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접근하는 사람들
말할 거냐고? 나는 입을 벌리고 연얼을 빤히 보았다.
연얼은 농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긴. 누가 이런 거로 농담하겠어.
나는 한숨을 내쉬고서 그녀를 원망했다.
“전하는 자꾸 제게 대답을 미루시네요.”
연얼 군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너무 툴툴거리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발음을 일부러 조금 뭉개며 중얼거렸다.
“제가 전하 이야기를 폐하께 하면, 먼저 우정을 배신한 게 되잖아요. 그러면 전하는 폐하께 복수하러 가면서, 우리 우정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게 되겠죠. 제가 먼저 배신했다 생각하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해요?”
“네. 그리고 폐하가 전하를 못 가게 막으면, 전하는 갈까 말까 고민할 필요도 없어지겠죠. 그러면 이 일을 못 하게 되어도 그냥 나나 폐하를 탓하면 되고요.”
“…….”
“내가 전하에 대해 함구하면, 내가 전하 처지를 이해해준다 생각하고서 넘어갈 거고. 아니에요?”
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일단 안 좋게 추측해본다. 그게 좋다. 나중에 믿다가 배신당하는 것보다는.
연얼 군주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하지만 수긍한다기에는 애매한 대답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가에는 내 안 좋은 추측들에도 불구하고 미소가 올라왔다.
왜 웃지? 의아해서 쳐다보자. 연얼 군주가 말했다.
“천빈은 좋은 사람이지만, 난 폐하가 왜 천빈을 좋아하는지 가끔 궁금했어요. 천빈은 궁에서는 보기 힘든 사람이니까요.”
갑자기 칭찬부터 말하는 게 이상한데?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연얼은 진심이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서 말을 이었다.
“난 폐하가 천빈을 좋아하는 건, 둘이 정 반대되는 사람이라 그런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제 보니 그 반대네요.”
“뭐가요?”
연얼 군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두 사람은 흡사한 점이 있어요.”
나랑 떡돌이가 흡사한 점이 있다고? 어디가?
떡돌이는 머리가 좋고 나는 머리가…… 머리가 나쁘진 않지.
공부는 못하지만 그래도 머리가 나쁘진 않아. 하지만 떡돌이만큼 좋진 않아.
떡돌이는 속이 콩알만 하지만 나는 아주 넓은 대인이다. 대인의 풍모를 갖추고 있어.
떡돌이는 온실 속 화초이지만 나는 밖에서 핀 잡초, 아니 그냥 돌멩이라는 것도 다르다.
역시 나와 떡돌이 사이의 공통점은 모르겠어.
“천빈도 사람을 믿지 않아요.”
그러다 연얼 군주가 뱉은 말은 의외였다.
인정하자니 떨떠름하고 아니라고 하자니 그런 것도 같은 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연얼 군주는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천빈 말처럼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다른 식으로 해설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내가 적이 되더라도, 날 동정할 필요 없다고, 미리 알려준단 식으로.”
그런가?
“난 천빈이 폐하를 연모한단 걸 알면서도 죽이기로 결심했으니, 천빈도 천빈이 하고 싶은 걸 하란 뜻이라고.”
연얼 군주가 다시 덧붙였다. 밖에서는 봄 냄새가 물씬 들어오는데, 연얼 군주의 표정은 황량했다.
늘 슬픔에 젖어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화통하던 연얼 군주는, 지금은 몹시 괴로워 보였다.
“내 오라비를 암살한 게 폐하란 걸 알게 됐어요, 천빈.”
“확실한 거예요?”
“확실해요. 그리고 알아버린 이상, 나는 여기서 오라비를 죽인 사람을 보며 웃을 수 없어요.”
“!”
“다섯 개의 황제국이 있고, 각 황제국은 문화와 세력이 다 비등해 균형을 맞추고 있죠. 알아요, 서천 황제는 쉽게 볼 수 없는 사람이에요. 내가 갈 황후 자리는 이름뿐인 자리이니, 난 거기서 힘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가볼 거예요. 이곳에서, 폐하의 손아귀 위에선 그조차도 해볼 수 없으니까.”
연얼 군주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고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갑자기 그녀가 내려놓고 간 진실들이 너무 무거워서 나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 * *
금룡궁 밖으로 나온 내가 멍하게 앞만 보며 걸어가자, 뒤를 따라오던 귀자가 의아해 물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혹시 태후마마께 혼나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귀자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연얼 군주께서 다녀가신 걸 보았습니다. 군주 전하도 안색이 어두우셨는데. 혹여 관련이 있는지요?”
내가 휙 쳐다보자 귀자가 소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귀자가 분명 떡돌이 사람이었지? 이젠 내 사람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론 떡돌이 사람이야.
내 명령에 다 따르겠지만 떡돌이에게 피해를 주는 명령은 안 따른다잖아.
나는 망설이다가 귀자의 팔을 두드렸다.
“폐하한테 같이 식사하자고 전해줘.”
귀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금룡궁 쪽을 힐긋 보았다.
아까 저 안에서 먹고 오지 않았냐고 묻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두드렸다.
“얼른.”
* * *
귀자를 보긴 했지만, 혼자 방 안에 돌아온 후에도 나는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방 안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마마, 눈이 어지러워요.”
보다 못한 원웅이 자기 이마를 감싸 쥐고서 애원할 정도였다.
“태후마마께서 마마께 무어라 하시던가요?”
부성도 염려하며 물었지만 나는 차마 두 사람에게 연얼 군주에 대해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어떤 진실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괴로울 때가 있으니까.
얼마나 그렇게 기다렸을까. 마침내 밖에서 “황제 폐하 납시오!” 하고 오 공공이 외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떡돌이는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다가 내가 톡 튀어나오자 눈썹을 치켜올렸다.
면사 위로 드러난 그의 눈동자가 상황도 모르고 장난스레 빛났다.
“우리 천빈이 웬일로 여기까지 나왔을까.”
그 흐뭇해하는 표정을 보니 어이구 어이구 소리가 절로 나온다. 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 * *
떡돌이가 방 안에 들어오고 궁녀들이 음식을 내려놓고 물러가자마자, 나는 다 들으란 듯이 떡돌이에게 말했다.
“폐하. 폐하께만 알려드려야 하는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내용이 있습니다.”
그 말에 떡돌이가 “오원요.” 하고 오 공공을 부르자 오 공공이 얼른 손을 저어 궁인들을 내보냈다.
순식간에 방 안이 조용해지자 떡돌이가 승언이 숨은 쪽을 쳐다보았다.
“승언인 괜찮아. 아마.”
그래도 떡돌이는 승언이까지 물렀다.
완전히 우리 둘만이 남자 나는 그에게 연얼 군주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태후마마가 연얼 군주가 서천으로 가지 않게 설득해달라 하셔서 아까 봤는데. 그래도 갈 거래.”
떡돌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아닌 거 같은데.”
“가서 널 죽인대.”
떡돌이는 차를 마시다가 사레가 걸려서 콜록거렸다.
내가 손수건을 꺼내 내밀자, 그는 입가를 닦고서도 자기 가슴을 한참 두드리다가 가까스로 진정해서 나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뭐라고?”
“연얼 군주는 네가 자기 오라비를 죽였다 믿고 있어.”
“…….”
“진짜인진 안 물을게. 진짜든 아니든 나한테 중요한 내용은 아니기도 하고. 하여튼 그렇대. 서천에 황후가 되어서 네게 복수할 거래.”
떡돌이는 한결 진지해진 눈으로 나를 보다가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나를 살피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이걸 왜 짐에게 얘기해주지? 넌 연얼 군주와 친한 줄 알았는데.”
“그냥. 얘기해줘야 할 거 같아서.”
“군주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말하고 싶으면 말하래. 그리고 아마, 내가 말할 거라 생각하고 말해줬을 거야.”
떡돌이는 이번에는 한쪽 입가를 비딱하게 올렸다.
“그렇다면 군주는 이미 서천 황제와 이야기가 끝난 일인가보군.”
그 부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지라 나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어?”
목을 거북이처럼 빼고 그를 보자 떡돌이가 태연히 말했다.
“목숨이 걸린 일을 쉽게 할 리가 있나. 아마 서천 황제와 이야기가 진전되어 있을 거다. 혼담을 우리가 넣지 않으면 황제가 넣을 거고, 받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얘기가 되어 있다 할 거고, 혼담을 거절하면 이미 한 약조를 엎으려 하니 서천을 무시하는 거냐 화를 내겠지. 사람을 바꿔치기하거나 죽이지 못하도록 이미 준비도 되어 있을 거고. 아마 내일쯤. 아니면 오늘 저녁이라도 서천에서 왔다며 사절이 도착하겠군.”
듣고 있자니 눈이 핑핑 돌고 머리가 아프다.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너무 앞서나가는 거 아니야?”
* * *
하지만 떡돌이의 말은 그대로 되어서, 정말로 저녁이 되자 서천 사절단이 찾아왔다.
서천 사절단의 말도 거의 떡돌이가 알려준 그대로였다.
내가 직접 본 건 아니고 오 공공에게 물어서 들은 거지만.
‘이쪽 세계는 진짜 정신없구나. 그냥 비무첩 날리고 비무하고, 원한이 생기면 복수하고, 이런 무림인들 세상이랑은 전혀 달라.’
하긴. 무림도 문파나 세가 쪽 일로 가면 여러 가지 머리를 쓴다지만…… 나는 뭐. 그렇게 엮어 본 적이 없으니.
그리고 몇 주 후.
빨리 피는 봄꽃이 다 지고 여름 잎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무렵, 연얼 군주는 서천에서 온 행렬을 따라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연얼 군주는 화려한 마차에 타기 전 나를 잠시 돌아보았다.
나는 그녀의 미묘한 시선을 받다가 우리가 친하게 지낼 때처럼 웃어 보였다.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서 웃었다.
그녀의 복수가 성공할지, 아니면 흐지부지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다가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나서 보니 사자 친왕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콕 훔치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사자 친왕은 울먹이다가 나를 보며 더욱 슬픈 척 말했다.
“천빈 마마. 이 친우를 좀 위로해 주시지요.”
“왜 우십니까?”
황당해서 묻자 사자 친왕은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우리 연얼이 저렇게 다 커서 떠나는 걸 보니…….”
자기가 키우지도 않았으면서. 아니, 그리 친하지도 않았으면서. 별로 접점도 없지 않나?
의아해서 쳐다보았으나, 사자 친왕은 계속 눈가를 콕콕 찍어댈 뿐이었다.
그게 신기해서 계속 보자 사자 친왕이 손수건을 내리며 내게 물었다.
“마음에 몹시 아픈데. 오래간만에 친구끼리 차라도 한잔할까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
떡돌이의 손이 내 옆으로 쓱 다가오더니 자연스럽게 내 몸을 자기에게 끌어당겼다.
얼결에 그의 가슴에 등이 붙었다.
“미안하지만, 사자 친왕. 천빈은 나와 선약이 있어서.”
떡돌이는 자연스럽게 거짓말하며 웃고는 이제 들어가자면서 나를 두 팔로 감싸고 안쪽으로 밀어붙였다.
“친우끼리 대화도 못 하게 하다니.”
사자 친왕이 뒤에서 한숨 섞어 뱉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 * *
잠시 뒤. 연얼 군주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모두 다 안으로 들어가자 남은 건 사자 친왕과 그의 심복들뿐이었다.
갑자기 쓸쓸해진 곳에 홀로 남은 채, 사자 친왕은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마차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화려한 부채와 손수건을 내린 그는 평소처럼 웃고 있지만, 눈빛이 어둡고 안색이 좀 초췌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채고 위로해 줄 이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걸어가려는 사자 친왕의 곁을 누군가 스치듯 지나갔다.
사자 친왕은 멈추어 서서 손바닥을 펴보았다.
닿을락 말락 빠르게 지나간 사람은 그 짧은 순간에 그의 손바닥에 서신을 놓고 갔다.
사자 친왕은 자신의 마차에 올라탄 후에야 그 서신을 펼쳐보았다.
-연얼 군주는 결심을 끝내고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젠 전하께서 결단을 내려주실 때입니다.
사자 친왕은 한숨을 내쉬고서 쪽지를 잘게 찢으며 투덜거렸다.
“연얼은 월요가 원수이니 결정을 내렸지. 하지만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