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봄에는 잠이 와
연얼 군주가 떠난 뒤, 황제는 측근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연얼 군주가 아무리 현명하다 해도, 혼자서 비밀리에 서천 황제와 연락을 주고받긴 힘들지. 분명 도와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서천의 황후 자리는 영광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서천의 황제는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해 늘 슬퍼했고, 정무는 살뜰히 보살폈으나 일하는 시간 외에는 몹시 차갑다고 했다.
황제가 마음 한 자락 주지 않는 외국 출신 황후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바칠 이가 몇이나 될까.
황후 자리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면 다들 잘사는 집의 고귀한 귀족 자제들이었다.
혼인을 하지 않아도 편안히 놀고먹으며 살 수 있는 이들에겐, 그 자리는 한 줌 명예 외엔 아무것도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앞으로의 마음고생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연얼 군주는 서천의 황제와 손을 잡았다.
그만큼 복수심이 크다는 것일 터. 미리 대비해두어야 했다.
기몽 장군이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수오부 군왕이 손잡으려 했던 세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흑합도 기몽 쪽을 힐긋 보고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신도 같은 생각입니다, 폐하. 연얼 군주는 암투를 싫어하고 사람들이 무리 짓는 걸 좋아하지 않아 따로 모은 세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서천 황제와 비밀리에 연락을 맡아 주는 이라면 다른 사람에게서 온 세력일 것입니다.”
기몽은 눈살을 찌푸리고서 흑합을 노려보았다.
그가 자신의 의견에 한 발을 걸치고 따라가는 듯해 기분이 나빴다.
흑합도 기몽과 같은 의견이긴 싫었으나, 그런 이유로 이 일에 엉터리 의견을 낼 수는 없기에 모른 척 황제만 바라보았다.
월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의 생각도 같다.”
월요는 흑합과 기몽보다 한 가지 정보를 더 알고 있었다.
바로 연얼의 오라비인 수오부 군왕을 암살한 게 자기라는 것.
수오부 군왕과 손을 잡으려 한 세력은, 이 사실을 연얼 군주에게 알리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을 터.
지금 상황에서는, 연얼이 수오부 군왕 패거리 외의 이들과 손을 잡았다면 그게 더 신기할 지경이었다.
황제는 생각에 잠겨 잠시 의자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흑합을 불렀다.
“흑합.”
“예, 폐하.”
“은밀히 사하비단의 죄에 대해 알아내라 했지. 성과는?”
“생각보다 교묘한 이들입니다. 노출된 이들은 수뇌부 몇을 제외하곤 강하지도 않을뿐더러, 흑도방파들과 말을 나누긴 했으나 현재 대외적으로 저지른 짓은 길을 헤집는 것뿐입니다. 그조차도 목적이 불분명하고요.”
“눈 가리기인가.”
“예. 게다가 무림인이 워낙 관부를 멀리하다 보니, 사하비단과 사이가 틀어진 자들도 그들을 배척하면서도 관부가 끼어들 여지를 주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로 곤란하군.”
황제가 생각에 잠긴 동안, 흑합과 기몽은 다시 한 번 서로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기몽은 흑합이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싫었고, 흑합은 기몽 앞에서 별 성과가 없단 보고하는 게 싫었다.
하지만 황제가 생각에 잠겨 조용히 있으니, 그들이 여기서 말다툼을 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황제가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마침내 그가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던 걸 멈추었다.
집무실 안을 반복적으로 울리던 ‘똑똑’ 하는 소리가 사라지자, 두 손을 모으고 선 대신들이 모두 긴장해 황제를 보았다.
“무림인들이 관부의 개입을 싫어한다면 그걸 이용해야겠군.”
“이용하다니요?”
“말 그대로. 정파 무림인들이 사하비단과 싸우게 하지.”
“!”
“무림인들이 수시로 잘 하는 거 아니었나. 툭하면 싸워대는 거.”
기몽이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다.
“하오나 폐하. 중간에 조금이라도 말이 새어 나간다면 계획은 엎어집니다.”
“그러니 말이 새어나가지 않게 잘 해야지.”
단호하게 말한 황제는 흑합과 기몽을 번갈아 보았다.
둘 다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에 올라 그의 신임을 얻는 인재들이었다. 성격은 전혀 달랐지만.
그러나 분명한 건 둘 다 입이 무겁고 재주 있단 점이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이 일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후. 황제가 말했다.
“사하비단과 사이가 나쁜 정파를 골라 당근과 채찍을 골고루 주어라. 뜻에 따른다면 비밀리에 후원을 할 거라 이르고, 따르지 않는다면 이 일이 무림인들의 손을 떠나 관부를 거쳐 황실까지 올 거라 하라.”
황제는 이 일을 누구에게 맡길 건지는 말하지 않은 채 기몽과 흑합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기몽. 흑합. 그대들은 이 일을 어느 정파 무림인에게 맡기면 된다고 생각하지?”
둘 중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는 쪽이 이 일을 맡으리란 신호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건 쉬이 대답할 수 없는 일이라 기몽도 흑합도 바로 말하지 못했다.
대신 내내 조용히 있던 대신이 슬며시 손을 들고 물었다.
“폐하. 정명검 개원이란 자는 어떨까요? 개 답응과 같은 가문 사람이기도 하고, 또 그쪽에서 정직하기로 이름난……”
황제가 인상을 구기자, 용기를 냈던 대신은 얼른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황제는 모여선 측근들을 번갈아 보았으나, 그들 중 누구도 제대로 된 의견을 내지 못했다.
대신들이 대답하기를 한참 기다린 후. 황제는 덤덤하게 지시했다.
“적절하다 생각되는 이나 문파를 적어 가져오라. 확인 후 정하겠다.”
* * *
“…….”
처음에는 또렷하던 글자가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내가 책에 얼굴을 박고 있다.
황급히 고개를 들고서 입가의 침을 닦으며 보니, 원웅과 부성은 자기들 할 일을 하느라 바빴다.
다행이야. 내가 존 거 못 봤나 봐.
“염려 마세요, 마마. 한두 번 보는 게 아닌걸요.”
아니구나. 다 봤나 봐.
부성이가 웃으면서 하는 말에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곧 그런 마음을 눌렀다. 졸 수도 있지. 봄이잖아.
“봄이라 춘공증이 왔나 봐.”
“춘곤증이요?”
“그래 그거.”
말을 마치자마자 하품이 나온다.
나는 얼른 책을 덮고서 그 위에 엎드렸다가, 온 정신력을 발휘해 다시 상체를 일으키고서 책을 들고 일어났다.
이 책은 내 일기장이었다. 일기장을 놔두고 잠들면 누군가 이걸 볼 수도 있으니, 안 볼 땐 감추어야 했다.
하지만 참. 큰일이야. 예전에 그…… 이름도 까먹었네.
하여튼 이름이 길고 이상한 후궁 기본 서책을 읽을 때도 이 정도로 잠이 오지는 않았는데.
하필 봄 날씨여서일까. 내 일기장을 읽으려는데도 요즘은 툭하면 잠이 와서 견디기가 힘들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르륵 일기장을 훑어 확인해보니, 오늘 내가 읽은 게 여기서 딱 두 장이었다. 두 장.
“원웅. 부성. 가서 간식 좀 가져다줘.”
“네, 마마.”
핑계를 대고서 둘을 보내자마자, 나는 겉옷을 벗고 치마를 돌돌 말아 옆에 단단히 묶은 다음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갔다.
그곳 대들보 위에 일기장을 올려놓고 아래로 훌쩍 내려가서 치마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고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원웅이 과일 튀김을 들고 와 내밀었다.
“전에 이걸 잘 드시길래 가져왔어요, 마마.”
“부성이는?”
“간식이 거의 다 떨어져 가서요. 새로 재료를 받아다가 미리 만들어 둬야겠다고 귀자 데리고 내무부로 갔어요.”
“응,”
나는 얼른 과일을 하나 집어 든 다음 입에 넣고서, 원웅에게도 하나 먹으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원웅은 과일을 먹는 대신 나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왜. 내가 너무 많이 먹나.
아삭거리는 튀긴 과일을 씹으면서 같이 빤히 쳐다보자, 원웅은 쑥스럽게 웃으면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마마. 요즘 마마께서 너무 많이 주무시고 많이 드시고…… 물론 이전에도 많이 주무시고 많이 드셨지만…… 그래서요.”
“그래? 먹는 건 항상 이 정도였던 거 같은데. 잠은 늘긴 했어.”
“춘곤증이 심하신가 봐요, 마마.”
“그런가 봐.”
과일 튀김은 금세 동이 났다.
그래도 덕분에 잠도 완전히 깨어서, 나는 원웅에게 빈 그릇을 건넨 다음 창가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앉았다.
책을 펼치기만 해도 잠이 오니, 봄바람을 받으면서 개씨 집안에 복수할 방법이나 탐색할 셈이었다.
연얼 군주는 복수를 위해 서천까지 갔지. 나도 뭔가…… 뭔가 해야 하는데.
* * *
눈을 뜨니 촛불이 일렁거리고 주위는 캄캄하다.
얼른 발을 내리고 일어나자, 황제가 맞은편에서 책상에 기대 책을 읽다가 나를 보며 웃었다.
“다 잤느냐?”
“언제 왔어?”
“온 지 조금 됐지.”
뻐근한 목을 주무르자, 떡돌이가 자연스럽게 와서 내 목 뒤를 문질러주었다.
요즘 얘가 이렇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를 막 만져대고 그래.
하지만 시원해서 그의 손에 멍하게 매달려 있자니, 떡돌이가 충분히 내 목을 주무른 다음 물었다.
“어떠하냐? 괜찮으냐?”
“응.”
“네 궁녀가 요즘 네가 시시때때로 잔다던데. 제대로 밤에 잠은 자고 있고?”
“밤에 다른 거 하느라 바빠 못 자긴 해.”
내 말에 떡돌이가 씩 웃더니 괜히 내 탁상 위에 놓인 내 손가락을 자기 손가락으로 툭 두드렸다.
“보약이라도 먹을까?”
“싫어. 쓰잖아.”
“어린아이도 아니고. 약이 쓰다고 안 먹으면 쓰나.”
“크면서 혓바닥을 교체한 것도 아닌데. 어린아이한테 맛없는 건 다 큰 사람한테도 맛없어.”
떡돌이는 그래도 걱정스럽게 나를 보다가, 궁의를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젓고서 침상으로 비틀비틀 걸어가 드러누웠다.
방금 전까지 잔 것 같은데. 또 잠이 왔다.
* * *
다음날.
나는 봄 같은 연한 녹색 옷을 차려입고 황후에게 문안을 갔다.
시침을 드는 날에는 떡돌이가 해둔 말이 있어서 문안을 가지 않아도 되는데, 어제는 떠돌이가 내 방에 왔다가 일찍 돌아갔다.
내가 너무 피곤해 보이다 보니, 옆에서 자는 것도 방해가 될까 봐 돌아가서.
어쨌건 그런 까닭에 오늘은 문안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떡돌이와 얘기할 때도 수시로 잠이 찾아오는데. 황후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안 올 리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자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황후가 무어라 말하는 걸 보다가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천빈.”
촉비가 슬쩍 내 팔을 두드려 깨워 주었지만, 일어났을 땐 이미 황후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황후가 말을 멈추고 나를 보자 다른 후궁들 역시 말하던 걸 멈추고 모두 내 쪽을 본다.
순식간에 후궁들의 시선이 나 한사람에게 몰린 것이다.
이거 참. 졸았다고 구경거리가 될 줄이야.
나는 머쓱하게 웃고서 얼른 눈에 힘을 주고 자세를 바로 했다.
다행히 황후도 넘어가 줄 생각인지 다시 아까 하던 말을 계속하려 했다.
그런데 황후가 무어라 말하기 전.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규빈이 갑자기 톡 끼어들었다.
“천빈. 올 때부터 계속 졸던데. 혹시 회임한 거 아니에요?”
어? 회임? 이게 무슨 소리야?
잠이 갑자기 확 달아나서 나는 목에 힘을 줬다. 웬 회임?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조용했는데. 아까보다 더 조용해졌다. 신기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