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행복할수록 걱정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 목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궁인들이 동시에 무릎을 굽혔다.
고개를 돌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길고 커다란 팔이 내 등과 허리를 감싸 안았다.
“들어가자.”
아이구 세상에.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무림악적 천년비가 사람들 앞에서 남사스럽게 황제에게 안겨서 걸어 다니게 될 거라고?
평생 나는 애정을 주고받는 사람 없이 살 거라 저주를 퍼붓던 이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떡돌이의 손을 보여주고서 자랑하고 싶다.
“반숙아. 혼자 우두커니 서서 그렇게 웃으면 사람이 이상해 보인다.”
떡돌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여준 후에야 나는 얼른 내 방으로 걸어갔다.
방 안에 들어가자 떡돌이는 내가 의자에 앉게 조심조심 도와주었다.
내가 실을 뭉쳐 만든 사람이어서, 조금만 잘못해도 스르륵 무너질 것처럼.
하지만 나는 회임을 했으니까 좀 조심하는 게 좋겠지! 나는 강하지만 내 아기는 아직 근육도 제대로 없을 테니까.
나도 온 정성을 다해서 아주 조심조심 느리게 의자에 앉았다.
떡돌이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고개를 기웃하다가, 내가 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웃으며 말했다.
“피가 섞인 아기를 만들 거라고 그렇게 말해대더니. 드디어 만들었군.”
“들었어?”
“탕 궁의가 바로 짐에게 전해 주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내 배를 다시 보고 있자니, 떡돌이는 뭔가를 떠올리고서 픽 웃으며 말했다.
“다들 난리가 났지. 어전에서 들었거든.”
“정말?”
“그래. 모후께서도 듣고 많이 놀라셨다. 바로 오고 싶어하셨지.”
“같이 오지 그랬어.”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려들면 네가 피로할 거라고, 내일이나 모레쯤에 상황을 보고 오신다더라.”
태후 마마는 나한테 올 때 분명 맛있는 간식을 가져오실 거다.
내가 문안을 갈 때도 늘 주던 그 간식. 태후 마마의 숙수만 만들 수 있는 간식.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떡돌이를 보니, 떡돌이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왜 그래?”
그 표정이 심란해 보여서 묻자, 떡돌이는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처음이라. 기쁜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해?”
“먹을 거라던가. 입는 거라던가. 하면 안 되는 거라던가 조심해야 하는 거라던가.”
“그런 게 있어?”
“있지.”
떡돌이는 초조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마른세수를 하고서 파리처럼 손바닥을 비볐다.
한참을 그러더니 떡돌이는 결국 머리를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넌 황제잖아. 온 귀인 땐 뭘 어떻게 했는데?”
떡돌이는 입만 뻐끔거리다 털어놓았다.
“‘잘 챙겨라’라고 지시했다.”
“나한테도 그러면 되잖아.”
“네 남편은 짐인데, 짐이 짐의 아내를 두고 ‘잘 챙겨라’ 한마디만 하고 손을 뗄 수는 없지 않으냐.”
떡돌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를 초조하게 바라보다 말했다.
“옷. 그래. 옷부터 바꾸자.”
“옷을 왜?”
“전부 다 운문비단으로 만드는 게 낫겠다. 잠옷 말고 일상복들도.”
“비단이 남아 있긴 해?”
“구해봐야지.”
떡돌이는 다시 나를 또 빤히 보다가 말했다.
“수련은 좀 줄이자.”
“뭐? 안 돼!”
“의자에 앉을 때도 그리 주춤주춤 앉으면서. 게다가 너는 수련도 아주 거칠게 하지 않느냐.”
“하지만 수련을 덜 하면 다시 몸이 약해질 텐데!”
“몇 개월 수련하지 않는다고 약해지진 않아.”
내가 항의하려 하자, 떡돌이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알았다. 그럼 이건 어의에게 물어보자. 어느 정도 선까지 훈련이 가능한지.”
“알았어.”
“어의에게 먹으면 안 될 음식과 먹어야 할 음식도 알려달라 해야겠고…….”
그런 식으로 말을 주고받다 보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니, 대체 해야 할 게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제약은 또 뭐 이렇게 많고?
기가 막혀서 탁자를 탕탕 두드리는데, 내 손 아래로 떡돌이의 손이 들어왔다.
얼결에 떡돌이를 찰싹찰싹 두드리게 되어서 보자, 그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내 생각인데, 반숙아. 딱딱한 물건을 두드리면 몸에 타격이 갈 것 같다.”
“그럼 난 뭘 때려?”
“보통 사람들은 아무것도 때리지 않고 살아가지.”
“말도 안 돼! 그럼 내가 갑갑하잖아!”
“짐이 솜을 넣어서 네가 두드릴 수 있는 커다란 인형을 만들어주마. 뭘 두드리고 싶거든 그걸 두드리거라. 어때?”
세상에. 무림악적 천년비 무림영웅 천반숙이 솜인형을 두드리고 있으란 말인가! 이건 마마가 할 일이 아닌데!
하지만…… 진짜로 단단한 물건을 두드리면 아기에게 해가 될까?
“지금 아기 크기는 어느 정도야, 떡돌아?”
떡돌이는 옆으로 건너와 내 배를 유심히 살피면서 이리저리 재어 보더니, 손가락을 아주 조금 내밀었다.
“네 배가 어제보다 이 정도 부푼 것 같다. 그러니 이 정도 크기가 아닐까?”
“아기가 어제 생기진 않았을 건데 말이 돼?”
“하지만…….”
“지금 나온 배는 문안 때 먹은 찹쌀떡이야. 아이가 아니라.”
내가 단호하게 부정하게 떡돌이는 손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아주 작지 않을까? 탕 궁의 말로는 아직 초기라 하던데. 한데 그건 왜 묻는 게냐?”
“탁자도 못 두드리게 하니까, 크기를 짐작해 보는 거지.”
나는 양손을 어깨너비 정도로 벌렸다.
“이 정도로 커다래지면 마음 놓아도 될까?”
떡돌이는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크면 괜찮을 것 같다.”
이에 안심해서 떡돌이와 마주 보고 웃고 있자니, 따뜻한 차를 가져온 오 공공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알려주었다.
“폐하. 마마. 그렇게 커다래졌을 즈음이면 아기씨는 복중에 계시지 않을 겁니다.”
“어? 그럼 어디 있는가?”
오 공공은 미묘한 시선으로 나를 보다가 눈을 내리깔고 알려주었다.
“예쁜 포대기에 안겨 계시겠지요.”
아! 그렇구나.
“난 아기를 본 적이 없어 몰랐네.”
하지만 떡돌이는 봤을 거 같은데? 휙 고개를 돌려 떡돌이를 보자, 떡돌이가 얌체같이 혼자 영리한 척 말했다.
“짐은 알고 있었다.”
* * *
며칠에 걸려서 내 비연궁은 몹시 바빴다.
아, 비연궁은 내 이름 천년비에서 ‘비’를, 떡돌이가 인연에서 ‘연’을 가져와서 지은 이름이다.
하여튼 바빴다.
떡돌이는 본인이 한 말처럼 운문비단을 여기저기서 구해다가 내게 주었고, 내무부 관리들은 그걸로 내가 입을 일상복을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봄이 다 끝나가고 날씨가 더워지고 있어서 되도록 시원하게 만들었다.
추울 때 입을 옷은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나중에 새로이 운문비단이 구해지면 그때 만들기로 했다.
이불도 좀 더 부드럽고 보송한 것으로 바꾸었고, 내 의자 방석 역시도 모두 푹신하게 바꾸었다.
혹시 독이 섞여 나올까 봐 식사 시간에는 늘 궁의가 따라 들어와 은침으로 음식을 다 확인하는 건 물론, 몸을 건강하게 해준다는 약재는 아예 은그릇에 넣어 나왔다.
무리하면 안 된다는 명령에 따라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는 문안과 훈련 역시도 모두 접기로 했다.
대신 느릿느릿 거북이 같은 산책은 해도 된다고 해서, 나는 심심할 때마다 밖으로 나가 후원을 돌아다녔다.
그건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무슨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대하고 있었다.
동시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모님이 생각났다.
내 어머니도 날 가졌을 때 이렇게 했을까?
내 아버지는 내 어머니를 이렇게 보살펴주었을까?
어쨌든 내가 회임을 하면서 덕을 보게 된 건 개씨 집안도 포함이었다.
최대한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이야기만 들으라는 조언에 따르느라, 당분간은 복수를 미루게 생겼으니까.
문제는…….
* * *
“반숙아?”
내가 편하게 침상에 앉아 팔을 괴고 있자니, 맞은편에서 시를 읽어 주던 떡돌이가 책을 내리고서 불렀다.
“졸리느냐? 그만 자겠느냐?”
나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가, 그 말을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 듣고 있었어. 물이 맑다면서. 새도 나오고 그랬잖아.”
떡돌이는 자기가 든 서책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웃으면서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한데 무슨 생각을 하기에 눈동자가 사방으로 움직이느냐?”
“내 눈이 그랬어?”
“쉴 새 없이 움직이던데. 눈 뜨고 꿈꾸는 줄 알았다.”
“그냥. 생각 좀 하느라.”
“생각?”
“응.”
떡돌이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려주길 원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내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자니, 서책을 덮어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데? 고민이 있으면 짐에게도 말하거라. 같이 의논하면 좋지.”
잠시 고민이 들었다.
내가 방금 전까지 하던 생각은 내 몸이 계속 무사히 이 몸으로 있을 수 있을까, 이거였다.
하지만 떡돌이에게 이 말을 하고 나면 떡돌이도 뚜렷한 해결책 없이 불안해지기만 할 것 같아서…….
“반숙아.”
내가 주저하자 떡돌이가 손을 뻗더니 내 발목과 발바닥을 주물러주며 불렀다.
이건 요즘 들어 내 발이 계속 부어서, 그가 시시때때로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비밀도 나눈 사이인데. 이제 더 못 할 말이 무엇이라고.”
그런가.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아서, 나는 회임을 하자마자 시작된 고민에 대해 털어놓았다.
“전에 우리끼리 한 말 기억나? 내 영혼이 갑자기 다른 데 들어가면 어떻게 하냐는 말.”
여기까지 말했을 뿐인데. 떡돌이는 바로 알아듣고서 얼굴이 굳었다.
그는 내 발을 주무르길 멈추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앉았다.
“혹시 전조 증상이라도 나오고 있느냐?”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회임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게 불안해서.”
“…….”
“전에는 나 혼자 거북이가 되면 그냥 혼자 거북이가 되는 거라 생각했거든. 떡돌이 네가 날 발견하고서 잘 키워줘야 하겠지만. 그런데 이젠 나 혼자 거북이가 되는 문제가 아니잖아.”
내가 거북이가 되면 내 배 속의 아기는 거북이알이 되는 걸까, 아니면 천소여 몸에 홀로 남게 될까?
천소여 몸은 내 영혼이 나가버리면 죽어버리는 걸까, 아니면…… 어떻게 되지?
말하다 보니 다시 막막해져서 떡돌이를 쳐다보자, 그는 부드럽게 웃고서 손을 뻗어 내 손을 꽉 쥐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절대로. 그러니 염려하지 마라. 괜히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지.”
“그래도-.”
“우리 반숙이는 의외로 안 해도 되는 고민을 많이 하는데?”
놀리는 투로 말하는 떡돌이는 정말로 이전에 같이 걱정할 때와 달리 아주 멀쩡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심한 것처럼 웃으면서 떡돌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 * *
떡돌이는 안심하라고 했지만 안심이 될 리가 없지.
그렇다고 떡돌이에게 타천천이나 비원에 관해 알려줄 수도 없다.
떡돌이가 황실의 힘으로 타천천을 압박했다가, 타천천이 나와 동귀어진이라도 하려고 나오면 안 되니까.
하지만 이렇게 고민만 한다고 뭐가 해결되지도 않을 거야. 역시 대책을 세워야겠어.
다음날. 나는 떡돌이가 조례에 가자마자, 귀자를 불러다 지시했다.
“귀자야. 어디에 심부름 좀 다녀와 줬으면 하는데.”
“네, 마마. 어디 다녀올까요?”
“태안루.”
타천천은 행방이 교묘해서, 어디에서 지내는지 원래도 알기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하비단 전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길을 뒤집으니 더욱 알기 힘들겠지.
며칠 전에 확인해보니, 비원은 일 때문에 며칠간 아예 자리를 비웠다 하고.
하지만 예전에 행궁에 갈 때 41천도 부근에서, 그와 태안루주가 나란히 걸어가는 걸 봤어.
‘어쩌면 태안루주는 타천천의 행방을 알지도 몰라.’
아니, 잠시만. 그런데 태안루주를 통해 말을 전하는 게 안전하긴 한가? 역시 비원이 돌아오기를 기다릴까?
태안루주는 내 정체를 모르는데, 괜히 알게 되면 어떡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은데.
“마마?”
내가 지시를 하다 말고 말을 멈추자 귀자가 어리둥절해 물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더니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자니, 원웅이 사색이 되어 들어왔다.
내가 회임한 뒤로 원웅도 ‘아기씨 놀라신다’면서 같이 거북이처럼 느리게 다녔는데.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왜 그래?”
그 모습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어 묻자, 원웅이 재빨리 말했다.
“마마. 공주님, 공주님이요. 돌아가신 장공주님이요.”
“어. 공주가 왜?”
“돌아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