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편안한 생활
원래라면 황후에게 문안하러 갔어야 할 테지만, 그동안 떡돌이가 내 병을 핑계로 대 둔 터라 당분간 문안을 더 가지 않아도 된다.
이를 알자마자 나는 여독도 풀 겸 아침 식사도 거르고서 침상에 누워 하루하루 뒹굴거렸다.
그러고 있자니 오랜만에 오 공공이 나타나서 내게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내밀었다.
“마마. 폐하께서 떠돌아다니느라 고생하셨다며, 이걸 드시고 기운 내시라 하십니다.”
오 공공은 내가 일어나서 과일 바구니 안을 살피는 걸 보다가 웃으면서 다시 한소리를 더했다.
“천빈 마마께서 돌아오시니 폐하의 용안이 다 환해지셨습니다. 폐하께선 마마를 정말로 많이 좋아하시나 봅니다.”
“오 공공.”
“네, 마마.”
“이 바구니는 공공이 포장했나?”
“예?”
“우리 오 공공 포장하는 솜씨가 아주 천하제일이야.”
특히 떡돌이를 잘 포장하네.
내가 히죽 웃자, 오 공공은 떡돌이를 미화하던 게 들켰다 싶은지 멋쩍게 웃고서 물러났다.
나는 침상에 도로 드러누워서 바구니 안으로 손만 넣어 과일을 꺼냈다.
그러고서 과일을 연거푸 두 개 껍질째 먹고 있으려니 역시 후궁 생활이 편하긴 참 편하단 생각이 든다.
개원이 집에 머물 때도 이것저것 있을 건 다 있었지만 거기선 이렇게 뒹굴뒹굴하면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낼 순 없었으니까.
그래. 황제랑 싸울 때마다 가출하는 건 내 손해야.
물론 이건 싸워서 가출한 게 아니라, 날 죽인 사람이 개원이인지 동생인지 확인하러 간 거였지만.
“아, 그래. 귀자.”
“네, 마마.”
“촉비에 관해선? 소식이 아직 없어?”
“하하, 벌써 있을 리가요.”
“그런가.”
“네. 일단 그걸 누가 발견하고, 그걸로 촉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든가 소문을 내든가 해야 기몽 장군이 나서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염려하지 마시지요. 시간이 오래 걸리면 갑갑하시겠지만, 그럴수록 마마가 그 일에 연루된 걸 기몽 장군이 모를 확률도 높아지니까요.”
그래. 거기서 위안을 찾아야겠지.
어쨌든 개씨 가문에 타격을 주는 일과 촉비에게 복수하는 일 모두 당장은 이루어지기 힘든 거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귀자에게도 나가라 한 다음, 다시 몸을 반쯤 눕히고 과일만 먹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베개 뒤쪽에 숨겨둔 내 일기장을 찾아 꺼냈다.
엎드린 채 일기장 뒷부분으로 바로 넘어가자, 전에 내가 보다가 그만둔 부분이 나왔다.
내 일기가 끊어지자, 누군가 그 일기를 뒤이어 적기 시작한 그 부분.
-과꽃 축제에 갔다. 널 데려갈 수 없어서 일기장을 데리고서.
하지만 그곳은 이미 문을 닫았더라. 축제 기간이 끝났대.
하지만 뭔가 정체에 대한 흔적이 나올 거라 예상한 바와 달리, 일기는 평범한 일생을 그려내고 있었다.
맥락상 ‘너’라는 게 날 가리키는 것 같긴 한데. 그것 외엔 없다.
그냥 어디를 갔고 어디에 갔고 어디에 갔다는 내용.
마치 자기가 이 일을 이어 적는 것처럼 적어놔서, 이걸 보는 것만으로는 일기를 적은 게 누구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뒤를 넘겨도 마찬가지여서, 이걸 적은 사람은 고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기 이름을 철저히 표현하지 않았다.
‘달리 이렇게 할 이유가 있나?’
그렇게 나는 오늘은 하루 종일 침상 위에서 게으름을 부리면서, 자다가 먹다가 일기를 보길 반복했다.
해가 졌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내내 몇 걸음 이상 걷지 않았다.
덕분에 오늘 내가 제일 많이 걸은 건 욕조에 씻으러 갈 때였다.
그러다 하늘을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했다.
하늘은 아직 하늘색이었으나 전체적으로 세상이 좀 침침해져 있었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도 마찬가지.
“원웅. 옷 입는 거 도와줘.”
나는 잠의로 갈아입은 다음 머리를 풀어 대충 하나로 묶고서 또 침상에 올라갔다.
며칠은 내내 이렇게 보낼 거다.
“머리 빗고 누우세요, 마마.”
아, 그래야지.
“그런데 마마. 그렇게 내내 누워 계시면 허리 아프지 않으세요?”
“응. 그동안 너무 오래 다녀서 괜찮아.”
“그동안 어디에 다녀오셨어요, 마마?”
“여기저기.”
개원이 집에도 가고 촉비 집에도 가고 내가 살던 동굴 근처에도 갔지.
그러나 하루 종일 빈둥거려서 좋은 건 나뿐인가 보다.
원웅은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겨주다가, 거울로 눈이 마주치자 시무룩해서 털어놓았다.
“저희는 마마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손꼽아 기다렸어요. 오늘은 오실까, 내일은 오실까, 모레는 오실까. 저녁엔 오시려나 하면서요.”
“그래?”
“당연하죠. 폐하께서 눈감아 주고 계시긴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실지도 모르겠고. 이러다 황후마마가 갑자기 찾아오시면 어쩌나 겁도 나고요.”
“아.”
“전염성이 강한 병이라 해둬서 다행히 아무도 오지 않았지만, 그 바람에 저희가 생필품을 가지러 가며 다들 슬금슬금 피하면서 얼마나 눈치를 주던지 몰라요.”
원웅이 빗질을 끝내자, 부성도 차를 한 잔 가져다주면서 말을 더했다.
“아예 안 돌아오시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마마.”
침울한 목소리들을 들으니 내가 없는 동안 마음고생을 좀 한 모양들이다.
“걱정 마. 당분간은 나갈 일 없어.”
“당분간이요?”
“당분간이 지나면 또 나가실 거예요?”
“아니. 말하자면 그렇단 거지.”
당황해서 되묻는 둘에게, 나는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고 쉴 테니 두 사람도 가서 좀 푹 쉬라 하고서, 다시 침상에 편하게 앉아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창밖을 구경했다.
그런데 또 수마가 몰려와서 눈꺼풀이 무거워질 즈음.
꾸벅꾸벅 졸다가 ‘그냥 슬슬 잘까?’ 생각하는데, 문밖에서 원웅이 조심스럽게 날 불렀다.
“마마.”
들어가서 쉬라니까 왜 왔지?
“들어와.”
여전히 잠에 취한 채 말하자, 원웅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소곤소곤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마마. 폐하께서 이쪽 방향으로 오고 계십니다.”
들뜬 목소리였다. 내가 안 돌아올까 봐 무서웠다는 것도 그렇고.
사람들이 자기들을 피해 다녔단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마음고생이 생각보다 더 심했나 보다.
하지만…….
“아직 병이 덜 나았으니 오지 마시라 해.”
미안해 원웅아. 이전처럼 떡돌이랑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건 당분간은 안 되겠어.
나는 황제가 내 가출을 둘러대기 위해 한 말을 그대로 뱉고서 두꺼운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불을 목까지 덮고서 눈을 감자, 원웅이 떠나지 않고 주춤대는 기척이 느껴진다.
다시 눈을 뜨고 보자 원웅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마마, 진심이세요?”
“어. 병이 나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요양이 필요하다고 그래.”
“하지만 마마는…….”
꾀병이시잖아요. 원웅이 뒷말을 뻐끔거린다.
요양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는 질문이 눈에 가득 담겨 있다.
그래도 모른 척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마마…….”
“마마는 피로해, 원웅아.”
원웅은 주저했으나 내가 단호하게 나오자 결국 밖으로 나갔다.
실눈을 뜨고 그 축 처진 어깨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사실 화풀이하는 거였다. 떡돌이한테.
어제 돌아왔을 때는 솔직히 떡돌이가 반갑기도 하고, 그가 날 너무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이런저런 감정도 밀려오고 해서 떡만 먹고 제대로 얘기를 나누지도 못했지.
하지만 반가운 기분이 가시자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올라온다.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반가운 건 어제 풀었으니 이젠 화를 풀어야겠단 감정이.
그래. 아직 떡돌이가 날 무시하고 나와 보지도 않던 게 기억에 선한데. 찾아온다고 바로 받아줄 줄 알아?
‘내가 과일을 받아줬다고 해서 사과까지 받아주는 거 아니라 이거지.’
젠장. 씩씩거리고 있자니 잠이 깨버리잖아? 안 되는데. 그냥 자야 하는데. 안 자면…….
‘젠장!’
잠이 졌고 호기심이 이겼다.
결국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서, 나는 기척을 숨기고 문 앞으로 다가간 다음 문에 귀를 가져다댔다.
내 거절을 들은 떡돌이가 뭐라고 둘러대면서 들여보내 달라고 할지 궁금했다.
-그래, 몸이 아직 좋지 않은가 보군.
아, 마침 원웅이 내가 아프단 핑계를 댄 참인가 봐.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들려온다. 여전히 목소리는 좋네.
나는 코웃음을 치고서 귀를 더욱 문제 바짝 붙였다.
뭐, 어쨌든 꾀병인 걸 알아도 최소한 꾀병이라고 탓하진 못하겠지. 이 꾀병은 자기가 댄 핑계이니.
코웃음이 나온다. 자, 어때 떡돌아. 너도 문앞에서 거절당하니 기분 나쁘지?
그럼 떡돌이 너도 이제 해봐.
내가 한 것처럼 원웅에게 이상한 핑계를 해대면서 들여보내 달라고 해봐.
-아프면 쉬어야지. 푹 쉬라 해라.
‘어?’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떡돌이는 내가 아프단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이렇게 말했다.
말만 그렇게 하고 꾸물거리며 안 가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정말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돌과 흙을 밟는 자박자박 소리가 멀어지자, 나는 당황해서 창가로 이동한 다음 살짝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그러자 오 공공이 등롱을 드는 모습과, 떡돌이가 가마에 앉는 모습이 보인다.
이어서 가마 뒤꼭지와 등롱은 점점 더 멀어졌다. 뭐 머뭇거리고 돌아보고 그런 것도 하나도 없었다.
‘와. 떡돌이 매정하네. 내가 안 아픈 걸 알면서 어떻게 그냥 갈 수 있어? 안 아픈 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왜 그러나 얼굴이라도 확인하러 와야 하는 거 아냐?’
그 충격은 다음 날 아침. 부성이 씩씩거리면서 한 말에 더욱 심해졌다.
“폐하께서 아침 식사를 함께하자고 촉비마마를 부르셨대요, 마마!”
떡돌이! 너!
“마마?”
참지 못하고 일어서자 부성과 원웅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는 손가락으로 원웅이 막 다듬고 있던 옷을 가리켰다.
“얼른 입는 거 도와줘. 내가 현장을 급습해야겠다.”
내가 진짜, 떡돌이가 다른 후궁이랑 밥 먹는 건 그러려니 넘어가도, 촉비랑 먹는 건 못 참는다.
* * *
“왔느냐.”
천빈의 병이 다 나았다는 말에 기분이 언짢아졌던 촉비는, 황제가 아침 식사를 함께하자며 자신을 부르자 기분이 좋아져 그를 찾아갔다.
방 안에 들어가 보니 이미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고, 황제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폐하를 뵈니 기쁩니다.”
촉비는 빙그레 웃고서 우아하게 가까이 다가갔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앉으라 손짓했고, 촉비는 그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막 젓가락을 들자마자 황제가 뱉은 명령에, 그녀는 뭘 먹기도 전에 속이 더부룩해졌다.
“짐이 맡겨둔 선황제의 서신 일부. 기몽이 가져가지 않은 나머지 모두 식사를 마치는 대로 모두 가져오라.”
촉비는 젓가락을 슬그머니 도로 내려놓고 당황해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눈을 내리깐 채 덤덤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명령을 내린 것처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였다.
촉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자기 그걸 왜 가져오라 하시는지요?”
“너는 이미 한 번 다른 사람들 앞에 그 물건을 흘렸다. 잘 간수할 거라 믿을 수 없다.”
촉비는 더욱 당혹스러워졌다.
“잘 간수하되, 그러지 못하더라도 괜찮은 물건이라 말씀하신 건 폐하가 아니십니까. 그 물건은 적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니 꽁꽁 숨겨둘 필요는 없다고 하셨지요.”
“어쩔 수 없이 들통나는 것과 고의로 들통 내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 보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