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미리 걱정
“설마 그 정도겠어.”
내가 얼른 둘러댔으나 떡돌이는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들렸는데.”
사실 맞는 말이다. 떡돌이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것도 아니고, 떡돌이를 싫어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내가 떡돌이에 대해 잊어버린 이유는 꽤 논리적이었다.
“내 아이가 생긴다고 폐하랑 내 피가 섞이진 않잖아.”
방금 내가 말한 가족은 따지자면 그런 뜻에서 나온 말이었다.
혈육. 물론 세상엔 피 안 섞이고도 친부모자식보다 더욱 가까운 이들도 많지만.
하지만 떡돌이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 아이야말로 우리 피가 섞인 증거 아닌가?”
“음…….”
“어떻게 우리 아이 일에 짐을 쏙 빼놓을 수 있는지, 너무 황당하군.”
“너무 새겨듣지 마, 떡돌아.”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우리 아이가 들을 거다. 듣고서, 아 아빠 별거 없네? 하고서 짐은 신경도 안 쓰게 되겠지.”
“아기가 그럴까?”
아긴데?
“그럼. 당연하지 않으냐.”
아기가 하는 일은 먹고 자는 거밖에 없을 텐데. 하지만 모르지.
황족 아기는 좀 더 똘똘할지도. 황족들은 죄다 똑똑하니 말이다.
하지만 타고나기를 황족 아기들이 더 똑똑하다면, 왜 다 크고 나면 이리 비슷한 걸까?
나는 떡돌이의 반질반질한 이마를 의심스레 쳐다보았다.
어쨌든 이 일은 내 말실수다. 떡돌이가 섭섭할 법도 해.
“좋아. 너도 새 식구에 끼워줄게.”
떡돌이는 내 말에 흐뭇하게 웃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은지 고개를 기웃했다.
“왜?”
* * *
얇은 문밖에서 이 대화를 다 듣는 오원요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커녕 회임도 한 적 없는 분들이 가상의 아이를 두고 부부싸움부터 하시다니…….
두 사람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나중에 진짜 아이가 생기면 얼마나 의견이 충돌할지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게다가 천빈이 회임하게 된다면 그 아이가 누구인가. 황제가 처음으로 보게 되는 첫 아이다.
몇 년 만에 가까스로 태어나는 황제의 첫째 아이.
태후도 그 아이에게 온갖 좋은 것을 다 해주려 할 테고, 태후뿐만인가.
친자매인 연비와 영빈은 물론, 황후며 온 대신들까지 다 그 아이의 양육에 입을 댈 것이다.
아이의 옷 모양이며 교육 가지고 온 나라가 들썩일 게 눈에 벌써부터 훤해서 오원요는 치를 떨었다.
“왜 그러십니까, 오 공공?”
“왜 그렇기는. 생각해보게. 천빈 마마는 아이가 태어나면 셋이서만 가족이라고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우리 아기씨는 몇 년 만에 가까스로 태어난 폐하의 첫째 아닌가. 어디 열 번째 자식이거나 해야 셋이서만 가족이지, 가장 첫째를 두고서는…….”
혀를 차는 오원요를 보며, 승언은 눈을 끔뻑거렸다.
천빈은 아직 회임도 안 했는데요?
* * *
밤늦은 시간까지 떡돌이와 우리 아이에 대해 이것저것 말한 건 기억나는데.
눈을 떠보니 떡돌이는 이미 조회를 하러 떠났고, 나는 혼자 새로운 궁 침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고서 “몇 시야?”하고 묻자, 부성이 얼른 창문을 활짝 열며 알려주었다.
“아침 문안은 폐하께서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늦게 주무셔서 피곤하시다고요.”
말을 하는 부성은 얼굴이 벌겋고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가 있었다.
나와 황제가 말다툼하느라 늦게 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구나.
하긴. 부성에게 우리가 아이 이름과 아명을 가지고 밤새 논의했단 건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얼른 씻고 아침 드셔야지요, 마마. 문안은 안 가셔도 아침 식사를 제때 하셔야 위가 건강해요.”
“응. 그러자.”
하품을 하면서 기다리자니, 원웅이 세숫물을 받아왔다.
세수를 하고 난 다음에는 하늘거리는 보라색 차림을 하고서 내 새로운 거처를 살펴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이 안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자. 폐하께서 궁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나한테 글자를 하나 생각해보라 하셨거든.”
“외자로 짓나요?”
“아니. 한 글자씩 지어서 합치기로 했어.”
“와!”
원웅과 부성은 낭만적이라면서 좋아하더니, 여러 가지 좋은 글자를 마구 제안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어떤 글자를 쓸지 이미 다 정한 상태다.
처음에는 ‘천’ 자로 하려 했는데. 그건 내 봉호랑 똑같아서 하지 않기로 했다. 같은 글자만 쓰면 재미없으니까.
대신 내 이름인 ‘년’과 ‘비’ 둘 중 하나를 쓰기로 했는데, 최종적으로 정한 건 ‘비’ 자였다.
‘년’ 자는 받침이 있어서 ‘비’ 자가 발음하기 쉬우니까.
이제 남은 건 떡돌이가 ‘비’ 자와 어울릴 글자를 구해오는 것뿐인데…….
알아서 잘 골라오겠지. 떡돌이는 똑똑하니까.
* * *
황제가 종이에 ‘대’ 자를 커다랗게 쓰자, 오원요가 막 데워온 찻잔에 차를 따르면서 아부했다.
“폐하는 어쩌면 글씨도 이리 잘 쓰십니까.”
월요는 ‘아부하기는’ 하는 눈으로 오원요를 보았으나, 기분 나쁘진 않은지 가볍게 웃으면서 종이에 손부채질을 했다.
“반숙이가 쓸 궁에 붙일 이름이다.”
“예? 외자로 쓰시려고요?”
“아니. 한 글자씩 골라오기로 하였지.”
뿌듯하게 말한 월요는 먹물이 다 말랐다 싶자, 종이가 구겨지지 않게 접어 옆으로 두었다.
“보나 마나 천빈이야 또 ‘천’자를 고르겠지만.”
오원요는 월요의 밝은 모습에 덩달아 흐뭇하게 웃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걱정스레 물었다.
“너무 좋은 글자를 썼다가 괜히 시비가 붙진 않을까요, 폐하?”
황제의 말대로 천빈이 ‘천’ 자를 고른다면 ‘대천’이란 이름을 쓰게 될 텐데.
커다란 하늘이라니. 너무 어마어마한 뜻이 아니던가.
혹시라도 그 이름을 가지고서, 역심이 있니 어쩌니 시비가 붙을까 염려되었다.
“짐이 직접 준 이름에 누가 감히.”
“그러면 다행이지만…… 폐하께서 천빈 마마를 눈에 띄게 총애하시니, 온 승상 쪽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고 합니다.”
“온 승상은 야심이 크지. 큰 뜻을 품고 들여보낸 온 귀인이 천빈과 친해지는 바람에 내분이 일어나 버렸지만.”
* * *
평화롭고 즐겁게 보내다 보면 시간이 훌쩍훌쩍 빠르게도 지나가나 보다.
새로운 궁을 몇 바퀴 돌면서 흐뭇해하다가, 촉비에게 찾아가서 새 궁이 어떤지 자랑하다가, 온 귀인을 만나서 식사를 하고, 떡돌이가 마련해 준 새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고 나니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가고 하늘색이 변하고 있었다.
나는 새 목욕탕에서 깨끗하게 씻은 다음, 구름으로 짠 것처럼 보드라운 잠옷으로 갈아입고서 내 방으로 가 침상에 드러누웠다.
훈련을 하고 막 씻은 탓인지,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는데도 피로가 몰려오면서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생각이라고는 해도 별생각은 아니지만.
그냥, 우리가 밤새 아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생각해보니 우리는 아기는 고사하고 아기가 생길 만한 거사도 안 치렀다.
나는 비몽사몽한 정신을 억지로 물리면서, 잠옷을 다 벗은 다음 이불을 덮고 고개만 삐죽 내밀었다.
그러고서 얼마나 있었을까.
평소처럼 떡돌이가 들어왔다.
목욕을 하고 왔는지 오늘도 피부에서 뽀얗게 물기가 나고 있었다.
게다가 옷 역시도 황제의 예복이 아니어서, 그는 간단하게 한 손으로 웃옷을 풀어 옆으로 툭 치우고는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왔는데도 내가 이불 안에서 나가지 않고 그를 보기만 하자, 떡돌이는 웃으면서 내 뺨을 아프지 않게 당겼다.
“오늘은 아예 이불 밖으로 나오려 하질 않는군.”
그러다 떡돌이의 시선이 내 발치로 내려가 있는 잠옷에 닿았다.
그는 잠옷을 한 번 나를 한 번 바라보다가 흠칫하더니, 두려운 듯 내 몸을 다 덮은 이불을 보았다.
‘거기서 두려운 눈은 왜 하는 건데?’
좀 황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평소보다 좀 더 새침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며 그를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
떡돌이는 당황한 얼굴로 다시 내가 벗은 잠옷과 이불을 번갈아 보더니, 입을 뻐끔거리다 물었다.
“혹시 이 아래에, 짐이 생각하는, 그런 상황일까?”
“무슨 생각 하고 있는데?”
“…….”
말로 하기 어려운지 떡돌이는 귓가가 붉어졌다.
목이 타는지 마른침을 삼키다가 입술을 깨물다가, 아예 자기 입술을 혀로 문지른다.
그의 시선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주저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불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만 꿈틀꿈틀 움직여 침상에 걸터앉은 그의 허벅지를 베고 최대한 또렷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떡돌이는 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궁 이름을 짓기로 했는데.”
“이름 짓는 데 시간 얼마나 걸린다고. 난 ‘비’ 자를 정했어.”
“짐은 ‘대’ 자를 지어 왔다.”
중얼거린 떡돌이는 이름을 합치려다가 흠칫하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대비궁은 내가 쓰면 안 될 궁 이름 같고, 비대궁도 뜻이 좀 그렇다.
“폐하가 이름을 다시 지어 와.”
“네가 다시 지어도 되지 않느냐.”
“난 내 이름에서 딴 거란 말이야. 폐하는 폐하 이름에서 딴 거 아니잖아.”
떡돌이는 항의하려 했으나, 내가 더워서 이불을 확 내려 버리자 다시 입을 꾹 닫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는 어느새 다시 옆으로 향해 있고, 절대로 내 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은 모양새가, 어느새 첫날밤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물론 우리의 첫날밤…… 그걸 첫날밤이라고 해야 할지 좀 애매하긴 했지만.
어쨌든 영 내 몸을 보려고 하지 않기에,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쥐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눈가가 그새 붉어진 게 들어왔다.
떡돌이는 마른침을 삼키다가 물었다.
“오늘도 짐을 때려서 기절시키진 않겠지?”
“그땐 내가 너무 놀라서 그래. 조심조심하면 안 그래.”
떡돌이는 내 말을 따라서 ‘조심조심’ 하고 같이 중얼거리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한 손으로 자기 상의를 벗어 옆으로 치웠다.
표정과 달리 조급한 손놀림이었다.
끈이 잘 풀리지 않는 듯 잠시 애먹긴 했으나, 마침내 상의를 다 벗자마자 그는 이제야 내 몸을 제대로 보고서 숨을 들이쉬었다.
몸이라고는 해도 상체뿐이지만.
그는 나조차 민망할 정도로 빤히 내 몸을 바라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귓가를 만지작거리더니 목에서부터 시작해 더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일부러 반대쪽 손으로 그가 하는 행동을 똑같이 따라 했다.
떡돌이는 손을 긴장해서 움직여보다가, 내 손이 자신을 따라 하자 웃긴지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려서 따라 웃었다.
“이런 데서까지 장난이라니.”
중얼거린 떡돌이는 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피부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고, 천천히 몸이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 사이에 두 손가락을 묻고서, 그가 조금이라도 세게 물라치면 머리카락을 쥐었다.
덕분에 떡돌이는 머리가 산발이 되긴 했지만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게 내게 다가올 방법을 몸으로 깨달은 듯했다.
마침내 그는 배로 내려오다가, 내가 몇 개월을 열심히 운동해 만든 근육을 만져보더니 미묘하게 웃었다.
이윽고 그의 손이 아래쪽 이불을 걷자, 따뜻한 공기가 물러나며 조금 추워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