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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81화 (181/283)

##  181화. 넌 까먹었지

늦은 밤, 황후의 침실을 밝히는 건 촛불 단 하나뿐이었다.

이 때문에 상궁녀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더욱 걱정스럽고 음침하게 들려와 황후의 마음을 수란스럽게 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황후는 거추장스럽게 옆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천빈은 보이는 만큼 멍청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상궁녀는 입술을 삐죽이다 물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 말처럼, 운월이 뒤에서 조언을 잘 해주는 걸까요?”

“그자는 머리가 좋지. 하지만 지지자라고는 해도, 거의 천빈을 찾아가지 않아.”

황후도 천빈의 지지자인 등룡 운월에 대해 알아보고 한때는 주시도 했다.

하지만 그자는 천빈을 만나지 않고 뒤에서 일한다고 했다.

대게 대신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 천빈에 대해 나쁜 말이 나오면 교묘히 맥을 끊어버리는 식으로.

그러니 천빈에게 촉비와 가까워질 계책을 세워주진 않았을 터.

황후는 생각에 잠겨 관자놀이를 눌렀다.

상궁녀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수를 내야 하지 않을까요, 마마? 온 귀인이나 개 답응이야 품계가 낮으니 그렇다 쳐도, 촉비가 천빈과 가까워지는 건 좌시하기 어렵잖아요.”

다른 궁녀도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촉비가 촉씨 가문에서 냉대받는다지만 그래도 혈족이니, 어떻게 관계가 변할지 모릅니다, 마마. 촉비도 1공 3귀의 대가 출신이고 천빈은 1공 6귀의 대가 가문이지요. 둘이 힘을 합치는 건 위험해요.”

상궁녀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한 번 더 말했다.

“게다가 혜비는 촉비와 친하니, 촉비가 천빈과 잘 지내면 혜비까지 친해질지도 몰라요.“

두 궁녀가 양옆에서 부정적인 걱정을 거듭해대자, 황후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졌다.

촉비는 자발적으로 몸을 숙이고 황후와 잘 지내려 들던 인물이기에, 두 사람은 촉비와 천빈이 가까워진 데 희미한 배신감마저 느끼는 듯했다.

황후가 탁상을 손가락으로 툭 툭 두드리자, 촛대가 흔들리면 방 전체의 그림자까지 같이 미동했다.

그 바람에 분위기는 더욱 스산해졌으나, 황후는 홀로 골똘히 생각하느라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고 난 후에야 황후는 몸을 일으켜 겉옷을 벗고 침상으로 걸어갔다.

열심히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별말을 하지 않고 이대로 자려는 듯했다.

두 궁녀가 서로를 곁눈질하다 황후를 보자, 황후는 이불 안에 들어가 몸을 누이며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함부로 움직이면 실수하기 쉽지. 우선 가만히 사태를 지켜봐라.”

“하지만, 마마-.”

“일이 계속해서 잘 풀리면 누군가는 방심하고 실수하기 마련이다. 연비는 절대 녹지 않는 얼음처럼 침착하니 절대로 방심하지 않겠지만, 밑의 두 동생은 다르지.”

황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영빈은 양처럼 굴지만 사실은 늑대이지. 우직한 산 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끓는 용암이 가득하니, 한 번 폭발하면 큰 실수를 할 거다. 천빈이야 원래 침착과는 거리가 멀고. 그뿐일까. 세 자매가 모두 잘나가는데, 그 많은 가문 사람 모두가 침착하고 겸손하게 굴려고.”

“아!”

“누구든 실수를 할 거다. 우리는 때를 기다리면 돼.”

* * *

“촉비 마마는 마음을 갑자기 왜 바꾸신 걸까요?”

간식으로 설탕을 뿌린 연한 분홍색의 과자를 먹고 있자니, 원웅이 차를 따라주며 물었다.

촉비가 베풀 듯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한 지도 어느새 보름가량이 지났다.

나는 매일같이 촉비를 찾아가 그녀가 언제 내 뒤통수를 때릴까 살폈지만, 놀랍게도 아직 그런 내색은 없었다.

가끔가다 아리송한 눈으로 날 보며 고개를 젓긴 했지만, 그럴 때조차 적의는 없어 보였다.

희미하게 동정심이 보일 뿐.

“모르겠어.”

“진짜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요?”

“나한테 물어도 모르지. 계속 조심하는 수밖에.”

잔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듣기 좋게 울린다.

오래간만에 평화로워진 기분으로, 나는 팔을 괴고 원웅이 차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다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렇게 평화롭게 지내는 게 좋아.”

황궁에 돌아오면서, 나는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하나는 촉비에게 복수하는 것이고, 하나는 개씨 집안에 복수하는 것이지.

하지만 그중 하나는 이룰 필요도 없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이었다.

개씨 집안에 복수하는 것.

그러면 난 마음 편하게 궁전에서 무위도식하며 살 수 있어.

염 귀인에 대한 일을 떠올리면 비원이나 타천천에게 화가 나지만, 그들이 내 생명을 구해준 일이 있으니 죽이려 할 수도 없었다.

그쪽과는 아예 연을 끊어버리고 지내는 수밖에.

그렇게 편히 살다가 아이가 태어난다면, 내게도 처음으로 피붙이가 생기는 거구나. 내게도 가족이 생기게 돼.

‘가족?’

뜻밖에 떠오른 단어에 멍하게 앉아 있는데, 국수를 만들겠다며 밀가루를 받으러 내무부에 갔던 부성이 “마마! 마마!” 하고 뛰어 들어왔다.

뒤에는 귀자가 밀가루를 채운 커다란 종이 포대를 들고서 같이 뛰고 있었다.

쳐다보자, 부성은 신이 나서 외쳤다.

“마마, 폐하께서 마마께 주신다고 준비한 궁이 완성되었다고 그쪽으로 옮기라십니다!”

“지금?”

“네. 이사 준비할까요?”

* * *

내가 살던 곳은 그리 큰 방이 아니니 이삿짐도 쌀 게 별로 없는 줄 알았는데.

막상 아예 거처를 옮긴다고 짐을 싸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쌀 짐이 많았다.

“귀자, 침상은 그대로 둬. 그쪽에 폐하가 준비해두신 침상이 있대.”

“다른 가구는요?”

“작은 가구만 챙기고 큰 건 그대로 둬. 가서 보고 없는 것만 가지러 오면 되니까.”

“보석함은 커도 가져가야겠죠?”

“당연하지!”

큰 가구를 가져가지 않아도 그 안에 든 물건을 빼내서 가져가야 하기에 손이 은근히 많이 갔다.

떡돌이가 내게 추가 녹봉을 주진 않았지만 소소한 선물은 자주 보내는 편이다 보니, 챙겨가야 할 패물도 꽤 많은 편이었다.

나는 평상에 앉아 궁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중에 내 아이가 태어나면 지금 이사하는 궁에서 계속 같이 지내려나, 생각해보았다.

음. 혹시 모르니 아이 방을 만들라고 할까? 방이 여러 개 남는 거 같던데.

“아, 귀자! 귀자!”

“네, 마마.”

“오늘부터 나도 그 본궁 그거 써도 되나?”

“되지 않을까요?”

내가 기뻐서 두 팔을 올리자 귀자가 얼결에 같이 두 팔을 벌리고, 우리가 마주 보고 두 팔을 벌리자 다른 궁인들도 일단 같이 만세를 불러준다.

우리는 신이 나서 만세를 부르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놀았다.

새로 받을 궁전을 구경하고 왔을 때는 기몽이 내 자작극을 눈치채는 바람에 기뻐하고 뭐고 할 틈이 없었는데.

이제 이사를 간다고 하자 갑자기 기쁜 마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런데 한창 좋아서 뛰어다니고 있자니, 그 소란을 들었나.

안비가 가장 커다란 방에서 나오더니, 팔짱을 끼고 울타리 너머에서 우리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만세 부르던 걸 멈추고 그녀를 보며 방긋 웃자, 안비는 픽 코웃음을 쳤다.

“안비 마마. 배웅하러 왔어요?”

내가 반갑게 인사하자마자 표정이 도로 굳었지만.

“아니. 드디어 이 귀찮은 팔자 눈썹을 더 안 보게 된 걸 기념하러 온 거예요.”

“그게 배웅 아니에요?”

“전혀 달라요.”

“내가 가니 싫어요? 배웅하기 싫을 정도로?”

“아니라니까!”

딱 잘라 끊어버린 안비는 눈썹을 구기고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픽 웃으면서 나한테 하는 말인지 자기 옆에 서 있는 궁녀에게 하는 말인지 알아듣기 힘든 말을 했다.

“하긴. 더이상 천빈을 안 봐도 되는 건 좋긴 한데. 천빈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그것도 싫긴 하네요.”

“내가 떠나니 아쉽단 거죠?”

“아니라고!”

혼자서 버럭 소리 지른 안비는 갑자기 자기 쇄골 위에 손을 올리더니 호흡을 고르면서, 나랑 대화를 나누면 심장이 두근거린다느니 기가 막혀서 숨을 못 쉬겠다느니 하면서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그 증세는 아무리 봐도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때 나오는 증세 아닌가.

“안비 마마. 내가 좋아요?”

“깍!”

당황해서 묻자 안비는 질색하며 비명을 지르더니, “빨리 떠나!” 하고 외치고는 얼굴이 벌게져서 휙 돌아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자니, 원웅이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다가 말했다.

“안비 마마가 혼자 시비 걸다가 혼자 화내는 모습을 못 본다니, 저도 아쉽긴 하네요, 마마.”

“안비랑 있고 싶어, 원웅?”

“…….”

* * *

“안비는 사람이 좀 이상해.”

새 궁전에 도착해 새 침실 안에 들어가 새 잠옷을 입고서 과일을 먹고 있자니, 떡돌이가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떡돌이가 문을 닫자마자 이번 이사에 대한 내 소감을 알려주었다.

떡돌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내가 집은 과일을 입을 벌려 자기가 먹으며 웃었다.

“안비도 그렇게 말하던데.”

“소 눈에는 다 소밖에 안 보인다잖아. 안비가 이상한 사람이니 날 이상하게 보는 거야.”

“그렇군. 이게 괴짜의 시선인가.”

“뭐가?”

떡돌이는 설명하는 대신 빙그레 웃더니, 무거워 보이는 겉옷을 벗어 옆에 놓았다.

목욕을 하고 왔나? 그의 피부가 평소보다 유달리 촉촉해 보이고 몸에서는 희미한 꽃향기가 났다.

꽃잎을 띄워 놓고 목욕한 게 분명해.

무슨 꽃인지 냄새를 맡으려 코를 킁킁대자, 떡돌이는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한 번 비비더니 내 허리를 안고 침상으로 가 제 무릎에 앉히고서 물었다.

“새 궁에는 무슨 이름을 붙이고 싶으냐?”

“천빈궁 하면 되지.”

“……성의를 가지고.”

“천씨궁은?”

“앞날이 잘 풀리도록 상서로운 이름을 써야지.”

“내 성이 안 상스럽단 거야?”

“물론 상스럽지 않지. 좋은 성씨니까.”

“무슨 소리야? 안 상스러운데 좋은 성씨라니?”

떡돌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풀더니, 내 입술을 잠시 매만지다가 웃었다.

“우리 천빈은 항상 씩씩해서 좋아. 몰라도 당당해서 좋고.”

“?”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내가 인상을 구기고서 보자, 떡돌이는 나를 옆자리에 내려주며 말했다.

“생각나는 이름이 없거든 한 글자만 골라라. 짐도 한 글자 고를 테니, 하나씩 골라서 합치자.”

“그래! 내일 밤까지.”

“좋아.”

떡돌이는 흐뭇하게 웃더니 안에 입은 옷을 마저 벗었다.

옷을 벗다가 내 눈치를 보고 잠시 주춤하긴 했으나, 그래도 꿋꿋이 벗긴 했다.

나는 그 모습을 열렬히 바라보다가, 문득 낮에 하던 생각이 다시 떠올라 그에게 신이 나서 알려주었다.

“있지, 폐하. 떡돌아. 내가 오늘 생각해봤는데. 나한테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내 첫 혈육이야.”

떡돌이는 옷을 벗다가 내 말을 듣더니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렇군. 그런가.”

“전에는 별로 의미를 안 뒀는데. 잘 생각해보니 내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둘은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가족이 되는 거잖아.”

“…….”

“나는 내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줄 거고, 그 애도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 거야. 그 생각을 하니까 너무 좋아졌어!”

떡돌이는 내 말을 흐뭇하게 들으면서 듣더니 촉촉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갑자기 흠칫하고서 떨떠름하게 물었다.

“짐은?”

“뭐가.”

“너랑 네 아이가 뗄 수 없는 가족이면. 짐은?”

“아.”

“아? 아? 설마. 그 머릿속 가족계획에 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느냐? 듣고서야 ‘아’ 하는 수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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