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신뢰가 생길지 애정이 박살 날지
“천년비 사칭범을 졸졸 쫓아다니더니. 죽은 천년비와 대화라도 한 거야, 형?”
개원은 운호의 멱살을 잡아 그를 일으켜 세우고서 방 밖으로 끌고 가 팽개쳤다.
이번에는 운호도 넘어지지 않았다. 삐뚜름하게 웃으면서 ‘항복’ 표시를 하듯 두 손을 건성으로 들어 올릴 뿐.
“정파의 영웅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굴면 안 되지, 형. 다정하게 굴어야지? 사람들 놀랄라.”
개원은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아 버렸다. 더 대꾸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눈앞에서 문이 닫히자, 운호를 찾으러 온 민신이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운호가 민신을 보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녀는 넘어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길래 저 무딘 애가 이렇게 화내게 만들어?”
“별말 안 했어.”
“별말 안 했는데 개원이가 저럴 리가 없잖아.”
“별말 안 해도 화날 주제였나 보지.”
민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우뚱하자, 운호가 혐오감에 가득 차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개원이 아닌 자신의 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형은 꼭 죽은 천년비와 대화라도 나누어 본 것처럼 말해.”
“사람들 다 천년비가 살아 있다고 그래.”
“하지만 죽었어. 지금 사람들이 천년비라 부르는 사람. 사하비단과 어울려 다니는 그 사람은 천년비가 아니야. 행보만 봐도 알잖아? 게다가 그 강한 악적이 갑자기 나타난 천반숙이란 여자한테 완전히 졌어. 그 여잔 천년비가 아니야.”
“죽었다 깨어나서 약해진 걸 수도 있잖아?”
“죽었다 깨어나 약해졌더라도 자기 무공조차 못 펼치진 않아.”
“…….”
“그런데 왜 형은 그 여자가 살아 있는 것처럼 말할까.”
민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 해대서 개원이를 자극한 거야? 너도 진짜 참. 그만 좀 해. 기껏 개원이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천 낭자를 데려왔을 땐 천 낭자를 괴롭혀서 보내버리더니. 이젠 네 형이 목표야?”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민신은 물고기 밥을 넣은 자루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애들 밥 주면서 마음 정리나 해.”
민신이 가버리자, 운호는 호숫가로 가 입을 뻐끔대는 커다란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뿌려 주면서 민신에게는 하지 않은 말을 이어 떠올렸다.
‘천반숙. 그 여자는 왜 천년비 죽음에 그렇게 화가 나 보였을까.
아니, 그 여자는 왜 천년비를 죽인 게 누구인가 궁금해했을까.’
운호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 * *
행궁에서 보름 정도는 더 머물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행궁을 떠나게 되어서, 궁인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바쁘게 짐을 쌌다.
“내일 떠난다고? 원래 날짜가 이랬어?”
“아니요. 열사흘은 더 있어야 가는데, 갑자기 부쩍 당겨졌어요.”
원웅과 부성, 귀자 등 내 궁인들 역시 하루 만에 떠날 준비를 하느라 몹시 바빠졌다.
머무르는 동안 사용할 세간살이를 제외하고 가져가야 할 것들은 다 조심해서 챙겨야 했으니까.
나는 직접 짐을 쌀 필요는 없었으나 그 바쁜 분위기는 쉽게 쉽게 전염되는 법이다.
게다가 며칠 전까지 나는 전국을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여기에 와 푹 쉰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먼 길을 갈 생각을 하자 저절로 피로가 몰려왔다.
어쩌면 어제 창가에서 내가 개새끼라 중얼거리는 걸 듣고 떠난 후, 떡돌이가 더이상 과일도 떡도 보내오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고.
‘역시 화가 많이 났을까?’
그 답은 다음날, 마차를 타고 떠날 때가 되자 알 수 있었다.
“내 마차는?”
내 마차가 없다는 것이다. 황당해하고 있자니, 오 공공이 내게 다가와 알려주었다.
“천빈 마마. 마마께서 타고 오신 마차는 마마께서 병에 걸리셨을 때 혹시 몰라 처분하였습니다.”
“뭐? 그럼 난 뭘 타고 가는가, 공공?”
“폐하께서 폐하의 마차가 가장 크니, 마마께서는 폐하와 함께 타고 가면 되겠다 하셨습니다. 다른 마마들의 마차에 타면 불편할 테니까요.”
내가 휙 황제의 마차 쪽을 보자 반쯤 올라가 있던 창문 덮개가 훅 아래로 내려갔다.
안에서 이쪽을 보다가 다급히 내린 게 분명했다.
내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오 공공을 보자, 오 공공은 흠흠 헛기침을 하고서 괜히 귀자에게 잔소리했다.
“마마께서 다리 아프시겠다. 얼른 안으로 모셔라. 아직 몸도 약하신 분을 세워두느냐.”
수상한데…….
* * *
마차에 오르자 떡돌이가 아까 창문으로 나를 쳐다본 적이 없던 척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다.
내가 안에 들어왔는데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있는 걸 보니, 슬그머니 심사가 뒤틀렸다.
게다가 아무 문제도 없는 내 마차를 처분한 범인은 분명 이놈일 것 같은데 말이지.
하지만 떡돌이는 마차가 출발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가 언제까지 입을 닫고 있나 보자는 마음가짐으로 맞은편에 앉아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기를 체감상 반 시진 정도. 결국 떡돌이는 면사를 벗어 옆으로 두었다.
그가 면사를 벗자 양옆이 축 내려간 입꼬리가 드러났다. 삐졌구나.
“왜 자꾸 쏘아보는 거지, 천빈?”
“쏘아본 게 아니라 쳐다본 거야.”
“그래, 왜 자꾸 쳐다보는 거지, 천빈?”
“그 조그만 머리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짐작해보고 있었어.”
“다행이군. 우리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니, 안심이야.”
마차가 어디를 지나가는 건지 갑자기 덜컹 소리를 내며 한 번 크게 튀었다.
나는 재빨리 균형을 잡았으나 떡돌이는 균형을 잃더니 내 옆으로 넘어져서 내 무릎 위에 머리를 올리는 자세로 폭 쓰러졌다.
나는 좀 더 인상을 찡그렸다.
“일부러 이러는 거지?”
“짐이? 그럴 리가. 튕겨 나간 거다.”
“그런 것치곤 너무 사뿐하게 착지했는데? 게다가 튕겨 나갔으면 벽에 머리를 박아야지, 왜 내 무릎을 베고 누워?”
“반숙이 네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으니까.”
창문 밖에 올 때까지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대단한 무공 실력을 숨기고 있으면서, 마차가 흔들리자 튕겨 나갔다고?
물론 그런 무공 고수가 없진 않겠지만, 착지 장소가 내 무릎이라니 좀 의심스럽다.
내가 빤히 내려다보자 찔리기라도 했나. 떡돌이는 헛기침을 하더니 눈을 감아버렸다.
“피곤하군.”
기가 막혔지만 머리를 밀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황제니까.
게다가 그의 옆모습은 정말 수려하기 이를 데 없어서, 눈을 감고 입을 닫자 평소보다 배로 그윽한 분위기가 났다.
결국 씩씩거리며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다가, 나도 피로가 몰려와 눈을 감았다.
* * *
그러다가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내가 떡돌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게다가 떡돌이는 잘 자라는 듯 연신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었다.
순간 놀라서 벌떡 일어날 뻔했지만, 그의 옷에서 나는 향이 나쁘지 않아서 나는 다시 눈을 감고 계속 잠든 척했다.
“조용하니 좋군.”
떡돌이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 주면서 하는 말을 듣기 전까진.
내가 눈을 부릅뜨고 돌아보자, 떡돌이는 이미 내가 깨어 있단 걸 알았던지 놀라지도 않고 눈웃음이나 지었다.
“내가 입을 여는 게 싫단 거야?”
“날 싫어한단 소리만 하지 않으면 듣기 좋아.”
“거짓말.”
“정말이다. 욕할 때 발음까지도 듣기 좋다 생각해.”
떡돌이가 내 귓가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치듯 손가락으로 굴리더니 귀 뒤로 넘겨주며 웃었다.
“짐에게 욕하는 게 아니라면.”
“내 마차. 폐하가 버린 거지?”
“네가 먼저 날 피했잖느냐.”
뭐라? 몇 시진이나 내 얼굴을 안 보려고 문도 안 열어주고 피한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는 그의 허벅지를 콱 세지 않게 물어버렸다.
“윽.”
떡돌이는 순간 놀라서 펄쩍 뛰었고 그 바람에 나는 죽 미끄러져서 바닥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다행히 떡돌이가 내 머리를 들어 주어서 그러진 않았다.
“너 정말-.”
인상을 구긴 떡돌이는 그 짧은 새에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나는 그의 또 그의 허벅지를 잡고 몸을 일으켰고, 떡돌이는 작게 항의했다.
“솔직히 말해. 고의지?”
“폐하가 내 무릎 위에 굴러들어온 것과 같은 이치야.”
“정말 하나도 지지 않는군.”
“그야 난 무림…….”
“그래, 소림사 손녀 손손숙.”
“손반숙, 아니, 천반숙이거든? 무림고수 천반숙!”
“영웅 이름 좀 잘 짓지 그랬느냐.”
“폐하가 지은 이름이잖아.”
“짐은 널 좋아하지만 무림고수 행세를 할 때 자신을 무림고수 떡돌이라 하고 다니진 않을 거다.”
“애정이 부족하네! 나도 반숙이 이름이 예뻐서 쓴 거 아니야.”
“짐을 좋아해서 쓴 건가?”
“당연하지! 아니면 내가 왜 쓰겠어?”
큰소리로 외친 다음에, 나는 아차 싶어서 연달아 욕을 뱉었다.
“제기랄!”
내 입으로 그를 좋아한다고 해주다니. 이건 말도 안 된다.
방금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방금 그건…… 천소여가 한 말이다.
그녀의 영혼이 잠시 몸 안에 들어와서 말하고 간 거란 말이다.
나는 얼른 제자리로 가서 앉았으나, 떡돌이는 눈 깜짝할 사이 내 옆으로 와 앉고는 한쪽 팔로 내 허리를 감싸며 웃었다.
“짐이 좋아?”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내가 우스워지겠지. 한 입으로 두말하기도 좀 그렇고.
“한 서너 번째로는 좋아.”
타협점을 제시하자 떡돌이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이윽고 그는 싸늘하게 빈정거렸다.
“두 번째는 여전히 흑합 장군인가? 그 꽃 같은 장군?”
“그래!”
황제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세 번째는 짐인가? 서너 번째가 설마 34번째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코웃음을 뱉었다. 34번째는 아니었다. 떡돌이는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사실 아주 솔직하게 따져본다면, 흑합 장군은 요즘 순위가 아래로 내려갔다.
왜냐. 얼굴을 못 봐서다. 대신 요즘은 기몽의 순위가 올라왔다.
그가 일을 잘해준다면 아마 그는 쑥 더 위로 올라올 거고, 그가 내가 범인이란 걸 알아차린다면 도로 아래로 내려가겠지.
어쨌든 굳이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첫 번째는 나.
두 번째는 내가 원래 몸에 있을 시절의 개원이.
세 번째와 네 번째가 ‘날 배신하지 않았단 가정 하의 개원이’와 떡돌이다.
딱히 누가 더 우위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누가 위이든 상관없는 이야기다.
나 스스로 사랑하는 비중이 9할 정도고, 나머지 1할을 서로 나눠 가지는 거니까.
개원이와 사귀던 시절에는 날 사랑하는 마음과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반반 정도였지만, 이젠 그 시절로는 못 돌아간다.
내가 입을 다물고 순위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자 떡돌이는 끙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원래 자리로 돌아가 무릎에 팔을 올려놓고 진지한 시선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표정.
그런 모습을 한 채 그가 내게 진지하게 물었다.
“좋아. 그러면 우리가 서로에게 화난 이유를 아주 처음부터 짚어 가보지. 이래 봤자 어차피 또 싸울 테니. 짐이 생각할 때 네가 내게 화난 건…… 내가 널 믿지 못해서다. 맞지?”
“맞아.”
그가 촉비에게 아무도 믿지 못한다고 말한 것.
촉비 사건이 처음 터졌을 때 그가 나를 믿지 못한 것. 사실 모두 신뢰의 문제지.
수긍하자, 떡돌이는 자신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외로 인정했다.
“그래. 서운할 수 있지. 충분히 이해해.”
그러고는 팔에서 손을 떼더니,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럼 너는? 너는 날 온전히 믿고 있느냐? 짐이 널 신뢰하지 않으면 억울할 만큼, 너는 내게 모든 걸 이야기했어?”
“!”
떡돌이 이 자식! 말싸움을 잘하잖아! 어떻게…… 이렇게…… 딱 거기를.
우리는 둘 다 입을 열지 못했다. 떡돌이가 날 믿지 못하는 데만 화가 났는데.
이렇게 딱 집히고 나니 나 역시 할 말이 사라졌고, 떡돌이도 나름대로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먼저 제안했다.
“나는 신뢰와 연모는 다른 영역이라 생각한다. 널 연모하는 마음도, 믿지 못하는 마음도 모두 진심이니까.”
“!”
“하지만 반숙이 넌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너와 계속 이렇게 싸워대기만 할 수는 없어. 좋아. 그러니 전에, 네가 들어주기로 한 소원. 그걸 사용하지.”
소원? ……소원! 전혀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내기에서 져서 내가 그의 소원을 하나 무엇이든 들어주기로 했지. 젠장. 그걸 여기서 쓰겠다고?
긴장해서 쳐다보자, 떡돌이가 벗어둔 면사를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네가 숨기는 가장 큰 비밀 하나를 짐에게 알려다오. 짐 역시, 가장 큰 비밀을 하나 네게 알려줄 테니.”
“!”
“서로 부딪치고 나면 결론이 나오겠지. 믿음이 생길지 신뢰가 아예 박살 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