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동상이몽
촉비는 훨이 돌아오자마자 물었다.
“알아보았느냐?”
훨은 촉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잠시 주저했다. 이 말을 해도 될지 말지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촉비가 그걸 보며 눈살을 구기자, 훨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천빈 마마께서는 촉비 마마를 연모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보고에 촉비의 이마가 대번에 찌푸려졌다.
“뭐라?”
촉비가 되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들었다고 여겼다.
훨은 촉비의 안색을 살피며 다시 말했다.
“천빈 마마께서는 촉비 마마를 연모하십니다.”
“지금 그걸, 보고라도 하는 것이냐.”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천빈 마마께서 폐하께 말씀하신 거니까요.”
“!”
“천빈 마마는 촉비 마마가 밉지만, 그래도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촉비는 눈을 깜빡이다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딱 잘라 부정했다.
“연모가 아니라 그냥 좋단 뜻으로 한 말이겠지. 폐하 앞에서 착한 척을 하려고.”
“그게…… 아닙니다. 절대로 그건 아닙니다.”
훨의 얼굴이 붉어졌다. 천빈이 쓴 ‘입을 맞추고 끌어안다’라는 표현이 떠오른 탓이다.
천년비는 떡돌이가 촉비의 몸 안에 들어갔을 경우를 가정하다 허풍 친 것이지만, 훨은 이 부분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촉비에게 바로 전해도 될지 몰라 그는 빨개진 얼굴로 자기 옷자락 끝만 만지작거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게…….”
“더 들은 게 있다면 똑바로 말하거라.”
그 태도를 눈치챈 촉비가 단호하게 말하자, 훨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천빈 마마께서는 폐하께, 촉비 마마와 끌어안고 싶다 하셨습니다.”
“!”
촉비는 목을 축이기 위해 들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소리가 나며 바닥에 잔이 부서졌지만, 그녀는 너무 놀라 이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 * *
“괜찮으십니까, 마마?”
바닥에 떨어져 깨진 잔을 치운 촉비의 측근 궁녀는 막 데워와 뽀얗게 김을 내는 뜨거운 차를 건네며 물었다.
촉비는 찻잔 뚜껑을 벗기고 올라오는 김을 후 후 불어 식히다가 중얼거렸다.
“괜찮고 뭐고 할 게 있느냐. 놀랐을 뿐이지.”
“저도 정말 놀랐습니다. 설마 천빈이 마마를 연모할 줄은…….”
“…….”
“게다가 그걸 폐하께서 이미 아시다니요. 폐하께서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어쩌면 그 때문에 폐하께서 천빈의 말을 믿은 걸지도 모르지.”
“네?”
“천빈이 날 연모하니까, 날 두고 거짓말할 리가 없다고 믿으셨을 수도 있다 말이다.”
“아! 정말 그렇습니다, 마마.”
궁녀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새로운 사랑일수록 더욱 빠르게 달아오른다지만, 그렇다고 함께한 시간이 아예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
몇 년이나 신뢰했던 촉비를 황제가 한순간에 져버린 게 이상하다 싶더라니.
황제가 천빈의 마음을 안다면 이 일에 천빈을 더 믿은 것도 어렵게 납득할 수는 있었다.
촉비가 뜨거운 차를 마시며 놀란 마음을 누를 동안, 궁녀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부채질을 해주다 물었다.
“그럼 이제 어찌하실 건가요, 마마?”
“어쩌다니?”
“천빈이 마마를 좋아하는 거라면…… 관계를 좋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마마께서도 천빈과 싸우는 건 서로에게 악영향뿐이라 하셨잖아요.”
“그랬지.”
촉비는 찻잔을 내려놓고서 시름에 잠긴 눈으로 어두컴컴해진 창밖을 보았다.
짝 없는 새가 푸드덕 날아가는 소리와 구애하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천빈은 내 필첩을 보고서도 처음엔 아무 움직임이 없었지.”
“네. 마마께선 천빈이 마마를 협박하러 올 거라 예상했는데, 아예 안 오니 더 수상하게 여기셨지요.”
“그래. 너무 조용하기에 뒤에서 날 공격할 준비를 한다 여겼다. 아니라도 내 비밀을 알았으니, 언제든 써먹을 거라 여겼지. 하지만 천빈이 날 사모해서 입을 다물었던 거라면…….”
“한번 잘 말해보세요, 마마.”
* * *
다음날 날이 밝자, 촉비는 당장 천빈을 불러서 ‘진짜로 날 사모하느냐’라고 묻고 싶었으나 꿋꿋하게 그 마음을 눌렀다.
이른 시간부터 상대를 보려 하는 건 자신의 초조함을 드러낼 뿐이다.
대화를 할 때는 자기가 느긋한 입장임을 밝히는 게 좋았다.
그녀는 차를 연거푸 다섯 잔 마시면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점심 식사를 하고 나자, 더는 참지 못하고 궁녀에게 천빈을 불러오라 지시했다.
“만약 안 올 거라 하면 어쩌지요, 마마?”
“정말로 날 좋아한다면 오겠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 어처구니없다 해야 할지, 천빈은 부르자마자 왔다.
여전히 눈썹이 축 내려가 순하고 맹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보아서는 천빈이 자신을 짝사랑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훨은 거짓말할 이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촉비 마마. 날 왜 불렀어요?”
마음이 조급해서인가, 천빈의 어설픈 존대도 오늘은 그리 거슬리지 않는다.
촉비는 천빈이 자리를 잡고 앉아 묻자, 약간 노골적으로 물어보았다.
“천빈. 그대는 혹시 나와 가깝게 지내고 싶나요?”
그 말에 천년비는 고개를 기웃하다 대답했다.
“그럼요.”
싸우는 것보다야 가깝게 지내는 게 나으니까.
촉비가 다시 물었다.
“나와 싸우고 싶지 않다는 거죠?”
천년비는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다 대답했다.
“그렇죠? 먼저 시비 안 걸었으면 나도 안 공격했어요.”
겉보기엔 멍한 얼굴이었으나, 사실은 ‘촉비가 왜 날 불러서 이런 말을 하나’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지금 한 말은 모두 사실이기도 했고.
천년비가 원하는 건 느긋하고 평화롭고 편안한 궁중 생활이지, 싸움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천년비의 대답에 촉비는 반쯤 확신을 가졌다.
천빈이 정말 날 좋아하는구나! 싸우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촉비의 머릿속에 천빈과 싸우기 전들의 일이 떠올랐다. 대체 언제부터 자신을 흠모한 걸까? 짐작하는 건 별달리 없었다.
촉비는 좀 더 생각하다가 이번에는 좀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안 싸운다면. 나와 어디까지 가깝게 지내고 싶은가요?”
천년비는 멀뚱히 대답했다.
“가까워질수록 좋죠.”
진짜 날 좋아하나 봐! 촉비는 더욱 확신했다.
그러고 보니 천빈이 그녀를 볼 때마다 좀 남다른 시선을 보낸 것도 같았다.
“혹시…… 나와 가깝게 지내는 그 이상을 바란다거나…….”
“그 이상이 뭔데요?”
“손을 잡는다거나…….”
“아 손잡으면 좋죠.”
마음을 숨기려 들지도 않는구나! 촉비는 당황스러워서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는 황제를 사랑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천빈을 사랑할 수도 없었다.
그 태도를 보며 천년비는 고개를 기우뚱했다.
촉비는 부채를 꺼내서 빠르게 부치다가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솔직히 좀 부담스럽네요.”
천년비의 고개가 더 기울어졌다. 뭐가?
“하지만 친구까지라면. 노력해볼게요.”
“?”
천년비는 목을 뒤로 빼고서 촉비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갑자기 촉비가 왜 저러는지도 모르겠고, 자신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도 영 당황스러웠다.
‘아니, 내가 언제 친구 하자고 했나.’
“이 정도가 내가 그대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이에요.”
‘뭐야 저 비싼 우정은.’
천년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촉비에게 우정을 베풂 받는 느낌이라 황당했다. 게다가 너무 뜬금없고.
그 표정을 본 촉비가 걱정스레 물었다.
“싫어요?”
천년비는 떨떠름해서 대답했다.
“아니…… 뭐 싫은 건 아니지만. 왜 갑자기 입장을 바꿨어요?”
대화를 엿들었단 말은 할 수 없어서 촉비가 대답에 뜸을 들이자, 천년비는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뭐지. 이래놓고 뒤통수 치려는 거 아냐?’
* * *
“촉비랑 화해했어.”
떡돌이는 이틀간 잠행을 다녀오자마자 나부터 찾아왔고, 나는 그가 오자마자 촉비 이야기를 해주었다.
떡돌이는 잠행할 때 입은 옷을 벗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알아. 너무 빠르지?
“갑자기?”
“응.”
“너무 뜬금없이 화해한 거 같은데.”
떡돌이는 겉옷을 벗어 내 옆에 앉더니, 부성이 반 시진에 걸쳐 다듬어 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짐이 떠나기 전만 해도 서로 칼을 갈더니. 다녀오니 화해했다고? 정말 화해한 게 맞긴 한가?”
“모르겠어. 부르더니 나랑 화해하고 싶대. 심지어 그걸 되게 베풀듯이 말해. 사람들이 다 자길 좋아할 거라 생각하나 봐. 하긴. 후궁들이 촉비를 많이 좋아하긴 해. 그래서 그런가.”
내가 툴툴거리자 떡돌이는 픽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거절했겠군.”
하지만 내가 단호하게 “아니.” 하고 대답하자 떡돌이는 인상을 찡그렸다.
“받아들였어. 친구 하기로 했어.”
떡돌이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왜?”
왜기는.
“촉비는 후궁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잖아. 인기 많은 사람이랑 친구 하면 나도 인기 많은 사람이 될 거 같아서.”
왜 떡돌이가 나를 저렇게 가엾게 바라보는지 모르겠다.
내 나름대로는 이것저것 재보고 결정을 내린 건데. 그 눈길 치우라.
“왜 이래. 촉비가 나더러 먼저 친구 하자 했어.”
하지만 떡돌이는 의심이 많았다.
“그러니 더 이상하단 거지. 방심하게 해놓고 공격하려는 거 아니냐?”
나도 딱 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서로 한 번씩 주고받았는데, 마지막으로 공격한 게 너 아니냐. 그런데 자기 차례에서 화해하자 한다고?”
“나도 마음으로 화해한 건 아냐. 의심하고 있어. 그래서 일단 공격은 안 해도 주시는 하려고.”
“그러면 다행이지만…….”
“걱정 마. 감시한다고 얼마나 자주 찾아가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도 가고 어젯밤에도 가고 어제 저녁에도 가고 어제 낮에도 가고 어제 아침에도 갔어.”
떡돌이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나를 더 이상하게 보았다.
“온종일 갔단 말 아니냐?”
* * *
“마마께서 허락해주시자마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다니. 천빈 마마는 정말로 마마가 많이 좋으신가 봐요.”
황제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이틀간 천년비의 행적을 듣고 혀를 차는 동안, 촉비의 궁녀는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며 혀를 차고 있었다.
훨의 보고를 믿었고, 천빈에게서 직접 촉비를 향한 마음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촉비가 아주 조금 곁을 주자마자 기뻐서 하루종일 곁에 있으려 드는 천빈을 보자 기가 막혔다.
“대체 폐하는 천빈의 어디가 그리 좋은가 모르겠어요. 천빈은 마마한테 완전히 빠졌는데.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가 있는 후궁이 왜 좋으시지?”
“우리는 폐하의 마음을 알 수 없지.”
촉비는 쓸쓸히 중얼거리고서 말끔히 가라앉은 거울 속 머리를 비춰보다 어설피 웃었다.
“어쨌든 확실한 건 폐하께서 천빈을 총애한단 거니까. 굳이 둘 중 하나가 죽는 싸움을 계속할 필요는 없지.”
“그렇죠.”
“그리고 천빈은 나와 친해지고 싶어할 뿐이었는데, 훨이 천빈이 말한 걸 오해한 건지도 몰라. 날 찾아와도 그 애는 평소처럼 맹한 소리만 하다 갈 뿐이지, 다른 점은 안 보이거든.”
* * *
“생각보다 천빈의 수완이 대단합니다, 황후 마마.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촉비는 그렇게 천빈을 못 죽여 안달이었는데. 지금은 죽고 못 산답니다. 며칠 새에 이게 가능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