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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89화 (189/283)

##  189화. 장공주

“비원?”

놀라서 이름을 부르자 그가 목소리를 죽여서 항의했다.

“왜 다짜고짜 때리십니까!”

하지만 염 귀인 사건 이후 비원을 아니꼽게 보던 중이라, 좋은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안 죽이고 때린 데 감사해라. 뒤에서 살금살금 따라오길래 암살자인 줄 알았다.”

비원은 자기 어깨를 문지르다가 슬쩍 옷을 들쳐 피부를 보더니 탄식했다.

“아…… 멍. 아. 진짜.”

“아파?”

“안 아프겠습니까? 그 무식한 힘으로 때렸는데요?”

“무식?”

“강한 힘이요.”

더 말을 주고받으려는데, 태감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비원을 골목길 안쪽으로 끌어당긴 다음 태감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여긴 왜 왔어?”

“장공주 일로 왔습니다.”

뭐야. 그러면 와도 된다.

“나도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장공주도 타천천이 살렸어?”

“제가 알기론 아닐걸요.”

“네가 알기론? 맞을 수도 있단 거야?”

“혼령술은 제가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니 혼령술에 대한 건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런가. 어쨌든, 장공주가 맞아?”

“제가 엮인 일이 아니니 저도 모르지요.”

이놈은 죄다 모른대. 아는 게 뭐야?

“그럼 왜 왔는데?”

“말씀드렸잖아요. 장공주님 일로 왔다고.”

“아는 거 없다며.”

“그래도 혹시나 해서 와 봤습니다.”

도움이라고는 조금도 안 되는구나.

아는 것도 없는데 혹시나 싶은 마음은 왜 가지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 현상이나 내 몸에 대해 물어볼 만한 건 타천천뿐이란 거 아닌가.

“타천천은 지금 어디 있어?”

“원래는 본타에 있었는데, 요즘은 여기저기 이동하셔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 아는 게 뭐야?”

안 그래도 염 귀인 건 때문에 얼굴을 보면 화가 나는데.

아까부터 자꾸 모른단 소리만 해대자 어이가 없다.

나는 발끈해서 물었지만, 비원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 아는 게 없어도 지내는 데 문제없다 이거구나.

“장공주 얼굴은 봤어? 어떻게 행동하던데?”

“저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듣기론 그냥 장공주님처럼 행동한답니다. 그건 왜 묻습니까?”

“나처럼 다른 몸에 들어온 거라면 막막해서 어설프게 실수할 거잖아. 그런데 침착하다니. 진짜 장공주인가.”

비원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돌아섰다.

“전 모르겠습니다.”

저놈이 모르겠다고 말한 게 몇 번이지? 세어 둘 걸 그랬다.

“어쨌든 멀쩡한 걸 봤으니 됐습니다.”

그러고서 가려는 그를, 이번에는 내가 붙잡았다.

“잠깐. 타천천이랑 연락 닿으면 좀 만나자고 전해줘.”

약속을 지킬지는 모르겠지만 비원은 그러겠다며 돌아갔다.

순식간에 그의 등장으로 소란스러워졌던 정신머리가 다시 가라앉았다.

천천히 처소로 돌아와 넓은 평상에 앉자, 다시 한번 심각해졌다.

‘장공주가 살아 돌아온 일…… 나와는 관련 없겠지?’

* * *

지금까지는 천소여 가족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떡돌이가 살아 돌아온 장공주를 두고서 ‘진짜 누이’일지 가짜일지에 대해 고민하는 걸 보니.

여러모로 생각이 깊어진다.

천소여 가족들도 지금 이 몸을 차지한 게 자기들 식구가 아니란 걸 알면 여러모로 싫어하겠지?

거기에 내 의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그 식구들에겐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중요한 건 남이란 거니까.

날이 밝았지만 어제 떡돌이의 위태로운 모습이 머리에 남아서인가, 내내 이런 생각이 들어서 결국 비연궁 가장 멀리로 산책하러 나갔다.

초여름이라지만 날씨도 선선하니 좀 신선한 공기를 맡으면서 머리에 안정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잘 가다 보니 또 바스락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비연궁 안에는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그런데 산책로에서 소리가 난다는 건…….

비원이겠지. 아는 것도 없는 그와 더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살기를 섞어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쫓아다니지 말고 그냥 나와. 어차피 걸릴 거.”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비원이 수풀 더미에서 나와 이런저런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대신 누군가 나오기는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누구지?’

생판 처음 보는 얼굴에 멀뚱히 쳐다보다가, 나는 떨떠름해서 물었다.

“누구세요?”

그 사람은 덩달아 나를 보다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나오라길래. 쫓아다닌 건 절대 아니에요.”

눈썹을 찌푸리고 눈에 힘을 줘서 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럼 몰래 들어온 비원이 아니면 누구지? 옷차림을 보니 궁녀……는 아닌데. 태감도 아니고.

잠시 ‘장공주?’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 의심은 저 여자가 허리 숙여 인사했었단 걸 떠올리자 싹 사라졌다.

그래, 장공주는 아닐 거야. 살기에 놀랐다고 해도 바로 허리가 숙여질 리가 있나.

그럼 누굴까?

“진짜 누구세요?”

영 짐작이 가지 않아서,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여자는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두 손을 모으고서 대답했다.

“저는 장공주라고 합니다. 이름은 아마 화연…….”

그 대답에 놀라려는 찰나. 여자는 갑자기 허리를 세우더니 정색하며 말투를 바꿨다.

“장공주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 돌변한 태도에 더욱 놀라 빤히 쳐다보자, 여자는 처음엔 눈싸움이라도 하듯 같이 보았지만 나중에는 표정이 점점 무너지다가, 결국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더니, 내가 자신을 장공주라 칭하는 여자의 주장에 반응하기도 전.

이번에는 나이 많아 보이는 궁녀들이 내 궁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황급히 가까이로 다가왔다.

태후 마마를 뵈러 갔을 때 얼핏 보았던 얼굴들이었는데, 그들은 우르르 내 앞까지 다가와서는 앞다투어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천빈 마마.”

“이분은 장공주 전하이십니다. 산책하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이곳에 오실 줄 몰랐습니다.”

장공주의 궁녀라는 이들은 내가 다른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구역에 침입한 장공주에게 화를 낼까 봐 염려되는지, 아직도 멍하게 선 장공주를 대신해 변명했다.

그러고는 장공주에게 얼른 돌아가시자고 설득하는데…….

저 여자가 장공주가 맞구나.

무슨 수로 몸을 회복시켰는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돌아가자는 말에 장공주는 얼른 그들을 따라갔고, 나는 먼발치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저 사람, 장공주 아닌 거 같은데?’

* * *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쩍단 말이지.

곰곰이 생각보다가, 나는 일단 떡돌이와 이 문제를 토론해보기로 했다.

떡돌이 가족이니까 말해보는 게 좋을 거야.

그런데 저녁때까지 떡돌이를 기다렸지만, 떡돌이는 장공주, 태후 마마와 식사 한다고 올 수 없단 소식을 전해왔다.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귀자는 조금 불쾌한 듯 인상을 내내 쓰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밤에 만나서 얘기하면 되지.

그러나 밤이 되자, 이번에는 오 공공이 찾아와서 말을 전했다.

“마마. 폐하께서 장공주님과 대화를 하고 싶으시다고, 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시라 하셨습니다.”

오 공공은 그러고서 물러났지만. 원웅은 오 공공이 가자마자 분을 토했다.

“장공주인지 뭔지 진짜 짜증 나요. 마마께선 회임하셨다고요! 지금 폐하께선 마마를 금처럼 옥처럼 대해주셔야 하는데, 이게 뭐래요?”

“쉿.”

부성이 입가에 손을 대고 말렸지만, 원웅은 멈추지 않았다.

“맞는 말이잖아. 장공주가 나타나기 전엔 마마를 살뜰하게 챙겨주시더니. 장공주가 오고 나니 제대로 보러 오지도 않으셔.”

“딱 이틀 그랬어. 내일은 오시겠지.”

부성이 그렇게 위로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원웅이 골이 나서 세숫물을 들고 나가자, 부성은 맞은편에 앉아 머리를 풀고 빗질을 해주며 달래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마. 워낙 사이좋은 오누이셔서, 지금은 좀 혼란스러워서 그러시는 거예요.”

전혀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아무리 봐도 장공주란 여자 몸 속에 든 게 장공주가 아닌 것 같을 뿐.

장공주인 척 흉내를 내고는 있는데, 얼핏얼핏 나오는 게 장공주가 아니었어.

살기 섞어서 나오라고 하니까 나와서 허리 숙여 인사하는 거나, 자기소개를 이상하게 하다가 갑자기 정색하는 거나, 궁녀들이 좀 더듬거리면서 내게 인사시키는 거나 전부다.

뭔가 있어. 분명 알맹이가 달라. 경험자라 확신이 간다.

* * *

아무리 떡돌이가 장공주가 찾아와 기쁘다고 해도 밤새 곁에 있진 않겠지.

“폐하께서는 주무시러 들어가셨다 합니다.”

그날 밤. 나는 귀자에게 말을 전달받자마자 얼른 야행복으로 갈아입고서 밖으로 나갔다.

나 말고 영혼이 바뀐 사람은 처음 보는 거라, 그녀를 한 번 더 살펴보고 싶었다.

“회임하셨는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실까요?”

“괜찮아. 확인 안 하면 신경 쓰여서 머리에 무리가 가.”

귀자는 내가 담을 타고 이동하는 게 걱정되는 듯했지만, 아직은 배가 나온 것도 아니라 움직이는 데 별 지장은 없었다.

“괜찮아. 망만 잘 봐.”

나는 걱정하는 귀자에게 당부하고서, 얼른 비연궁을 빠져나가 장공주가 머물고 있다는 금룡궁으로 가보았다.

낮에 놀러 온 촉비에게 듣자 하니 장공주 곁에는, 살아 있을 적 곁에 있던 궁녀들이 다시 가 있댔지.

그들이 보필하고 있는 데다 태후의 궁에서 같이 지내고 있다 했어.

그쪽으로 가면 볼 수 있을 거야.

회임한 뒤 며칠 무공 훈련을 놓긴 했지만, 전에 먹은 영약은 내공으로 잘 흡수한 상태라 경공을 쓰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금룡궁 안에 들어간 다음, 시위들 숫자를 보고서 장공주의 방을 추정해 이동했다.

그런데 장공주가 머무는 전각 근처에 가보니, 명당자리에 이미 선객이 와서 전각을 보고 있지 뭔가.

일부러 그 곁으로 가지 않고 거리를 두고 서서 보니, 그자는 야행을 하면서 얼굴도 제대로 가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몸을 숨긴 탓에 어두워서 이목구비는 잘 보이지 않지만, 어쩐지 좀 슬퍼 보였다.

‘누구지?’

그러다 그 사람이 갑자기 전각으로 이동하길래 나도 일단 따라가 보았다.

최대한 인기척을 죽여서 따라가 보니, 그 남자는 장공주가 머무는 전각 마당으로 가고 있었다.

담벼락 나무 아래에 모습 감춘 채 살펴보자, 놀랍게도 마당에는 장공주가 혼자 나와 있었는데, 남자는 마당에 있는 게 장공주뿐이자 더 숨지 않고 그쪽으로 들어갔다.

장공주 역시 배회하다가 남자를 보자 황급히 달려가 외쳤다.

“왜 이제야 왔어요?”

말하는 걸 보니 남자와 아는 사이 같았다.

남자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그러나 사과는 안중에도 없단 듯이 장공주는 겁먹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계속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왜 자꾸 다른 데 가는 거예요? 난 그쪽밖에 모르는데, 그쪽이 날 여기 두고 다니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편안히 계시면 됩니다. ……이곳은 공주님의 집입니다.”

그 말에 장공주는 한숨을 내뱉으며 아주 작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장공주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쪽은 알잖아요.”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내가 듣는 데 아무 무리 없을 정도였다.

그보다…… 이게 무슨 소리야? 장공주가 아닌 건 짐작했지만, 뒷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쪽은 알잖아요’라니?

그럼 저 남자가 장공주 시신을 부활시킨 사람이야? 타천천이 아니라고?

너무 놀라서 작게 소리가 난 걸까.

내내 장공주와 대화하던 남자가, 찰나의 기척을 잡아냈는지 바로 이쪽을 쳐다보며 “누구냐.” 하고 물었다.

평소라면 떠났을 텐데.

하필 뒤쪽에 순찰하는 태감들이 지나고 있어서 나는 바로 자리를 비키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남자는 계속 다가오고 있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단도를 꺼냈고 남자도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느라 드디어 남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아는 얼굴이었다.

“용화노?”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 아는 얼굴이다.

저자도 무림 사적 중 하나니까. 하찮은 접점이 두어 번 있었지.

아니, 그런데 왜 그자가 여기에?

하지만 상대는 내가 자기를 알아볼 줄 몰랐던지, 이름이 불리자마자 표정이 더욱 굳어 눈이 흉흉해졌다.

아니 그럼 복면을 쓰고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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