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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74화 (174/283)

##  174화. 너무 오래 손만 잡았어

떡돌이 목소리가 이렇게 날카로웠었나.

물론 예전에 내시인 척 굴 때는 지금 목소리보다 일부러 더 높게 내긴 했는데.

지금은 목소리가 낮은 상태인데도 날카롭게 여겨질 정도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조금도 꿇릴 것 없단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사실 좀 콕콕 아리는 부분이 있었으나 티 내지 않았다.

“그래, 전 연인을 스승으로 두고 짐 앞에서 애정행각을 했다 이거지.”

“뭐래. 내가 개원이를 스승으로 달랬나? 자기가 줬지?”

“짐이 알았으면 줬겠느냐? 거절했어야지!”

“거절하면 이상하잖아. 자꾸 내가 천년비인가 아닌가 떠보는 눈치인데. 어떻게 거기서 거절해?”

“그래서 애정행각을 하셨겠다?”

“애정행각이래. 와. 내가 언제? 막 과장하고 그러지 마. 그러니까 속이 콩알에서 더 자라지 않는 거야.”

“뭐라? 짐이 콩알만 하다고?”

“그래!”

“짐이 콩알만 하면? 짐보다 훨씬 작은 너는?”

“난 원래 키가 컸어. 쪼그라든 거야.”

“어쨌든 지금은 콩알 아니냐.”

“!”

이 떡돌이가 아주 콩자반이 되고 싶어 환장을 했나.

분위기가 좀 좋아진다 싶자마자 이렇게 조그만 속 알맹이를 보여준다 이거지?

나는 씩씩거리며 소맷자락을 걷었다.

“후궁이 여럿인 폐하가 한 명 가지고 그러면 안 되지! 안 그래?”

“그래서, 짐하고 지금 쌍바람 맞바람이라도 피워보잔 거냐?”

* * *

안쪽에서 들려오는, 사실 제대로 들리진 않지만 두런두런한 음향에 귀자와 오원요, 승언은 흐뭇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런두런하던 목소리는 싹 사라지고, 유치하게 서로를 질책하는 목소리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오원요는 기겁해서 근처에 있던 궁인들을 죄다 물리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저절로 볼멘소리가 나왔다.

“아니, 오늘따라 사이가 좋으신가 싶더니만 두 분은 왜 또 저러실까.”

승언은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두 분 다 자존심이 세서 저러는 겁니다.”

다들 입을 다물었으나 속으로는 그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황제와 천빈은 둘 다 자존심이 몹시 셌다.

둘 다 진지하게 화를 내는 게 아니어서인지 저렇게 티격태격하다가도 잘 풀어서 다행이지, 아니라면 저렇게 붙어 있지 못할 것이다.

귀자는 억지로 웃으며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같이 붙어 계신 게 좋지요. 전처럼 따로따로 떨어져 계신 것보다는요.”

맞는 말이기에, 승언과 오원요도 고개를 끄덕이고서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방 안에서는 서로가 콩알이라 주장하는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오고 있었다.

* * *

중차대한 비밀을 털어놓고 얻은 게 ‘너는 콩알이다’ ‘너야말로 콩알이다’뿐이어서 황제와 천빈이 가벼운 마음으로 씩씩거리는 한편.

궁인들은 천빈이 그새 황제의 총애를 되찾은 일을 두고 수군거렸다.

같은 동영궁에 머무는 바람에 천빈이 저녁 무렵에 황제에게 갔다가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걸 본 안비는 차를 마시면서 한탄했다.

“천빈이 촉비를 공격하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가 싶더니. 오래 아프고는 바로 총애를 되찾아 버리네. 참 운도 좋지.”

그 말에 규빈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툴툴거렸다.

“운도 좋지요. 눈 내리는 날, 폐하께서 천빈을 방에 들여보내 주지도 않은 일로 병을 얻었다면서요? 그 때문에 사경을 헤매고 나니, 폐하께선 더욱 미안해서 잘해준다던데.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천빈을 싫어하진 않지만 이 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남빈은, 두 사람이 주도하는 흉을 듣다가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내밀었다.

“혹시 천빈이 의외로 두뇌파는 아닐까요?”

그 말에 모인 후궁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아니에요, 남빈.”

“절대 아니야, 동생.”

“천빈이 멍청한 거야 유명한걸요.”

“그 멍청해 보이는 것까지 머리 좋은 부분일지도 모르잖아요.”

남빈은 재차 자기 의견을 내밀어보았으나 다른 후궁들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니야.”

남빈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자기 찻잔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무조건 남빈의 의견을 웃으며 넘긴 다른 후궁들과 달리 승빈은 유심히 상황을 듣다가 그럴듯한 의견을 냈다.

“천빈은 분명 맹하지요. 하지만 천빈에겐 꽤 학식 좋은 지지자가 붙어 있잖아요. 등룡직에 있는 운월이요. 그자가 천빈에게 좋은 조언을 해준 건 아닐까요?”

“아.”

“맞아요, 그 사람.”

“하지만 그 사람은 청렴하기로 이름났잖아요?”

후궁들이 수군거리면서 한두 마디씩을 얹었으나, 승빈은 자기 제안에 완전히 취해서 흥분했다.

“진짜 청렴하면 천빈에게 붙지도 않았겠죠. 어쩌면 그자는 궁중 암투에 무척 능해서 천빈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준 걸지도 몰라요.”

그럴듯한 말에 다른 후궁들도 맞다고 맞장구를 치자, 승빈은 자신이 큰 비밀을 해쳐낸 듯 기분이 좋아져서 흐뭇하게 웃었다.

이 상황 속에서 비웃는 미소조차 짓지 못하는 건, 촉비의 입궁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혜비뿐이었다.

* * *

연달아 일주일 동안 시침을 들러 가서인가.

요즘 들어 원웅과 부성이 자꾸 내 배를 힐긋거리는 눈치다.

사실 힐긋거리기만 하는 게 아니다. 전에 혼자 비밀 연무장에 가서 훈련을 하려고 나서는데, 둘이서 이렇게 소곤거리는 것도 내가 똑똑히 들었다.

“매일 시침하러 가시는데 왜 회임하지 않으실까?”

“그러게. 회임하는 데 좋은 약재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마마께 슬쩍 여쭤볼까? 약재라도 좀 써보는 게 어떨지?”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나는 혀를 차고서 그 자리를 비켜섰다.

약재는 무슨.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내가 회임하지 못하는 건 시침하러 가서 떡돌이와 손만 잡고 자서 그렇다. 안타깝게도.

사실 안 그래도 요즘 그것 때문에 고민이다.

전에는 원래 몸으로 붙을 때도 박빙이었던 개원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절대로 회임할 수 없었지.

하지만 개원이 날 죽였는지 개운호가 날 죽였는지 알 수 없게 되어서 복수 방식을 바꿨다.

그냥 통째로 개씨 집안을 잡고 흔들기로. 멸문당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속이 좀 후련해질 만큼은 흔들어야지.

어쨌든 그 복수는 둘 중 누구와도 죽여라 살려라 생사결을 펼치지 않아도 되니.

무조건 회임을 피해야 하는 건 아니다. 회임해도 된다. 되긴 되는데…….

‘너무 오래 손만 잡고 잤어.’

연무장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하려고 했지만, 머릿속에 오만가지 잡생각이 떠올라서, 심마가 올까 봐 자세를 풀고 그냥 드러누워 버렸다.

슬슬 찾아오는 봄 덕에 공기는 달았고 흙에서는 조금씩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

날씨가 좋으니 싱숭생숭하고 은밀한 마음도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떡돌이와 몇 달째 손만 잡고 자서일까.

그냥 꼭 붙어 자는 게 익숙하다 보니, 떡돌이에게 그…… 뭐야. 그의 보물을 좀 구경시켜 달란 이야기를 하기가 애매했다.

아니, 해보긴 했다. 사흘 전쯤이었나.

그가 나를 자기 품 안에 꼭 넣더니 목덜미 향을 맡으면서 “이러고 있으니 좋다. 네 냄새가 좋다, 반숙아.”라고 중얼거리길래, 마음에 좀 달아오르는 듯해 용기를 냈다.

우리는 부부고 서로의 커다란 비밀도 공유했으니, 은밀한 부분도 좀 공유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면 더욱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지만 떡돌이는 무슨 내외하는 사이도 아니고, 내가 자기 보물을 쥐자 펄쩍 뛰더니 무슨 개구리처럼 눈 깜짝할 사이 벽 저 너머까지 달아나버리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내가 칼을 자기 거시기에 가져다 대기라도 한 듯 손으로 자기 몸을 가리고서 경고했다.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이불로 둘둘 말아둘 거다, 손손숙.”

그걸 보니 기가 막혀서 나는 “폐하, 내가 누구 같아?”라고 물었다.

세상에 어느 남편이 아내가 적극적으로 나온다고 저렇게 달아난단 말인가.

이혼을 앞둔 부부라면 뭐 싫어서 거절할 수도 있지만, 우린 사이도 좋은 부부인데!

게다가 우리는 평범한 남편과 아내도 아니야. 저쪽은 황제고 나는 후궁 아닌가.

진짜 후궁이라기엔 좀 애매한 입장이긴 하지만.

그러나 떡돌이는 경계심을 풀지 않고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에는 짐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찌르려 했지. 이번엔 아예 뽑아 버리려고?”

세상에, 맙소사! 그 거대한 비밀을 공유했는데도 그는 나를 신뢰하지 못하고 불신하고 있던 것이다.

그게 기가 막혀서 “나는 목은 뽑아도 거시기는 안 뽑아, 폐하. 나는 해야 할 것과 하면 안 될 것을 구분하는 악적이었어.”라고 말해주었지만 소용없었다.

“그걸 지금 안심하라 하는 말이냐?”

‘후우. 생각하니 열이 받는군!’

전에 마차에서 허벅지를 조물거렸을 땐 반응이 있었지. 그땐 분위기도 날 서 있었는데.

이번에도 허벅지부터 건드려 볼까.

아니며 혹시 떡돌이, 취향이 좀 이상해서 분위기가 싸울락 말락 할 때 더 좋아하고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본인은 극구 부정하지만 진짜로 고…….

“마마.”

떡돌이를 의심하고 있자니, 누가 오나 안 오나 밖에 세워둔 귀자가 작게 나를 부른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담벼락 뒤로 나갔다.

“왜 그래?”

하지만 무슨 일이냐고 묻자마자 무슨 일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연무복을 벗은 다음 후궁 복장을 차려입고 머리카락을 빠르게 정돈한 뒤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서 귀자와 나란히 서 있으려니, 잠시 뒤. 기몽 장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에 가출했을 때 한 짓이 있는지라 나와 귀자는 공범의 눈길로 서로를 빠르게 살핀 다음 다시 시선을 떼고 기몽 장군을 보았다.

기몽 장군은 팔짱을 낀 채 심각한 얼굴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날 찾으러 왔다기보다는 그냥 인적 드문 곳을 찾아 멍하게 걸어가는 눈치였다.

왜 저렇게 표정이 심각하지? 혹시…… 촉비 집에서 내가 심어둔 그 종이를 찾았나?

기대를 가지고 그를 빤히 보고 있으려니, 기몽 장군도 누군가 자기를 보는 걸 알아채고는 멈춰 서서 시선을 들었다.

나를 보자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딱딱하게 인사를 올렸다.

“천빈 마마를 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슬쩍 그의 낯빛을 살폈다.

고민하는 기색인데 낯빛이 어둡진 않군. 자기 일로 이러는 건 아니야. 진짜로 내가 뿌려둔 함정을 보았나?

나는 귀자와 눈짓을 주고받은 다음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이런 데서 보다니 신기하고 반갑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가? 표정이 굳어 있는데.”

“별건 아닙니다.”

기몽 장군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그 ‘별거 아닌 일’이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아도 마찬가지.

그는 대신 내가 들어가 있던 지붕 없는 비밀 연무장을 한 번 쳐다보기만 했다.

“사람이 잘 안 다니는 곳을 찾아왔는데. 이미 마마께서 선객으로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사람들 없는 곳을 찾아왔네. 고민할 게 있었거든.”

“그렇군요.”

여기서 같이 고민하긴 싫은지, 기몽 장군은 알겠다면서 돌아섰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걸어가던 그는 잠시 우두커니 섰다가 돌아서더니, 내게로 가까이 다가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촉비께서 혹시 마마를 저주할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귀자가 기몽 장군의 뒤에서 엄지를 들었다.

‘봤구나! 우리가 묻어둔 그 종이를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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