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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70화 (170/283)

##  170화. 자존심 싸움

촉비는 가빠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침착하게 황제를 보았다. 본다고 해도 드러난 게 눈뿐이었지만.

촉씨 가문에서 그녀의 위치는 미묘했다.

그녀는 촉비의 아버지가 전처와 사별하고 재취한 두 번째 정실 부인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첫째 부인을 지극히 사랑해 결혼했으나, 촉비의 모친과는 정략적으로 맺어졌다.

촉비의 아버지는 사별한 전처를 평생 잊지 못했고, 그 애정을 전처가 낳은 아이들에게 퍼부었다.

후처의 자식들을 괴롭히거나 구박한 건 아니었으나 보이는 애정의 크기는 노골적일 정도로 달랐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촉비의 어머니가 전처의 딸에게 온 좋은 혼처를 자신이 낳은 첫째 딸, 즉 촉비의 동복 언니에게로 돌리려다 걸리게 된 것이다.

촉비의 어머니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이 낳은 두 딸에겐 절대로 이만한 혼처 자리를 구해주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전처의 딸에게라면, 이번에 좋은 혼처를 놓치면 또 비슷한 수준으로 구해다 줄 것이다.

그러니 자기 딸들을 좋은 곳에 시집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촉비의 아버지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일을 내세워 촉비의 친모와 이혼했다.

빼돌리려던 혼처 자리가 하필 왕비 자리였기에, 이 일을 알게 된 상대 집안 측에서는 구설을 일으킨 데 분노해 촉비의 동복 언니가 집안도 형편없고 성품도 망나니 같은 작자와 결혼하게 했다.

이 모든 과정을 다 보아온 촉비는 어머니의 주장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아무리 어머니에게 화가 났어도, 아무리 상대 집안이 무서워도, 아이에게 애정이 있다면 부친은 동복 언니를 그런 곳에 보내서는 안 됐다. 지켜야 했다.

하지만 부친은 그러지 않았다.

친모는 만날 수 없게 되고 친부는 의지할 수 없게 되자, 촉비는 그나마 자신을 동정해주던 고모에게 애원해 스스로 후궁 선발에 나섰다.

아버지와 전처의 자식들은 ‘주제도 모른다’라면서 그녀를 비웃었고, 그녀는 후궁이 되더라도 총애받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가문에 도움을 청하지 말라는 말은 수십 번 들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온 촉비는 이곳에서도 잘 적응했다.

그녀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대신, 같은 날 입궁한 동기인 혜연화가 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먼저 총애를 받은 혜연화는 이후 신의를 지켜 촉비를 황제에게 끌어주었다.

하지만 촉비는 이때 이미 황제가 후궁들에게 큰 관심이 없단 걸 알게 된 후였기에, 황제의 총애를 얻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대신 촉비가 이끌어준 황제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 잡았다.

그가 원하는 장기 말이 되어줄 테니, 자신을 마음껏 이용하되 천천히 빈의 자리까지만 올려 달라 청한 것이다.

황제는 촉비가 황후와 태후에게 극진히 대하는 건 물론 욕심 없이 친구를 먼저 밀어주는 모습, 그리고 촉씨 가문에서의 애매한 위치 등을 확인한 뒤,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촉비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고서 황제를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엔 사랑은 없어도 그렇게 함께한 오랜 시간과 믿음이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황제가 인제 와서 이렇게 나오니 서러운 마음에 코가 메었다.

“일부러 들통 낸 게 아닙니다. 천빈의 계략에 빠져 그럴 수밖에 없던 거였습니다, 폐하.”

“천빈이 노린 건 필첩이었다 들었다.”

“!”

“천빈이 계략을 부리긴 했지. 하지만 그녀가 노린 것보다 너는 더 큰 걸 내어주었다. 기몽이 필첩을 발견했다면 짐이 나서서 방어해줄지 아닐지 확신할 수 없지만, 선황제의 서신을 떨어뜨리면 짐이 나서서 널 방어할 수밖에 없으니까.”

“저는-.”

“천빈은 상대를 역모로 몰아 쳐버리려 드는 간악한 사람으로 보일 테고. 안 그러하냐.”

황제는 태연히 식사를 계속했으나 촉비는 한 젓가락도 뭘 먹을 수가 없었다.

촉비는 주먹을 꽉 쥐고서 그를 원망했다.

“폐하께서는…… 총애한 지 일 년도 되지 않는 천빈보다 오랫동안 거래한 신첩을 더 못 믿으시는 겁니까.”

그 고통이 짓눌린 목소리에 황제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짐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

“천빈의 입장이 더 옳다는 결론이 났을 뿐.”

* * *

오 공공이 내 눈치를 보고 있다. 오 공공이 내 눈치를 열심히 보고 있다.

오 공공이 뭐라 말을 하고 싶어 한다.

“저…… 마마.”

거봐. 말을 걸잖아.

“저기, 폐하께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오 공공은 조금 전 안쪽에서 들려온 ‘난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발언을 해명하고자 끙끙거렸다.

여기까지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로 오 공공이 긴장한 티가 나서, 나는 그에게 괜찮다고 웃어 보였다.

“염려 말게. 난 폐하의 뜻을 다 안다네, 공공.”

“정말이십니까?”

“암. 한마디로 그거 아닌가. 나랑 장기전을 해보잔 거.”

“아……아니지 않을까요?”

나는 웃고서 그에게 고개를 저은 다음 돌아서서 천천히 걸어갔다. 그래, 떡돌 씨. 그게 속마음이다 이거지.

* * *

촉비가 떠난 후에도 월요는 마저 식사를 우아하게 다 마치고 젓가락을 내려놓은 다음 입가를 닦았다.

조금 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촉비를 배웅하고 온 오원요는 그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다가, 황제가 식사를 완전히 다 끝냈다 싶자 뜨겁게 데운 차를 가져다 내려놓고서 조심스럽게 알려주었다.

“저, 폐하. 아까 천빈 마마께서 다녀가셨습니다.”

“들어오라 하지.”

“그때 촉비 마마께서 계셔서요.”

“…….”

황제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러면 짐이 촉비를 혼내는 걸 보았겠군. 화는 좀 풀린 것 같더냐.”

“폐하께서 폐하는 아무도 안 믿는다고, 딱 그 말씀 하실 때 오셨다가 그 말씀 끝나고 바로 가셨습니다.”

“아니, 그 애는 꼭 와도!”

오원요는 웃고는 있는데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던 천빈을 떠올리고서 슬그머니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잠시 어이없어하는 듯하던 황제는 곧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니 신경 쓸 거 없다. 어쨌건 촉비보다 자기를 편들었으면 된 거지.”

* * *

촉비와 황제 사이의 동맹인지 거래인지가 깨졌으니, 그녀의 집안에서 내가 묻은 종이가 나왔을 때 황제는 촉비를 보호해주지 않을 거다.

그러면 내 복수는 성공하겠지. 좋아해야 옳다. 미래의 성공을 위해 건배.

하지만 복수 단계가 착착 풀리고 있는데.

황제는 나와 촉비 사이에서 내 말을 믿어 주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상할까.

덕분에 나는 방에 오자마자 긴 의자에 앉아 혼자 씩씩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작게 외쳤다.

“떡돌이 개새끼!”

그런데 딱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누가 들었나?

에이, 들었으면 뭐 어때! 내가 떡돌이 욕했지 황제 욕했나?

내가 떡돌이를 떡돌이라 부르는 건 극소수만 아는 이야기인걸.

나는 당당하게 창문을 벌컥 열었고, 이마에 혈관이 뚜렷이 드러날 정도로 턱을 꽉 깨물며 억지로 웃고 서 있는 떡돌이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가 창틀에 팔을 괸 채 힘들 정도로 애써 웃고 있던 것이다.

아니, 대체 언제 여기 온 거지? 여기 오는 줄도 몰랐는데? 하긴.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

역시 황제는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게 틀림없어. 특히 은밀하게 돌아다니는 위주로.

잠시 멍하게 있자니, 황제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짐이 있는 데서 하는 욕은 순한 편이었군?”

내가 용감하고 간이 크다고 해도 황제의 면전에 대고서 쌍욕을 퍼붓진 않는다.

아무리 막 나가는 무림 악적이라 해도 황궁에 들어가서 행패를 부리진 않는 것과 같은 이치지.

나도 떡돌이가 들을 줄 모르고 한 욕이었다.

그가 듣는 줄 알았다면 ‘떡돌이는 쫌팽이’ 이런 정도로 순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춤하기도 잠시.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아까 문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가 생각나서 나는 같이 웃으면서 돌려주었다.

“폐하가 없는 데서 한 욕인데 폐하가 그냥 들어버린 거잖아. 화내지 마. 나도 폐하가 나 없는 데서 한 말에 대해선 안 따지고 그냥 왔잖아?”

떡돌이의 얼굴 근육이 움찔했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서 그를 똑같이 쳐다보았다.

잠시 뒤. 떡돌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무도 안 믿는다고 했지 널 연모하지 않는다곤 안 했다.”

“나도 지금 폐하를 보기 싫지만 안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그의 머리가 팽팽 굴러가는 게 보인다. 그가 황제가 아니었으면 코앞에서 창문을 쾅 닫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날이 너무 밝아서, 나는 창문을 닫는 대신 “아이고 배야. 아직 몸이 덜 나았네.” 하고 중얼거린 다음 창문에선 볼 수 없는 곳으로 가 드러누워 버렸다.

* * *

월요가 천빈의 방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가자, 오원요는 뒤에서 이 상황에 대해 차분히 결론을 내려주었다.

“그러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 말씀만 안 하셨어도 천빈 마마께선 지금쯤 좋아서 잘 챙겨주셨을 텐데요.”

뚜벅뚜벅 걸어가던 월요가 우뚝 멈춰 서자 오원요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죽여주시옵소서. 신이 입방정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는 손을 저어서 오원요에게 일어나라 손짓하고는, 다시 걸어가며 차갑게 지시했다.

“날이 많이 풀렸군. 이곳은 좀 덥고. 슬슬 행궁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렇지?”

“예? 네, 안 그래도 열나흘 후쯤에-.”

“모레 돌아간다.”

“예?”

황제가 12일을 훅 당겨버리자 오원요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들 돌아갈 준비를 하라 일러라.”

오원요는 멍하게 황제의 뒷모습을 보다가, 천빈이 방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자 황제가 아예 집을 옮기려 한단 걸 깨닫고 기가 차 입을 벌렸다.

“오원요. 하나 더.”

“네, 폐하.”

“마차 수가 부족하니 천빈은 짐과 한 마차를 타야 한다 전해라.”

* * *

한편 천반숙이 떠난 후. 개원은 나날이 우울해져서 시들시들한 시금치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형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 진심이어서 좋겠네. 이 사람 떠나고 슬퍼하고 저 사람 떠나도 슬퍼하고. 걱정 마 형. 다른 여자가 나타나도 형은 금세 진심일 수 있어.”

이 와중에 동생이란 자식은 위로하러 들어와서는 이딴 말이나 해대자, 개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감정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으나, 지금 운호를 상대로는 도저히 그럴 겨를이 없었다.

“말다툼하고 싶지 않으니 그만 가라.”

개원이 고개도 들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으나, 운호는 어머니가 가져다 주라고 한 과실 차를 침상 옆에 내려놓으며 계속 깐죽거렸다.

“왜 내 얼굴이 보기 싫은데? 형 새 애인에게 친절하지 못해서? 형 애인이 나 때문에 떠났다 생각해?”

개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운호의 얼굴을 내리쳤다.

퍽 소리가 나며 운호가 옆으로 나동그라지자, 개원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천년비를 죽였으니까.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내가 아니면 너니까.”

운호는 일어나는 대신 상체만 일으켜 앉더니, 픽 웃으면서 터진 입가를 손으로 쓸었다.

피가 묻어 나왔으나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그 삐딱하고 불량한 태도로, 운호는 고개를 기우뚱하며 개원에게 물었다.

“전부터 이상했는데. 형, 천년비 죽고 나서 천년비랑 대화해 본 거 같다? 범인이 형 아니면 나라는 말. 그거 천년비 입장에서만 할 수 있는 말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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