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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72화 (172/283)

##  172화. 할까 말까 비밀 교환

완전하게 신뢰했지만 결국 박살 나버린 첫사랑이 떠오른다. 팔에 소름이 돋았다.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손만이 반사적으로 떡돌이의 허벅지를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이 앙큼한 손은 무엇이지?”

“내 손이야.”

자꾸 싸워대는 걸 그만두려면 떡돌이의 제안처럼 서로에게 온전히 솔직해져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도 나를 조금 더 믿게 될 거고 나도 그를 더 믿게 될 테니.

하지만 떡돌이가 내 비밀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떡돌이의 허벅지는 탄력적이지만 그의 사상도 탄력적일까? 아니, 탄력적인 게 아니라 사상은 말랑해야지.

“소여야.”

그가 나를 부드럽게 부른다. 달래는 목소리다.

“응.”

마른침을 삼키고 쳐다보자 떡돌이는 미소 짓고서 말했다.

“그만 좀 주물럭거려라.”

“이 와중에 그게 중요해? 이렇게 중대한 와중에?”

“중요해. 네가 자꾸 짐의 허벅지를 만져대면…….”

그의 눈길이 아래로 향하는 순간 손끝에 뭔가 닿았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밑을 보니 그의 바지 안쪽으로 무언가 잡히고 있었다.

놀라서 좀 더 확실하게 만져보려 하자 떡돌이는 내 손목을 잡아 치우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짐을 이렇게 만들어 버리면 어떻게 하라고.”

맞는 말이어서 나는 손을 치웠다.

“참 이상해 떡돌아. 네 허벅지를 만지는 건 아무렇지 않은데. 네게 솔직해지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울까?”

“그런 말을 입 밖에 뱉는 용기로 말하면 될 텐데.”

그게 생각처럼 안 되니 그렇지. 한숨이 나온다.

내가 이번에는 내 무릎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떡돌이는 결국 이렇게 제안했다.

“좋아. 그러면 이러자. 지금 제안은 사실 좀 갑작스러웠지.”

“맞아. 그거야.”

“그러니까…… 시간을 정하지.”

“시간?”

“그래. 본궁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가지자. 도착한 날 밤 시침에 널 부르마. 그때 이야기를 할지 말지 정해라.”

여기서 수도까지 마차로 며칠이나 걸릴까? 나와 귀자가 말과 경공술을 섞어서 이동해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이 긴 행렬이 마차로 가려면 더 오래 걸릴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제법 괜찮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 정도쯤이면 나도 확신이 서겠지.

그때까지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면 그건 내 마음이 그에게 진실을 털어놓길 원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을 거야.

“좋아.”

“반숙아. 네가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좋다. 원하지 않는다면. 네가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짐이 갑자기 널 싫어하게 되진 않을 거다.”

“하지만 신뢰하진 못하겠지.”

“서로.”

“그래. 서로.”

* * *

이후 며칠 동안 나는 창밖을 쳐다보며 열심히 내 마음을 훑었다. 말할까 말까.

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떡돌이와 가까워지고 싶은 걸까 아닐까.

떡돌이에게 신뢰를 받지 못한다고 해서 후궁으로서 안락하게 못 사는 건 아니야.

하지만 촉비 사태 같은 게 생겼을 때 그가 날 믿지 못한다고 서운해할 수도 없게 되겠지.

신뢰를 못 줬으면서 그가 날 믿기만 바라는 건 억지니까.

물론 억지라도 나한텐 편리하지만.

‘하지만 말한다면 어디부터 어디까지?’

결국, 고민 끝에 나는 마차가 쉬어갈 때 귀자에게 이 문제를 상담했다.

하지만 귀자는 자기 일이 아니라서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폐하는 이미 마마에 관해 몇 가지 짐작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한테 말씀해주신 정도로 말씀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어느 정도로?”

“마마께서 입궁하시기 전 자유분방한 무림 고수 생활을 즐기셨다고요.”

“내 평판이 너무 나쁜데 괜찮을까?”

“하하, 평판이 너무 좋았다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해?”

“입궁하고 성격이 나빠지신 거니까요.”

웃으면서 말한 귀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말실수를 눈치채고는 황급히 납죽 허리를 엎드렸다.

“죽여주시옵소서 마마!”

예전에는 궁녀나 태감들이 별일도 아닌 일에 ‘죽여주시옵소서!’라고 외치는 게 이해가 안 갔는데. 슬슬 이해가 가려고 한다.

1만큼 잘못한 일에 10만큼 죄송해하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서, 벌을 주면 벌을 주는 사람이 좀스러워 보이게 하는 거 아닐까?

* * *

귀자와 상담을 마치고 마차에 돌아와 앉자마자 자는 줄 알았던 떡돌이가 눈을 뜨더니 한소리부터 했다.

“먼 길 다녀오더니. 귀자와 친해진 모양이군.”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눈이 평소보다 세 배는 가늘어져 있었다.

그러다 내가 그의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쭉 펴면서 “난 원래 내시들이랑 친해.” 하고 말하자 눈이 더 가늘어졌다.

“네가 내시라 생각할 때도 친했잖아.”

자기 이야기를 하자 눈이 도로 커다래졌지만.

* * *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이동하는 동안 본궁과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내게 주어진 시간도 점점 짧아져 갔다.

넉넉한 날짜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돌아가는 길은 너무 시간이 짧게 여겨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떡돌이는 약속한 날짜까지는 차분하게 기다릴 생각인지 절대로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는 점.

물론 이따금 내가 마차에서 내려 귀자와 의논하고 오면 못마땅하게 쳐다보긴 했지만.

“짐과 의논하라 짐과.”

“폐하 일인데 어떻게 폐하랑 의논해?”

“짐은 네 일을 다른 후궁과 의논하지 않잖느냐.”

“폐하는 오 공공이랑 승언이한테 말할 거잖아.”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피한 채 별거 아닌 이야기로만 투덜거리기를 며칠.

드디어 황제 하나와 황후 하나, 기타 여러 명의 후궁,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궁인들까지 함께하는 대이동이 끝이 났다.

나와 떡돌이 사이의 보류 기간 역시도.

다른 사람들보다야 후궁들이 편하게 이동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몇 주에 걸친 대이동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황후도 문안은 생략하라 했고, 각 후궁들은 모두 자기들 처소로 돌아갔다.

나 역시 오랜만에 동영궁 한편에 있는 내 전각 안으로 들어가 이젠 익숙해져 버린 침상 위에 몸을 던졌다.

자주 맡던 냄새를 맡자 저절로 몸에서 기운이 빠지면서 잠이 몰려왔다.

‘안 돼. 아직 떡돌이한테 비밀을 말할지 안 할지 결정하지 않았잖아.’

침상에 엎드려 있자니 내기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그저 한숨 자고 싶어졌지만, 나는 억지로 상체를 일으켰다.

일단 씻자. 씻으면서 마저 생각하자.

‘하지만 몇 주 동안이나 생각했는데도 결론을 못 내다니.’

역시 이 정도쯤 되면 나는 떡돌이에게 내 가장 깊은 비밀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비밀을 털어놓고 시원해질 마음보다 내 비밀에 그가 질색했을 때 겪게 될 상황이 더욱 신경 쓰이고 싫은 게 아닐까?

“원웅아. 옷 갈아입는 거 도와줘.”

그런데 피풍의를 벗고 갑갑한 옷을 천천히 벗고 있자니, 밖에서 “천빈 마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 공공 목소린데? 나가봐 부성아.”

부성에게 지시하자 부성은 얼른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올 때는 역시나. 오 공공과 함께였다.

“오 공공.”

내가 그를 쳐다보며 아는 척을 하자 오 공공은 가까이 다가와서 꾸벅 인사를 했다.

나는 오 공공의 뒤에서 따라온 태감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있는 걸 보았다.

그 쟁반 위에는 부드러워 보이는 운문비단이 보였다. 비단 한 필이 아니라 그걸로 만든 옷이.

“잠의입니다, 마마.”

오 공공은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묻기도 전에 얼른 알려주더니 뒤에 선 태감에게 눈짓했다.

태감이 원웅에게 쟁반을 건네자, 원웅은 나를 대신해 운문 비단으로 만든 잠의를 들어 보인 다음 감탄하며 내게 건넸다.

“가장자리에 아주 멋진 원앙이 수놓아져 있어요, 마마.”

운문 비단의 어깨 부분을 집자 비단은 주르륵 해파리처럼 흘러 내렸다.

가볍고 보들보들한 그 잠의를 쳐다보고 있자니 원웅의 말처럼 잠의 상의 가장자리에 원앙이 수놓아진 게 보였다.

그 부분을 자세히 보고 있으려니 오 공공이 슬며시 일러주었다.

“폐하께서 직접 수놓으신 거랍니다, 마마.”

“폐하께서?”

“네. 마마께서 주고 가신 원앙에 짝이 없다고 직접 수놓으셨지요. 마마께서 폐하께 주신 잠의 속 원앙와 꼭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 말에 원웅과 부성은 감탄사를 뱉었고 나도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맞아. 그러고 보니 여길 떠날 때 신경질이 나서 원앙을 한 마리만 수놓아두고 갔지.

난 그러고서 까먹었는데. 떡돌이는 기억하고 있었구나.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원앙을 손가락으로 더듬고 있으려니, 오 공공이 슬쩍 내 눈치를 한 번 더 보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폐하께서 오늘은 천빈 마마께서 시침을 들라 하셨습니다.”

“알았네. 고맙네.”

* * *

씻고 나오니 곧장 밤이 되었다.

부성과 원웅은 오랜만의 시침이라며 평소보다 더욱 공들여 나를 치장해주었다.

나는 머리에는 금으로 된 장식을 하고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옷을 입고 그 위에 보송보송한 피풍의를 걸치고서 떡돌이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몇 달 만에 오는 방이지만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떡돌이 방 앞을 지키는 태감이 문을 열어 주어서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태연한 겉과 달리 내 속은 지금 이리저리 휘청이는 중이었다.

떡돌이가 날려 보낸 원앙을 본 다음 목욕을 하면서 드디어 떡돌이의 제안에 어떻게 대답할지 답을 정했는데. 그러고서도 계속 불안이 연달아 고개를 내미는 탓이었다.

그러다 떡돌이를 보는 순간, 저절로 입 밖으로 탄식이 나갔다.

“오늘 옷이 왜 그래?”

떡돌이는 평소와 달리 편안한 차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는 정무를 볼 때도 거의 입지 않는, 완전히 제대로 된 정복 차림으로 있었다.

보기에는 족자 속에서 금세 튀어나온 모습 같아 멋지지만, 평소와 다른 준비 자세에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이상하냐?”

“아니, 보기엔 좋은데. 갑자기 그런 옷차림으로 기다리니 그러지.”

나는 떡돌이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탁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탁상 위에는 먹물과 붓, 종이 등이 있었다.

내가 마주 앉자 떡돌이는 붓 하나를 집어 물기를 빼고 먹물을 찍더니 내게 건넸다.

“자. 이제 서로 비밀을 적어서 건네자.”

말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으나 나는 떡돌이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서 소매를 조금 걷고 붓을 쥐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다음 단숨에 비밀을 적어서 종이를 접어 건넸다.

하지만 막판에 그가 쥐려던 종이를 다시 뺏고서 경계하듯 쳐다보자, 떡돌이는 한숨을 내쉬더니 팔을 길게 뻗어 그 종이를 가져가며 쓸쓸하게 말했다.

“염려 마라. 네 비밀이 아주 커도 내 비밀보단 작을 테니. 게다가 사실 짐은 네 비밀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다.”

“그럼 이런 걸 왜 하자고 한 거야?”

“그래야 우리가-.”

떡돌이는 뒷말을 잇지 않고 종이를 바로 펼치면서, 거 보란 듯 피식 웃다가 갑자기 눈이 왕방울만 해지더니 나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네가…… 천소여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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