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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86화 (186/283)

##  186화. 화창한 봄

아니, 갑자기 회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황당해서 부정했다.

“아니요. 충공증인데요.”

“……천빈. 춘곤증. 춘곤증.”

촉비가 옆에서 아주 작게 알려주어서 얼른 정정도 했다.

“춘곤증이랍니다, 규빈.”

그러나 규빈은 내 말을 딱 잘라 부정했다.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사람아. 이거 당신 몸 아니잖아.

물론 나도 내 몸은 아니지만.

어쨌든 규빈이 남의 몸을 가지고 딱 잘라 저렇게 나오니 아주 기가 막힌다.

황당해서 쳐다보고 있자니, 규빈이 부채로 자기 입가를 반만 가리고서 황후에게 물었다.

“황후 마마. 황후 마마께선 어찌 보십니까?”

황후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연비가 했다.

“헛소리.”

아주 짧고 굵게.

규빈은 인상을 찡그리고서 연비를 보았으나, 연비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자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연비는 황후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이 많이 피곤한가 봅니다. 행궁에서 오래 병을 앓았으니, 아직 체력이 이전만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고서 연비는 내 쪽을 향해 무언가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안타까운 건 나는 연비의 친동생이 아니라 그 신호를 전혀 해석할 수 없단 것이다.

그래도 일단 맞장구치자. 연비가 늘 나를 돕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나를 안 도울 때도 괴롭히진 않으니까.

“맞아요. 피곤합니다, 황후 마마.”

“글쎄.”

그러나 황후는 나와 연비보다 규빈을 편들었다.

“확실히 해서 나쁜 건 없지. 규빈의 말도 일리는 있다.”

규빈의 입꼬리가 올라간 반면 연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황후와 규빈 쪽을 번갈아 보면서 고개를 기웃하는데, 그 모습이 서늘했다.

연비는 이 상황이 언짢은가 봐.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영영.”

“예, 황후 마마.”

“탕 궁의를 불러와라.”

“예.”

황후의 상궁녀가 밖으로 나가자 방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후궁들은 말을 아끼고서 친한 이들끼리 곁눈질을 주고받다가 이따금 내 쪽을 힐긋거렸다

개 답응은 눈을 내리깔고서 바닥만 바라보았고, 우 답응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연비 역시 상황이 마땅치 않다는 듯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띠고서 맞은편 족자만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황후의 상궁녀가 후궁들을 진맥하는 탕 궁의를 데리고 돌아왔다.

탕 궁의는 아무 언질도 듣지 못하고 왔는지, 자기가 문안 자리에 왜 온 건가 영 어리둥절해 있었다.

“천빈이 너무 많이 자는데. 혹시라도 회임하진 않았는지 확인하라.”

그러다 황후가 지시하자, 탕 궁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그는 표정을 빠르게 수습하고 내 앞으로 다가와 진료 가방에서 흰 천을 꺼냈다.

내 손목 위에 천을 얹고 거기에 손가락을 얹은 탕 궁의가 눈을 감고 진맥하는 동안.

나는 긴장감에 발가락을 오므렸다.

좀 무서워졌다. 아니, 물론 아이가 생기면 내게도 처음으로 피를 나눈 가족이 생기는 거니까 좋긴 한데…….

좋다고 생각은 했지만 진짜로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하자 막막하고 두려웠다.

선녀가 날개옷을 입고 날아다니기에 “정말 예뻐요!” 하고 소리쳤더니, 내려와서 날개옷을 입혀준 느낌.

그러고서 높은 절벽 앞에 데려간 다음 입고 비행해보라 툭 떠미는 느낌. 연습 비행도 안 해 봤는데.

정말 어쩌지? 난 아직 개씨 가문에 복수도 안 했는데.

아이를 가지면 좋은 생각만 하고 살아야 한다는데, 내가 개씨 가문에 복수할 계략을 꾸미고 있으면 아이 성격이 무서워지지 않을까?

떡돌이 말처럼, 내가 갑자기 다른 사람 몸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건 또 어쩌지? 갑자기 이 몸에서 내 영혼이 빠져나가 버리면?

기쁜 마음보다 무서운 마음만 연달아 치밀어서, 자꾸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진맥하면 아기 심장이 아니라 내 심장 소리만 들릴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탕 궁의, 왜 이렇게 오래 손을 대고 있어?

얼마나 그리 초조하게 있었을까.

마침내 탕 궁의가 내 손목에서 손을 떼고는 흰 천을 가져가 돌돌 말아 의료 상자 안에 도로 담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모든 일을 해버리는 바람에, 나는 물론 다른 후궁들까지도 다들 긴장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어떤가.”

결국 보다못한 황후가 대놓고 물었다.

“회임하였나?”

탕 궁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두 손을 모으고서 황후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감축드리옵니다, 황후 마마. 천빈 마마께서 회임하셨습니다.”

이어서 탕 궁의는 내 쪽을 보더니 또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축드리옵니다, 천빈 마마. 회임하셨습니다. 게다가 아기씨도 건강하십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이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축하해요 천빈!”

촉비는 씩 웃으면서 내 어깨를 쳤고, 연비는 미묘한 표정으로 황후를 보았다.

황후는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지만 그리 즐거워 보이진 않았다.

반면 우 답응은 대놓고 싫은 표정이었고, 규빈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축하한단 말은 없다.

영빈은 아예 내 쪽에 관심이 없단 얼굴로 연비만 보고 있고. 개시시는 조용히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천빈 마마.”

각기 다른 표정과 감정으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나는 아직도 혼란에 차서 내 배만 빤히 바라보았다.

공포심이 더욱 거세졌다.

진짜…… 이 상태로 내가 다른 몸에 들어간다거나 하면 어쩌지?

* * *

문안이 끝난 뒤. 막막한 기분으로 황후궁을 나서는데, 온 귀인이 폴짝거리면서 다가오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왜 우는가 싶었지만 일단 달래주자, 온 귀인은 손수건을 꺼내 자기 눈가를 닦으며 당부했다.

“미안해요. 좋은 일에 울어서. 천빈 마마께서 회임했단 이야기를 들으니 죽은 내 아이가 생각나서요.”

아…….

“천빈 마마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진 절대로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처소 안에만 있어요. 밖은 너무 위험해요. 나쁜 사람들도 많고요.”

그렇구나. 나는 내 영혼이 다른 몸에 갈 경우만 생각했지,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네.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개 답응이 지나가다가 다시 한번 어색하게 인사했다.

“회임한 걸 축하드립니다, 천빈 마마.”

“고마워요.”

개시시는 그러고서 잠시 주저했으나, 곧 인사를 하고 먼저 가버렸다.

전에 내가 촉비와 싸울 때, 기몽에게 개시시의 이름을 말한 적이 있다.

이때 나와 개시시 사이가 좀 어색해졌는데. 아직도 그런 감정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웃기지. 한바탕 싸운 촉비와는 오히려 가까워졌는데.

촉비 때문에 틀어질 뻔했던 개시시와는 이렇게 어정쩡해져 버리고.

“사람과 사람 일은 정말 모르네요.”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온 귀인도 개시시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린다.

하긴. 내가 온 귀인이랑 친해질 줄도 누가 알았겠어?

하지만 온 귀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곁을 떠나야 했다.

“소여.”

연비가 등장해서.

입궁했을 때부터 연비와 영빈을 무서워했던 온 귀인은, 그 둘이 오자마자 얼른 인사만 올리고 먼저 가버렸다.

온 귀인이 멀어지자, 연비는 내 옆자리로 다가와 서며 혀를 찼다.

“회임은 되도록 초기에는 감추는 게 좋은데. 아쉽게 됐구나.”

영빈은 내 옆에 서는 대신, 나와 나란히 서지 않은 연비의 옆자리로 가 선다.

내가 회임을 하건 말건 여전히 내가 싫은가 봐.

나도 영빈 쪽에 굳이 시선을 주는 대신 연비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아까 표정이 안 좋았던 거야? 계속 황후 마마를 쳐다봤잖아.”

“회임은 되도록 늦게까지 감추는 게 좋으니까.”

“왜?”

“초기에는 유산하기 쉽잖니. 조심하는 게 좋지. 온 귀인도 결국 유산했고.”

슬그머니 배 위에 손을 올려 보았다.

느껴지는 건 근육뿐인데. 다시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아.

연비는 은근슬쩍 내 배 위에 같이 손을 올려 보고는, 신기한지 살짝 눌러보고서 손을 뗐다.

“안 그래도 우리 가문 세 자매가 잘 나가서 사람들이 모두 우리 연씨 가문을 주목하고 있다. 특히 온씨 가문에서는 더하지. 온 귀인이 네게 호의적이라지만, 온 귀인은 방계라 그 가문 내에서 힘이 세지 않아.”

“그래?”

“온씨 뿐만 아니라 규빈이나 안비 같은 사람들도 너와 사이가 좋지 않지.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다들 네가 아이 낳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 무슨 수를 쓸지 몰라.”

후궁들이 암살자를 단체로 보내도 그건 문제없어.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으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후궁들이 보낼 암살자가 아니라, 내 영혼을 어디로 움직일지 모를 타천천이지.

……앞으론 사하비단과 연을 끊고 살려 했는데.

역시 사하비단을 다시 한 번 만나볼 수밖에 없는 건가.

멍하니 배를 문지르고 있자니, 내내 조용히 가던 영빈이 연비 옆에서 딱따구리처럼 끼어들었다.

“아이를 낳은 후에도 조심해야 해. 널 죽이고 아이만 뺏어가려 할 수도 있어. 조심해. 멍청이처럼 굴지 말고.”

“우여야. 말. 잘해야지?”

연비가 작게 다그치자 영빈은 얼른 입을 다물었지만, 나름대로는 자기 조언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언니에게 꾸중을 듣자 바로 조용해지는 걸 보니, 얘는 재수 없지만 연비에겐 참 좋은 동생이구나 싶어서 나도 슬쩍 연비가 하듯 영빈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악!”

하지만 영빈은 내 손길이 닿자마자, 내가 뭐 주먹으로 자기 뒤통수를 치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버렸다.

멍하게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연비가 가볍게 웃었다.

“우여는 내가 싫은가 봐, 언니.”

머쓱해서 중얼거리자, 연비는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너도 우여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랬어?”

연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인가 봐.

하긴. 전에 내가 말실수를 하기 전부터 영빈이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짐작을 하기는 했지.

원래도 사이가 나빴을 거라고.

쌍방이었구나.

시무룩해 하는 사이, 어느새 내 새로운 처소 근처에 다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연비가 일부러 여기까지 같이 와 줬구나.

연비가 머무는 오월궁은 이미 지나쳤는데. 천소여와 천우여의 관계를 생각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어.

“미안. 언니 집 지나친 줄 몰랐어.”

“들어가 쉬련.”

“언니……도 같이 들어가지. 한 번도 여기 안 놀러 왔잖아. 뭐 좀 먹고 갈래?”

나는 바래다준 게 고마워서 물었지만 연비는 고개를 젓더니 드물게도 장난치듯 웃었다.

“네가 회임했단 소식이 곧 폐하의 귀에도 들어가겠지. 얼마 가지 않아 바쁘게 달려오실 텐데. 내가 있으면 솔직하게 좋아하시겠어?”

말을 마친 연비는, 할 말이 가득 쌓인 얼굴로 나를 따라온 원웅에게 눈짓을 보내고서 돌아서서 왔던 길을 다시 갔다.

연비가 멀어지자마자 원웅은 소리 없이 비명을 몇 번 지른 다음, 처소 안으로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마마? 문안 끝내고 나오셨는데, 온 귀인부터 시작해서 다들 마마가 회임을 했다고 조심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아까 탕 궁의가 들어갔다가 놀라서 나오던데. 진짜로 마마께서 회임하신 거예요?”

“그런가 봐.”

별로 실감은 안 나지만.

다시 배를 내려보자 원웅은 또 소리 없이 하늘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회, 회임이라니?”

부성은 지나가다가 이 소리를 용케도 듣고는 돌아와 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궁인들에게 둘러싸였다.

다들 원웅처럼 소리 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왜 그렇게 이상하게 소리쳐?”

“큰 소리를 냈다가 아기씨가 놀라면 어떡해요, 마마.”

그런가. 뭐 아는 게 있어야지. 회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데.

갑자기 회임을 해버렸으니 이거 참.

어색하게 배를 또 보고 있자니, 원웅이 조심스럽게 내 등을 부축해주었다.

“일단 들어가서 누우세요, 마마.”

“허리 안 다쳤어. 그렇게 안 해도 돼.”

“그래도요.”

결국 그들의 야단법석에 동참해주려 하는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이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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