 쥐셔서…….”

“아아. 별거 아니다. 그냥 생각을 좀 하느라.”

“폐하께 화가 나서 그러시는 거죠?”

“아니라니까.”

자꾸 내 모든 행동을 떡돌이랑 연결 지어 해석하는 원웅을 달래느라 진이 빠져서, 어떻게 잔 건 줄도 모르고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식사를 한 다음 떡돌이에게 직접 찾아가기 위해,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하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그런데 막 식사를 하려고 할 때, 오 공공이 찾아오더니 내게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마마. 폐하께옵서, 점심때 마마와 식사하고 싶으니 심궁으로 오라 하십니다. 소인이 와서 다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원웅은 그 말 한마디에 뾰족했던 표정이 바로 풀어졌다.

오 공공이 돌아가자, 부성은 그런 원웅을 놀렸고, 원웅은 민망해하며 말했다.

“하지만 폐하께는 장공주님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동복 누이잖아. 심지어 슬프게 돌아가셔서 마음에 완전히 박혀버린 누이. 두 분이 따로 산 후라면 모를까, 늘 곁에 있다가 돌아가셨고.”

원웅은 말을 하다 잠시 내 눈치를 보았지만 빠르게 마저 말했다.

“죽은 사람은 못 이긴다고, 죽은 줄 알았던 누이가 돌아왔으니 폐하도 한동안 장공주님만 챙기실 것 같았는걸. 마마께선 회임 초기라 아주 조심해야 하는데, 폐하께서 장공주님만 살피느라 여기에 소홀해진 틈을 나쁜 사람이 노리면 어떡해.”

부성도 원웅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더 놀리지 못하고 괜히 눈시울을 붉혔다.

울 정도는 아닌 거 같지만.

어쨌든 원웅이 기분이 풀린 거 같으니 다행이야. 하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진 않지만.

* * *

점심시간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 아침 식사를 한 후에 산책하면서 찌뿌둥한 몸을 풀려 했는데.

원웅은 떡돌이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면서, 식사를 마치자마자 나를 치장해주기 시작했다.

회임했기 때문에 무거운 장신구를 하거나 몸을 꽉 조이진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평소보다는 좀 더 공을 들인 티가 났다.

선녀 옷은 아니지만 선녀 잠옷 정도는 될 정도로.

이후에는 머리를 잘 매만진 다음, 가마를 타고 오 공공의 안내를 받아 심궁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집무실 너머로 가는가 싶더니, 오 공공이 안내해 준 곳은 처음 와 보는 넓은 방이었다.

방 가운데에는 길쭉한 식탁이 벽 모서리 당 하나씩 해서 세 개가 놓여 있었는데, 떡돌이는 이미 상석에 와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

“장공주님이십니다, 마마.”

장공주가 있었다.

이건 또 뜻밖인지라 잠시 우두커니 있자니, 떡돌이가 장공주가 나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구면이로군.”

힐긋 떡돌이를 보자, 그가 면사를 벗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장공주 앞에서는 굳이 면사를 쓸 필요가 없단 거구나.

떡돌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가 회임한 걸 알게 되었을 때만큼 활짝 웃으면서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앉거라, 반숙아.”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마.”

오 공공의 부축을 받아 빈자리에 가서 앉자, 곧 궁녀들이 들어와 탁상에 음식을 한가득 차려놓고 갔다.

그들이 물러나자 떡돌이는 “반숙아. 천빈.” 하고 나를 다정하게 부르더니, 한 손을 장공주 쪽을 향해 뻗으며 말했다.

“네게는 꼭 누이를 소개해주고 싶었다. 화연 누이다. 누이, 내가 어제 내내 말했던 천빈입니다.”

그 말에 어정쩡하게 다시 장공주를 보자, 장공주는 빙그레 웃더니 술이 들었으리라 예상되는 작은 잔을 한 손으로 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어제 종일 천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네. 만나서 반갑군.”

인사를 한 그녀는 술을 한 번에 털어놓더니, 시원스레 탁상에 내려놓았다.

떡돌이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물었다.

“한데 누이, 구면이라니 무슨 소리입니까? 천빈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제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다가, 못 보던 궁이 있길래 들어가 보았습니다. 거기서 천빈을 보았지요.”

장공주는 자신이 어제 한 말실수를 들킬까 봐 염려되지도 않는지 아주 태연하게 굴었다.

어젯밤에 고궐과 대화하는 걸 듣지 않았더라면, 어제 낮에 본 일조차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게 될 정도로.

나는 다시 떡돌이를 보았다.

떡돌이는 여전히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천빈은 지금 회임 중입니다, 누이. 원래 천빈은 산책을 아주 좋아하는데, 만일을 대비해서 요즘은 비연궁 안에서만 산책하고 있지요.”

장공주는 놀란 듯 내게 축하한다고 말했고, 떡돌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천빈이 회임하자마자 누이가 돌아오다니. 좋은 일이 연달아 벌어져 너무 좋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조카를 보게 된다니. 좋구나. 내 기억엔 아직 너도 어린아이인데, 네게 벌써 아이가 생기다니…….”

잠시 슬픈 듯 중얼거린 장공주는, 곧 고개를 젓더니 다시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환한 햇살처럼 웃으면서 물었다.

“어젯밤 폐하께서 그러셨네. 천빈은 폐하가 정말, 정말로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폐하가 천빈이 좋다면 나도 천빈이 좋다네.”

“감사합니다?”

“나도 천빈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가지고 싶은 게 없는가?”

줄 수 있는 건 이미 떡돌이가 다 줘서…….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장공주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곧 자신의 팔에서 팔찌를 빼냈다.

커다란 보석이 주렁주렁 박힌 것이, 딱 보기에도 ‘나는 비싸다. 나를 모셔라’라고 주장하는 듯한 팔찌였다.

장공주는 직접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직접 내 손에 팔찌를 끼워 주고서 손을 꼭 잡고서 슬프게 웃었다.

“나 때문에 폐하께서 많이 울었다 들었네. 당시에 나는 내가 아파서…… 나보다 어린 월요를 보듬지 못했어. 못난 누이이지만, 그래도 지금 행복해진 모습을 보아서 좋네. 이건 전부 다 천빈, 그대 덕이겠지.”

……이상해. 분명 본인 입으로 가짜라고 했는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꼭 진짜 같다. 저 슬픈 눈동자라니…….

하긴. 그러니 장공주와 동복 남매인 떡돌이도 진짜라고 믿고 있는 거겠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에 잠시 팔찌를 멍하게 보고 있자니, 떡돌이가 놀라워하는 목소리로 장공주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이. 그 팔찌는 부황께서 누이께 선물한 거 아닙니까?”

장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웬만한 독은 그걸로 막아 준다고 들었네. 어릴 때 한 번 독살당할 뻔한 적이 있는데, 그때 부황께서 내게 주셨지. 하지만 이제 와 누가 나를 독살하려 하겠나. 지금은 나보다 천빈에게 더 필요할 거야.”

힐긋 떡돌이를 보자, 떡돌이가 나를 보면서 그거 진짜 좋은 거니까 얼른 챙기라고 눈짓했다.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장공주에게 감사 인사를 하자, 그녀는 맑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얼른 드시게. 나 때문에 못 먹고 있잖나.”

그리고 식사하는 내내, 떡돌이와 장공주는 열심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장공주는 내게도 조심스레 말을 걸었지만, 나는 마음이 복잡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깨작깨작 밥을 먹으면서 장공주와 떡돌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를 어쩐다. 떡돌이는…… 아무래도 장공주가 진짜라고 믿는 모양인데.

* * *

식사가 끝난 뒤, 나는 속이 좋지 않다고 둘러대고서 먼저 처소로 돌아왔다.

실제로도 속이 조금 안 좋긴 했지만, 그보다는 떡돌이가 장공주에게 보내는 애정이 너무 커 보여서 곤혹스러웠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장공주가 가짜라고, 심지어 장공주를 부활시켜 여기 데려온 게 고궐이라고 말하면…… 젠장. 어떻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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