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네가 그러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잖아
여기서 절대로 같이 엄지를 들어주면 안 된다.
나는 흥분하는 대신 아무렇지 않게 기몽 장군에게 되물었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말하고 나니 그러네. 떠들썩했을 텐데, 기몽 장군이 모를 리가 없잖아.
같이 행궁에 내려가지 않았더라도 이미 며칠이나 지났는데.
예상대로 기몽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은 하고 소문도 들었지만, 체감하기엔 더 작은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보통은 소문이 더 크지. 하지만 이번엔 소문보다 더 큰 일이었다네.”
왜냐. 내가 가출했거든. 그것도 꽤 오래.
거의 몇 주간 자리를 비웠으니, 사실 진실이 다 알려진다면 지금 소문보다 훨씬 떠들썩했을 것이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기몽 장군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나중에 또 인사드리겠다 말하고서 돌아서 걸어갔다.
나와 귀자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기몽 장군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주고받았다.
“본 거 같지?”
“네. 발견한 게 분명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무슨 일이 있었나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마마.”
* * *
귀자가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겠다며 간 사이.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서 기몽이 내가 이끄는 대로 제대로 움직여줄지 생각해보았다.
머리가 좋으니 기몽과 촉비가 부딪치면 기몽이 이길 것 같은데.
문제는 너무 머리가 좋아서, 자기가 이용당하는 걸 알면 대번에 고개를 돌려 날 깨물 인간이라 찝찝하단 말이지.
어쨌든 그의 사냥개 정신이 제대로 발휘되길 기다려보자.
그리고 기몽이 사냥개 정신을 발휘할 동안, 나는 떡돌이가 어떻게 해야 나와 손만 잡고 자지 않을지 좀 고민해 봐야겠다.
* * *
오늘 밤도 당연히 떡돌이가 날 부르겠지, 생각하면서 저녁 간식 배를 조절하고 있을 때였다.
원웅은 오늘 밤에는 내가 무슨 옷을 입는 게 좋을지 고르느라 열심이었고, 부성은 맞은편에서 과일을 깎아주고 있었다.
그때 귀자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내게 은근한 눈짓을 보내는 게 아닌가.
‘뭔가 알아 왔구나.’
나는 원웅과 부성에게 각기 심부름을 시킨 다음, 둘이 나가자 귀자에게 앉으라 지시하고서 허리를 세웠다.
그러고는 귀자가 앉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어떻든? 찾아봤어?”
“예. 촉비 마당에서 누가 뭘 발견했답니다. 그런데 바로 기몽 장군한테 그 이야기를 한 건 아니고요. 촉씨 집안에 기몽 장군 밑에서 일하는 수사관이 하나 있대요.”
“그 사람 통해서 이야기가 흘러 들어간 거야?”
“네. 기몽 장군이 낮에 촉씨 집안에서 누구를 부르기도 하고, 오늘은 촉비를 부르기도 했다는군요.”
“촉비가 뭐라 했다는데?”
“거기까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긴. 아무리 귀자가 조용조용히 캐고 다녀도 그런 건 알아내기 어렵겠지.
사실 이 정도로 정말로 잘 알아낸 거다.
“혹시 또 알아낸 게 있으면 알려줘.”
“네, 마마.”
귀자가 완전히 내 사람이 되니까 편하구나. 구해준 보람이 있다.
물론 보람 있으라고 구해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데 그와 더 얘기를 나누려는데, 문밖에서 원웅이 “마마.” 하고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왜?”
귀자와 대화하길 멈추고서 머리만 쭉 내밀어 대답하자, 원웅이 수건을 손에 들고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알려주었다.
“마마. 황제 폐하께서 마마를 부르세요. 오 공공이 밖에서 기다리십니다.”
원웅은 그렇게 말하고는 아까 자기가 고르다가 내려놓고 간 옷을 아쉽게 바라보았다.
“저걸 마저 다 골랐어야 하는데……!”
고르다가 내가 다른 심부름을 시켜서 못 고른 게 아쉬운가 보다.
나는 가장 위에 놓은 연한 회색 옷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뭐 어때. 저거 입고 가지.”
최종 결정을 내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자기가 골래 놓고서 원웅은 불만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더 살펴볼 시간은 없다 여겼는지 그녀는 마지못해 그 옷을 가져오며 귀자에게 나가라 손짓했다.
귀자가 나가자 부성이 들어왔고, 그 둘은 딱딱 박자까지 맞추어가며 내게 그 옷을 입혀주었다.
옷을 다 입은 다음에는 머리카락도 한 가닥씩 나누어 맡고서 최선을 다해 땋아주었다.
준비를 끝내고 화장대에 달린 거울을 보자 제법 운치 있어 보이는 분위기가 완성되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떡돌이가 보내온 가마가 있어서, 나는 그 위에 앉아 몸을 옆으로 편안하게 기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촉비와 귀자에 대한 생각이 떡돌이에 대한 생각으로 넘어갔다.
눈치 없게도 내가 자기를 건드리면 장난을 치려는 거라 생각하는 그 황제 말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 떡돌이에게 내가 눈을 찌르거나 거길 뽑아버릴 생각이 없단 걸 알릴 수 있을까?
그런데 또 애매한 것이, 가서 내가 열정적으로 막 달려들고 할 정도로는 나도 흥이 없거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이 정도랄까.
그러는 사이. 마침내 가마가 멈추었다.
이제는 익숙한지라 나는 가마에서 톡 튀어 나가서 얼른 떡돌이가 기다리는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먼저 운문비단으로 만든 잠의를 입고 침상에 기대듯 누운 채 허벅지 위에 책을 올려놓고 읽고 있었다.
얼마나 깊게 집중했던지, 내가 왔는데도 고개도 들지 않고 손만 쭉 뻗는다.
다가가서 그 손을 깍지 껴 잡자 떡돌이는 내 손을 한 번 조물조물하고는 놓아주고서 다시 책을 한 장 넘겼다.
“그게 재밌어?”
불러서 왔는데도 서책만 읽은 그 태도가 황당해서 묻자, 떡돌이는 고개를 들더니 “어.” 하고 대답하다가 돌연 짓궂게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우리 반숙이도 서책을 가까이하지 않던가? 영민하고?”
나는 부정했다.
“어째서 그런 오해를 하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서책을 가까이하지 않아. 나와 서책 사이엔 거리감이란 게 있거든.”
“그래? 그럼 우리 무림 영웅께선 뭘 좋아하지?”
“그런 걸 왜 물어?”
“생각나서. 전엔 혼자 있을 때 춤추는 걸 좋아한다고 했지. 하지만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도 다시 확인해야 하니까.”
나는 걸치고 온 겉옷을 옆에 둔 다음 떡돌이를 넘어 침상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도발적인 마음이 들어 그의 배 위에 올라앉았다.
떡돌이는 웃고 있다가 당황해서 입가가 얼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책을 집어다 휙 옆으로 던지고서,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누우며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선물이야. 안에 독이나 비수 안 든 것으로.”
“참으로 속물적이고 솔직하구나.”
얇은 운문 비단 잠의 위에 귀를 대자 평온한 말투와 달리 그의 심장이 콩닥콩닥 아주 야무지게도 뛰는 게 들려온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하지만 내가 자기 배 위에 앉아버리자 몹시 놀랐나 보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마침 떡돌이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그 상태로 떡돌이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는 두 손을 침상 바닥에 붙인 채 어색하게 누워 있다가 못 참겠던지 물었다.
“이게 뭐 하는 거지?”
“가까이서 보니까 폐하 얼굴이 참 잘났다 싶어서. 구경 좀 하고 있었어.”
솔직한 대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둘러대자, 떡돌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태도였다.
태도만 이렇지 반응이 온 건 아닐까 싶어 슬쩍 아래를 보았으나, 옷 때문에 확인이 어렵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보다가, 좀 가소로운 핑계를 대고 물었다.
“내가 여기 어디쯤 수놓아 준 원앙이 잘 있나, 한 번 확인해봐도 될까?”
그러면서 그의 잠의 위에 손가락을 대고 동그랗게 문질러보자, 떡돌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나는 슬쩍 그의 상의 옷자락을 잡고 아래로 당겨보았다.
허술하게 여민 상의를 잡아당기자, 대번에 고름이 풀리면서 멀끔한 그의 상체가 일부 드러났다.
역시 얘는 무공을 익혔어.
단순히 체형을 잘 타고났다고만 할 수 없는 이 탄탄한 근육을 봐봐. 내공도 익히고 외공도 익혔을 거다.
침이 넘어가려고 해서 나는 괜히 큼큼 소리를 내면서 꼴깍 침을 삼킨 다음 슬그머니 그 위로 손을 가져가 보았다.
“원앙이 어디 날아가나…….”
하지만 내 손이 그의 가슴을 움켜잡기 전. 떡돌이가 내 손을 잡아 막았다.
눈살을 찌푸리고 쳐다보자 그가 불신 가득한 시선으로 알려주었다.
“원앙은 잠의 위에 그려져 있는데, 천반숙.”
그 태도를 보는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갑자기 얼굴에 열이 확 올라오면서 확 성질이 났다.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그냥 막 성질이 나서 나는 얼른 그의 배 위에서 올라온 다음 벗었던 신발을 신고 겉옷도 도로 걸쳤다.
“반숙아?”
떡돌이가 몸을 일으키며 따라 나오려 했지만, 나는 그대로 홀랑 밖으로 나가버렸다.
“젠장, 너 또 도망!”
뒤에서 떡돌이가 뭐라 구시렁거리며 따라 나왔지만, 나는 경공을 펼쳐서 그가 절대로 따라잡지 못하도록 재빨리 뛰었다.
하지만 떡돌이는 이참에 숨겨 두었던 무공 솜씨까지 공개해주고 싶은 듯 내가 나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완벽하게 뒤따라왔다.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가 대여섯 걸음 뒤에 있는 걸 보고서, 나는 기겁해서 더욱 빠르게 경공을 펼쳤으나 떡돌이 이 자식은 집요하게도 따라붙었다.
한참을 뛰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
“그만 따라와!”
그걸 보고 나는 기겁해서 그에게 따라오지 말라 외쳤다.
그런데 떡돌이는 안 따라오기는커녕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외쳤다.
“멈춰! 옆으로!”
왜 저러나 싶어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마자, 나는 조경용으로 심어 놓은 커다란 나무에 부딪혀 뒤로 홀라당 엎어졌다.
“악!”
내 이마!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데굴데굴 구르고 있으려니, 떡돌이가 황급히 내 옆으로 와서 나를 안아 들고 내 이마를 살폈다.
“괜찮으냐?”
이 와중에 야무지게 자기는 면사까지 챙겨 썼구나.
나는 이마가 화끈거려 죽겠는데.
떡돌이가 면사까지 반듯하게 쓰고서 걱정스럽게 날 보고 있자, 순간 뭔가가 확 치솟는다.
시침 한번 해 보자고 그의 배 위에 올라타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뭣도 모르게 구는 떡돌이가 참으로 너무하다 싶어서,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항의했다.
“사람들은 몰라. 아무도 몰라. 폐하가 고자란 건 나만 알아. 이건 우리 사이의 비밀이야. 나는…… 나는……!”
말하다 보니 그가 다시 가슴을 못 건드리게 한 게 생각나서, 나는 이마를 부여잡고 벌떡 일어나 그를 원망했다.
“난 폐하가 내 가슴을 건드리려 하면 건드리게 해줬을 거야. 우리는 부부니까! 그런데 폐하는 내가 가슴 좀 건드리려 한다고 바로 손목이나 붙잡고. 부부면서! 그러면 내가 뭐가 돼? 내가 변태가 되잖아.”
“!”
“내가 원할 땐 언제든 시침해도 된다면서, 거기서 그렇게 딱 손목을 붙잡으면 내가 뭐가 돼? 내가 변태가 되잖아. 그러면 나는……!”
내가 뭐라 지껄이는 줄도 모르고서 더 말하려 했으나, 떡돌이가 면사를 살짝 들어올려서 입을 맞추는 바람에 더 말하지 못했다.
이마는 엄청나게 욱신거리는데 코는 그에게 눌려 찌부러졌고, 이 와중에 입안으로는 뜨거운 숨결이 차올랐다.
하지만 혓바닥을 멋대로 누르고 입안 여기저기를 깨무는 그의 주둥이는 못된 혓바닥과 달리 좋았다.
그렇다고 이마가 안 아픈 건 아니지만.
입을 맞추면서도 내가 씩씩거리며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떡돌이는 내 입술에서 자기 입술을 떼더니, 잠시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넌 진짜 표현이…….”
“이마가 아파.”
“미안하다. 화 풀거라. 응? 네가 늘 짐을 흥분시켜 놓고 혼자 자버렸으니까. 이번에도 그러는 줄 알았다. 장난치는 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