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해줘
충격에 빠져 있자니, 문밖에서 오 공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기몽 장군께서 오셨습니다.”
기몽 장군이 내 일을 보고하러 왔나 봐.
떡돌이가 나를 놀리듯 쳐다본다. 네가 한발 앞서 왔네, 하는 표정.
나는 거만하게 웃다가, 곧 지금 이럴 때가 아니란 걸 깨닫고 얼른 책상에서 내려왔다.
“나는 이만 가볼게. 나도 좀…… 고민을 해 봐야겠어. 그 문제에 대해서.”
그러고서 밖으로 나오자, 문 앞에 서 있는 기몽 장군이 보인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들어오란 말을 기다리다가, 나를 발견하자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자기에게 이런 거 저런 거 죄다 걸렸으니 지금쯤 웅크리고서 달달 떨어야 하는데.
설마 내가 지름길로 와서 먼저 떡돌이에게 이실직고할 줄 몰랐나 보다.
그는 내게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안에서 “들어오라 하라.”라는 떡돌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도로 입을 닫고 꾸벅 인사만 올렸다.
이윽고 기몽은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곧장 내 처소로 돌아가진 않았다.
떡돌이의 말을 듣고 났더니, 이미 불안이 싹터버린 탓이었다.
비원을 찾아가서 떡돌이가 말한 상황이 진짜로 벌어질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꼴도 보기 싫지만.
* * *
황궁에 소속된 학사들이 자주 오가는 곳으로 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자, 비원이 먼저 알고서 내 쪽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명목상 황후의 지지자이기 때문인지, 그는 바로 내 곁에 오는 대신 멀찍이서 ‘이리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따라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구석진 후원으로 가자, 비원은 높은 수풀에 둘러싸인 곳에서 나를 불렀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곳으로 가자, 비원은 한숨을 내뱉으며 나를 질책했다.
“너무 대놓고 찾아오시는 거 아닙니까.”
이전이라면 그에게 미안하다고 할 테지만, 지금 나는 비원에게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비원이 염 귀인이 죽는 데 일조한 사람이란 걸 아니까.
물론 비원이 염 귀인을 칼로 찔렀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염 귀인이 위험한 저주에 손대게 한 사람은 맞잖아?
만약 그가 염 귀인에게 ‘이런 걸 하면 그쪽도 죽는데, 그래도 할 거냐’라고 물어봤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비원은 염 귀인 죽음에 7할은 책임이 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어쨌든 비원에게 이런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기에, 나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는 대신 팔짱을 끼고 딱딱하게 물었다.
이 정도는 불만을 드러내도 된다.
그와 손을 잡고서 촉비의 필첩을 드러나게 하려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으니.
“네. 물어보시지요.”
“나 말이야.”
“예.”
“내 영혼.”
“예.”
“혹시 내 원래 몸이나 지금 몸 말고. 다른 몸에 들어갈 수도 있어?”
“다른 몸이요?”
“다른 사람 몸이라거나, 운 나쁘면 아예 동물 몸이라거나. 거북이 같은 거 있잖아.”
비원은 입을 벌리고 나를 멀뚱히 보았다. 그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큰 생각을 안 해본 것 같았다.
“글쎄요. 그렇게까지 생각해보진 않아서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그냥.”
떡돌이가 내가 다른 몸에서 깨어나면 어쩌냐고 무서워하기에.
하지만 이들은 떡돌이가 진실을 안다는 걸 모르지. 말해주지 말자.
“그런 상상이 들었어.”
솔직하게 말하자, 비원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작고 빠르게 대답했다.
“혼령술에 대한 건 타천천 님께 물어보는 게 가장 빠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타천천 님께서 일임하고 있으니까요.”
“타천천이.”
“예. 하지만 제 생각엔 아마 안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애초에 천빈 마마의 몸으로 깨어난 것도 변칙 같은 상황이었는걸요.”
그런가.
하긴. 영혼이 이리저리 아무 데나 튄다면 ‘천년비진쾌도래’라 쓴 쪽지를 파냈을 때 내가 다시 이 몸에서 깨어나진 않았겠지.
근처 어디 몸에서 깨어났을 거야.
“알았다.”
나는 중얼거리고서 돌아섰다.
비원은 의아한 듯 내 옆모습을 보았지만, 얼른 돌아가야 하는 듯 더 말을 섞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급히 걸어갔다.
* * *
“기몽이 천빈에게 갔다가 바로 폐하께 갔다. 폐하께 갔단 건 보고할 게 있단 거지. 분명 내 사가에 그 괴상한 종이를 묻어둔 이는 천빈이 분명해.”
그 시각.
촉비는 자신의 방에 앉아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쑥불쑥 치솟는 분노를 삼키려 애썼다.
기몽은 황제가 진실을 편들 거라 여기고 갔는지 모르겠으나, 촉비는 황제가 지금은 천빈을 편들 거라 확신했다.
이번에도 처음에는 목격자가 수두룩한 자신을 믿었으면서.
천빈이 몸이 아프다고 두문불출하고 꾀병을 부려대자 결국 그녀를 편들지 않았던가.
게다가 맡겨둔 선황제의 서찰까지 전부 다 가져가고.
“마마. 그렇게 손톱을 물어뜯으면 손톱이 다 망가집니다.”
궁녀가 걱정스럽게 옆에서 말하자, 촉비는 그제야 물던 손톱을 놓았다.
촉비의 손을 가져간 궁녀는 얼른 그 위에 약을 바르고 부채를 건네주었다.
혹시 촉비가 또 손톱을 물지 모르니 일단 뭐든 움직일 만한 걸 쥐여준 것이다.
촉비는 초조하게 부채질을 하면서 천빈에 대해 생각했다.
“마마. 고정하시지요. 기몽 장군께서 마마의 누명을 벗겨 주셨으니 별일 없을 거예요. 기몽 장군은 남에게 뭘 덮어씌우는 성정이 아니잖아요.”
“기몽은 아니지. 하지만 천빈은 아니야.”
“천빈이 마마께 또 해코지를 할 거라 생각하시나요?”
“벌써 두 번이나 시도했다. 세 번은 시도하지 못할까, 과연?”
“마마…….”
촉비는 황제와 사랑을 나눌 거란 기대는 하지도 못했기에, 그저 그의 신임을 얻으면서 평화롭게 지내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이 모든 게 가능했다.
그녀는 혜비와 친했고, 황후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며, 황제의 신뢰를 얻었으니까.
그녀를 고약하게 대한 친정 식구들은 이젠 촉비가 자신들에게 복수라도 할까 봐 설설 기었고, 뻔뻔한 이들은 촉비가 당연히 자기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식구들은 촉비가 힘을 잃게 되면, 가장 앞에서 칼을 들고 달려들어 그녀를 내치고 그 자리에 자기 여식을 올리려 할 것이다.
촉비는 절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마마. 천빈과 화해해 보면 어떨까요? 원래 마마께선 천빈과 사이가 나쁘지 않으셨잖아요. 천빈이 그…… 마마의 필첩을 보지만 않았더라면…….”
“이미 우리는 여러 번 서로를 공격했어. 어떻게 화해한단 말이냐. 화해하더라도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 있을까?”
코웃음을 친 촉비는 부채를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와 천빈,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어.”
쓸쓸하게 중얼거린 촉비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이 데리고 있긴 하지만 평소에는 일부러 거의 부리지 않는, 비장의 힘처럼 아껴둔 그림자를 불러 지시했다.
“훨아.”
이름이 불리자 창밖에서 덜컹대는 소리가 나더니, 머리카락을 길게 내려 거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네, 마마.”
‘훨’이란 불린 이가 촉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채를 들어 몇 번 바람을 일으킨 촉비가 차갑게 지시했다.
“오늘 기몽이 다녀갔으니, 천빈은 분명 내 이야기를 할 거다. 너는 천빈의 처소로 가서, 그 여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 와라.”
* * *
저녁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 앉아 몇 숟가락 먹고 있자니, 떡돌이가 찾아와서 함께 식사하자고 한다.
마침 몇 술 뜨지 않았을 때라 나는 떡돌이가 먹을 음식을 더 가져오게 하고서 같이 식사하면서 우리의 걱정거리에 관해 이야기했다.
“네가 그 얘길 하고 나니까 나도 자꾸 그 생각만 들어, 떡돌아. 어쩌지?”
“이렇게 하지. 네가 만약 다른 몸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짐에게 신호를 보내라. 우리 둘만 알아볼 신호를 정하자.”
“신호? 우리가…… 정한 그 신호?”
“그래.”
떡돌이는 자기 제안이 퍽 마음에 드는지 숟가락을 내려놓고 벗어둔 면사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안 돼. 전에 폐하가 알려준 원앙 어쩌구 한 것도 사실 다 까먹었단 말이야.”
“뭐라고? 벌써?”
“기억에 남는 건 원앙이 하나둘…… 밖에 없어.”
“내용이 다른데?”
“그러니까.”
떡돌이가 나를 일자무식처럼 쳐다보는 바람에 좀 부끄러워져서 나는 정색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일자무식이 아니야. 나는 머리가 나쁘지 않아. 나는 공부를 못할 뿐이야.
내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떡돌이는 자기 이마에 손을 올리고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표정이 마치 ‘상대가 바보가 아니면 바보라 놀리겠는데, 진짜 바보 같아서 바보라 놀리질 못하겠다’로 보여서 나는 발끈해 그의 손가락을 톡 두드렸다.
“내가 진짜 멍청이 같아서 멍청이라 못 부르겠다 이거야?”
목소리를 낮추어 항의하자, 떡돌이는 이마에서 손을 떼더니 기가 막혀 물었다.
“왜 욕만 잘 알아듣는 거지? 욕 알아듣는 솜씨만 보면 정말로 영리한데.”
내가 팔짱을 끼고서 가자미눈을 하고 보자, 떡돌이는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숟가락을 쥐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는 조금이라도 똑똑해 보이기 위해, 지금 우리에겐 암호를 외우는 게 문제가 아니란 걸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암호를 외워도 소용없어. 내가 암호를 외웠는데 거북이나 물고기 몸에 들어가면 어쩔래?”
‘다른 몸에 들어가면 어떡하냐’는 자기가 먼저 낸 의견이면서.
거북이 생각은 하지 못했던지 떡돌이는 입을 벌리고 숟가락을 또 내려놓았다.
너무 충격을 받은 얼굴이라, 그걸 보니 슬며시 불안해져서 나는 슬며시 물었다.
“내가 거북이가 돼도 폐하는 날 사랑할 거지?”
“…….”
대답해 자식아.
“왜 말이 없어?”
“…….”
“폐하. 날 사랑할 거지?”
어라? 진짜 말이 없네?
“안 사랑하겠다는 거야?”
내가 도끼눈을 뜨고 묻자, 떡돌이는 주저하다가 중얼거렸다.
“잠시만. 생각을 좀…….”
“세상에. 폐하는 내 몸을 노린 거야? 내가 거북이가 되면 날 사랑할 수 없어?”
“아니, 평생 길러주긴 하겠지. 하지만 거기에 사랑을 담기는 좀…….”
“너무해! 입도 맞춰주고 안고 자고 하지 않을 거야?”
자기가 궁지에 몰렸다 싶던지, 떡돌이는 갑자기 발끈해서 반박했다.
“너는? 너는 짐이 거북이가 되어도 사랑할 수 있느냐?”
“물론 그건 아냐.”
이번에는 떡돌이가 도끼눈을 뜬다.
쪼잔한 황제가 신경질을 낼 거 같아서, 나는 얼른 예시를 바꾸었다.
“좋아. 동물이나 물고기 같은 건 말을 못 하니까 넘어가자. 그럼 사람으로. 예를 들어서…… 승언이. 내가 승언이 몸에 들어가면? 그땐 날 사랑해줄래?”
우리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지키기 위해 직접 음식을 들고 가져오던 오 공공이, 마침 그 소리를 듣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물론 음식도 다 엎어졌다.
떡돌이는 오 공공에게 괜찮냐고 물어본 뒤, 그가 괜찮다면서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내게 짜증을 냈다.
“넌 왜 맨날 승언이 가지고-.”
“폐하는 진짜 내 몸만 사랑하는구나.”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지 않느냐.”
“아니야. 맞아. 왜냐. 나는 폐하가 촉비 몸에 들어가도 폐하를 사랑할 수 있거든.”
오 공공은 엎어진 음식을 치우기 위해 밖으로 나갔고, 나는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난 사랑할 수 있어.”
“글쎄.”
“진짜야. 난 촉비가 미워. 하지만 촉비랑 입을 맞출 수 있어. 끌어안을 수도 있어.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어. 아니, 정말로 사랑해.”
“하.”
“내 마음이 폐하보다 더 큰가 보다.”
떡돌이는 코웃음을 쳤다.
* * *
그리고 오원요가 음식을 엎으면서 생긴 소란을 틈타 천빈의 처소 가까이 다가온 촉비의 그림자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부릅떴다.
‘애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