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78화 (178/283)

##  178화. 현실적이지 않지만 현실적인 고민

물어 오라고 저 너머로 공을 던졌더니, 사냥개가 공을 물고 와서 내 머리에 내다 꽂아버리는 기분이다.

이 사냥개는 역시 내가 다루긴 힘든가 봐.

하지만 별개로 비원에게는 화가 났다. 염 귀인이 죽은 게 비원의 저주 때문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염 귀인은 내가 여기 와서 처음으로 사귄 후궁 친구였다.

그녀는 엉터리지만 내게 수 놓는 법도 가르쳐 주었지.

내 몸과 이름을 사용해 멋대로 행패를 부리는 것도 싫은데, 그 과정에서 염 귀인을 죽이기까지 하다니.

사하비단에 완전히 정이 떨어진다.

원래도 좋아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타천천이 날 구해주었다기에 거슬리는 모든 행동을 넘어가 주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기몽은 나를 재촉하는 대신 다 식었을 게 틀림없을 차를 느리게 마시며 내 반응을 하나하나 살폈다.

나는 ‘후’하고 소리 내어 바람을 뱉었다.

속마음이야 비원에 대해서 기몽에게 다 던져줘 버리고 싶다.

하지만…… 비원에 대해 말하면 기몽이 내 비밀까지 알게 될 거야.

기몽 머리 돌아가는 걸 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라.

아니, 보통은 ‘종이를 묻어서 사람이 죽었다’는 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고.

특히 저렇게 수사하는 사람들은 그런 데서 말도 안 된다고 포기한단 말이야.

다른 일로 잡히게 되면 비원은 내 이름을 안 팔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비원을 팔아넘겨서 잡히게 되면, 같이 죽자고 나올지도 모르지.

“난 모르겠는데.”

결국 비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나는 기몽에게 딱 잡아뗐다.

그리고 기몽이 우 답응이 유폐된 일을 왜 나와 연관 지었는지는 조목조목 설명하지 않고 두루뭉술 넘어간 일을 떠올리고서, 일부러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우 답응이 유폐된 건 날 독살하려다가 걸려서지. 내가 뭘 어떻게 한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럴까요?”

“그럼. 게다가 장군 말대로라면, 비원 그자는 날 계속 죽이려 한 자인데. 내가 어떻게 그자와 손을 잡겠는가?”

“…….”

기몽의 눈이 가느스름해진다. 그러지 마. 너는 그러면 무서워.

“내가 우 답응이 파묻은 종이를 꺼냈다가 도로 파묻은 건 맞지만, 그땐 우 답응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결하기 위해서였네. 이번에 촉비를 공격한 것도 그쪽이 나를 선황제 서신과 엮어서 이상하게 몰아가려 하니까, 방어하려고 한 거지. 자기에게 관심이 집중되면 헛된 짓은 못할 테니까.”

내 말에 기몽은 인상을 찌푸렸고 입가에는 미소를 띠었다.

그럭저럭 넘어가겠단 걸까, 아니면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슬쩍 그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전자에 가까웠다.

“그렇군요.”

덤덤히 수긍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 일은 우선 이렇게만 보고 올리겠습니다.”

나도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기몽이 밖으로 나가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나는 얼른 지름길로 떡돌이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에 먼저 달려갔다.

‘이런 건 선빵이 중요해!’

기몽이 보고하기 전에 나한테 유리하게 먼저 말해 놔야 한다. 나를 변호해야지!

“반숙아?”

마침 떡돌이는 회의 중이 아니어서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얘기해도 괜찮아요, 폐하?”

내가 소곤소곤 묻자, 떡돌이는 영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이고 근처에 있던 대신들을 내보냈다.

그런데…… 뭐야, 저 아저씨는? 왜 나가면서 나를 저렇게 무섭게 쳐다봐?

어쨌든 대신들이 나가자, 오 공공이 직접 내가 마실 찻잔을 가져와 놓아주었다.

나는 떡돌이 곁으로 다가가서 기몽과 나눈 이야기를 이실직고했다.

떡돌이는 오 공공이 나한테 주고 간 차를 자기가 마시면서, 내가 잠깐 말을 멈추고 눈치를 볼 때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의식중에 저러는 것 같았다.

나는 귀자가 같이 파묻었단 것만 빼고 다 털어놓은 다음, 떡돌이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황급히 변명했다.

“그땐 너무 화가 났단 말이야. 촉비가 내 궁녀들을 공격해서 복수하려 했는데, 복수는 하지도 못했지. 너는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화를 내고 얼굴도 안 만나주지. 있는 줄도 몰랐던 선황제 폐하 서신 가지고 이상하게 몰렸지. 노리던 필첩은 사라졌지. 복수하고 싶었어.”

떡돌이는 내 말에 입을 다물고는 한숨을 내쉬고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이마에 올라온 파란 멍을 힐긋대다가, 나는 기죽은 척 중얼거렸다.

“너도 내 소문을 들어서 알겠지만…… 난 먼저 때리진 않거든? 그런데 누가 날 때리면 절대 참진 못해. 날 때리면 나도 때려야 해. 네가 내 이런 점이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떡돌이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드리다가 또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누가 널 공격한다면 너는 또다시 이런 일을 하겠군?”

“주먹으로 안 싸우고 머리로 싸우는 게 내 나름의 양보야.”

“주먹…….”

떡돌이는 세 번째로 한숨을 내쉬면서 자기 이마를 짚다가, 뒤늦게 자기가 내 차를 다 마셨단 걸 깨달았는지 머쓱하게 찻잔에서 손을 뗐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떡돌이는 화를 내는 얼굴은 아니었다.

“다른 후궁들도 다 암투를 하잖아. 떡돌이 너도 그런 비슷한 얘기를 한 적도 있잖아.”

거기에 용기를 얻어서 다시 말해보자, 떡돌이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긴 했으나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렇지.”

“나도 그런 거야. 단지 익숙하지 않아서 드러날 뿐이지.”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지금 화를 안 내고 있지 않으냐.”

화는 안 내고 있지만 계속 입 밖으로 한숨이 나오니까 그렇지.

책상에 기댄 채 그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책상 위에 걸터앉아 그를 살폈다.

떡돌이는 본인 말처럼 화는 내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있을 뿐. 실망인가? 실망하고 있나?

촉비를 역모죄로 넣으려 했던 건 누명이었는데, 촉비를 다른 후궁을 저주한 일로 넣으려 한 게 드러나서 어이가 없나?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미안해하는 건지 신경질을 내는 건지 알기 힘든 목소리로 말했다.

“궁중 암투가 계속되고 있단 건 짐도 안다. 하지만 보통은 그런 이야기를 짐에게 하진 않아.”

“나도 몰래 하려 했어!”

밝게 웃자 떡돌이의 표정이 굳어서, 나는 다시 뉘우치는 시늉을 했다.

물론 전혀 뉘우치지 않았지만. 나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다음에는 안 걸리고 할게.”

하지만 떡돌이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아서, 조금 시무룩해졌다.

서로 비밀을 털어놓고 잠자리에 든지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떡돌이가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단 걸 알다 보니 콩만큼 신경이 쓰였다.

그의 총애가 없어도 후궁으로 잘살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떡돌이가 날 보면서 이전처럼 웃고, 그와 꼭 끌어안고 있는 건 좋으니까.

그렇지만 이젠 안 그러겠다고 하기엔 안 그럴 것 같지도 않고, 사과하기에는 별로 사과할 마음도 없는지라, 나는 슬쩍 책상에서 도로 일어섰다.

“지금은 내 얼굴 안 보고 싶지? 그냥 갈게.”

돌아서려는 나를 떡돌이는 손을 뻗어 잡았다.

돌아서다 말고서 다시 그를 보자, 떡돌이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채로 말문을 열었다.

“일단…….”

“응.”

“반숙아. 짐은 정말로 화가 난 게 아니야. 짐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건 화가 나서가 아니라…… 네가 말한 그 종이로 영혼을 부르는 일 때문이다.”

“그게 왜?”

떡돌이가 네 번째로 한숨을 내쉬었다.

“넌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 계속 지금 몸으로 있을 거라 하였지.”

“응.”

“그런데 네 말을 들어보니, 네 의지와 상관없이 네 영혼을 도로 원래 몸에 넣을 수 있는 거 같아서 그런다. 그 ‘비원’이란 가명을 쓰는 자가 네 영혼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건가?”

비원은 끄나풀이고 실제로 이런저런 걸 하는 건 타천천 같았지.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비원이 내가 천소여 영혼 행방에 물었을 때 타천천에게 물어보라 했어.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아마…….

“굳이 안 그러지 않을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지금은 내 몸에 다른 사람이 있잖아.”

타천천은 내 이름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데.

내가 원래 몸으로 돌아가면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할 테니, 굳이 내 영혼을 돌아오게 하진 않을 거 같다.

그럴 마음이 있었더라면 진즉에 바꾸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게다가 타천천이 지금 내 몸 안에 집어넣은 그 영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타천천을 잘 따르는 것 같았는걸.

그가 내 명성을 노리는 거라면 자기 말을 잘 따르는 영혼을 내 몸에 넣어 이름을 쓰는 게 낫지, 굳이 내 영혼을 도로 가져가려 할까?

하지만 내 마음과 달리 떡돌이는 그 부분이 가장 심각해 보였다. 혹시…….

“떡돌이 너는.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싫을 거 같아?”

슬그머니 그가 기분 나쁜 부분을 유추해 묻자, 떡돌이는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구겼다.

아, 뭐. 아닌가. 아니면 아닌 거고.

그 반응에 웃으면서 “아니면 말고.”라고 중얼거리자, 떡돌이는 다섯 번째 한숨을 내쉬더니 내 손을 꽉 잡아다가 손등 위에 가져다 댔다.

얇은 면사 너머로 그의 입술이 느껴져 등이 움찔했다.

멍하게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자, 떡돌이는 면사를 벗더니 내 맨손 위에다 다시 입을 맞추고서 손바닥을 엄지로 누르며 잔소리했다.

“넌 짐이 널 생각하는 만큼 짐을 생각하진 않는 거 같군.”

“왜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큰 비밀까지 짐과 나누어 놓고서. 짐을 대할 때 늘 ‘아니면 말고’ 하는 태도로 대하니까. 심지어 자기만 그러는 것도 아니야. 짐도 그럴 거라 생각하지 않느냐.”

“내가 언제?”

“이실직고하러 들어와서부터 계속 쭉. 넌 짐과 대화를 해서 풀 생각보단, 짐이 화를 내면 ‘어쩔 수 없지’ 하고 돌아서서 갈 생각만 하지 않느냐.”

아니라고 말하려다 보니 맞는 말이다.

입을 우물거리려니, 떡돌이는 아예 내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얼결에 뒤로 물러나다가 도로 책상에 앉게 되자, 그가 허리를 조금 굽혀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손을 올렸다.

얼굴을 가만가만 만져보는 손길은 느릿하지만, 열감이 있었다.

“왜 그래?”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묻자, 떡돌이는 내 눈가와 코 근처, 입가를 찬찬히 어루만지다가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눈. 화나면 콧잔등을 잔뜩 찌푸리는 이 코.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겠는 이 입. 네가 없으면 짐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 보았다.”

“어떨 거 같은데……?”

떡돌이는 대답 대신 오히려 질문했다.

“넌 짐이 없으면 어떨 거 같으냐?”

“아, 나야 뭐.”

서운하겠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살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리 나라도 지금은 이 말을 하면 안 된단 건 안다.

“많이 섭섭할 거 같아.”

어찌어찌 산다는 말은 빼고 솔직하게 말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떡돌이는 도끼눈을 뜨며 웃었다.

“거봐. 넌 짐이 널 생각하는 만큼 짐을 생각하지 않는다니까?”

“그럼 넌? 내가 없으면 못 살기라도 한단 거야?”

내가 가출했을 때 너도 잘살았잖아. 속으로 구시렁거렸으나 그 불만이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떡돌이가 내 입에 입을 맞춰버린 탓이다.

한참 만에야 그는 내 입에서 자기 입술을 떼더니, 느리게 숨을 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왜 입을 맞추고서 눈썹을 찡그리고 그래?”

“무서워서.”

“뭐가.”

“네가 가출한 거면 어디 있는지라도 알지. 네가 원래 몸에 돌아가면…… 그것도 놀랍지만 그래, 그래도 어디 있는지 알 수는 있지. 그런데 네가 갑자기 또 다른 몸에 들어가면? 넌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 보았느냐? 짐은 네 말을 듣자마자 그것부터 무서워지는데?”

이럴 수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근데 듣고 보니 나도 무섭다.

타천천 그놈, 나한테 화가 나면 혹시 내 영혼을 천소여 몸에서 다른 데로도 옮길 수 있나? 물고기라거나 거북이라거나……!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