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나는 무림 고수라고!
어떻게 그에게 말을 걸까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러다가 그냥 자연스럽게 내 방에 들어가 있기로 했다.
그러면 어찌어찌 말할 기회가 생기겠지, 싶어서.
그런데 웬걸. 내 방에 몰래 돌아가 침상에 누워 있자니 떡돌이가 찾아온 것이다.
그의 발소리와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떡돌이가 내가 여기 온 걸 알고 나타난 줄 알았다.
그래도 숨을 죽이고서 있자니, 떡돌이는 내가 여기 있는 걸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의자에 묻은 먼지를 털고 그 위에 한 폭의 그림처럼 앉았다.
장막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 그림 같았을 거다.
떡돌이는 신경질을 낼 때도 얼굴은 예뻤으니까.
어쨌든 그러고 있자니, 떡돌이가 중얼거렸다.
“이젠 내가 떡을 줄 사람도, 짐을 떡돌이라 부를 사람도 없다.”
쓸쓸한 목소리였다. 문 닫고서 내 얼굴을 안 보려고 한 건 자기였으면서.
기가 막히기도 하고 좀 기분이 싱숭생숭하기도 해서, 나는 팔짱을 낀 채 장막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러고 있으려니, 떡돌이가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그게 뭔지는 소리만으로 추정하기 어려웠으나, 곧 하얀 떡가루의 고운 향이 나면서 종이 포장을 벗기는 바스락 소리가 났다.
“이걸 건네줄 이도…….”
떡이구나! 나는 대번에 알아채고서 장막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떡돌이가 벌떡 일어나는 형상이 보이며 우당탕 소리가 났다.
그런 줄 알긴 했지만 역시나. 내가 이 너머에 있는 줄 몰랐나 보다.
그래도 나는 말 없이 떡돌이 너머로 계속 그렇게 손을 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손에 얹어지는 게 없어서, 결국 나는 대놓고 요구했다.
“줘. 떡.”
그러자 조금의 주춤거림 뒤에, 내 손바닥에 말랑하고 폭신하고 뜨끈한 게 얹혀진다.
나는 손을 도로 회수한 다음 종이로 싼 부분을 손으로 잡고 얼른 떡을 입에 가져갔다.
푹신하고 고소한 향이 나는 걸 입에 넣고 씹고 있으려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촥’ 소리와 함께 장막을 걷고 나타난 얼굴을 보았을 때는 기분이 조금 더 좋아져서, 나는 얼른 떡을 삼키고서 그를 빤히 보았다.
“…….”
떡돌이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고서 새 떡을 또 내밀었다.
나는 그걸 받아서 또 먹었고, 그는 또 떡을 내밀었다.
그렇게 바구니 가득 쌓여 있던 떡을 거의 반 정도 나는 혼자 다 먹었다.
그러고 나서 누우려고 하자 떡돌이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체한다.”
그 목소리를 오랜만에 듣자 기분이 좋아졌으나, 나는 일부러 조금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고생하고 와서 좀 누워 있어야 해.”
그러고서 다시 누우려고 하자 떡돌이는 손을 뻗어서 내가 못 눕게 막고는, 재빨리 겉옷을 벗고 내 침상 안으로 들어와 내 뒤에 앉았다.
그러고는 나를 끌어다 자기 다리 사이에 앉히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내가 자기 가슴에 머리를 기대게 하고는, 두 손을 깍지 껴서 단단히 고정한 다음에 말했다.
“그럼 이러고 있자. 이러면 완전히 눕는 건 아니라서 안 체할 거다.”
“…….”
나는 그 상태로 잠시 멍하게 있었다. 그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고소한 밀가루 냄새와 그 사이에서 흐르는 갈색 설탕 냄새가 났다.
게다가 품은 또 얼마나 따뜻하던지, 이불을 안 덮었는데도 그냥 막 뜨끈뜨끈했다.
하지만 그러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하고 좀 화도 나서, 나는 그의 팔 아래로 쑥 빠져나가 침상 밖으로 간 다음, 아까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고서 단호하게 말했다.
“체통을 좀 지켜줬으면 좋겠어. 미리 말해두지만 난 아직 화가 덜 풀렸어.”
떡돌이는 허전해진 건지 두 손에 베개를 가져다 안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누가 잘못한 건데 왜 네가 화를 내지?”
“누가 잘못하긴. 네가 잘못했지.”
“짐이 잘못했다고?”
“그래.”
내 단호한 말에 떡돌이는 헛웃음을 뱉더니, 베개를 옆으로 치워두고 내 쪽으로 돌아앉아 팔짱을 꼈다.
“촉비를 역모죄에 얽혀 넣으려 한 건 너였다, 이 못된 반숙아.”
“생각 좀 해, 이 폐하야. 촉비가 니네 아빠 편지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니, 니네 아빠?”
“너희 아버지.”
“!”
“너희 아바마마…….”
점점 내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자 떡돌이는 갑갑한지, 말이나 계속해보라 손짓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재차 말을 이어갔다.
“난 전에 너한테 얘기했어. 촉비가 죽은 태감이랑 궁녀 시체 묻은 위치를 적어놓고 다닌다고. 걔는 변태야. 그런 걸 들고 다니면 변태야.”
“말이 옆으로 샌다, 반숙아.”
“근데 널 그걸 듣고도 덮었지. 그래서 이번엔 너랑 달리 정의감 넘치는 우리 기몽 장군한테 그걸 보게 하려 했어. 기몽 장군은 사람 봐가면서 덮어주고 그런 거 안 하거든!”
“…….”
“근데 시체 위치 적은 필첩이 너희 아바마마 편지로 변해 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말하다 보니 열이 받으면서 목 위로 짜르르 뭔가 올라온다.
나는 언성을 너무 높이지 않기 위해서, 그의 귀에 대고서 내 분노를 마구 털어놓았다.
“촉비는 죽은 태감 시체 위치를 들고 다녀도 봐주면서. 기몽이 그거 좀 보게 했다고 나한테 마구 화내고. 내가 막 기침하면서 문 앞에서 기다리는데, 얼굴도 안 보여주고. 그래, 그 얼굴이 금칠한 얼굴이냐. 그럼 내 얼굴도 금칠하겠다 이거야. 그래서 얼굴 좀 안 보여줬다. 근데 내가 잘못이라고?”
“귀가 간지럽다. 화내면서 자꾸 바람 좀 넣지 마라.”
“화가 나니까 홧김이 뿜어지는 거잖아.”
나는 막 진지하게 화를 내는데, 떡돌이는 요망하게 몸을 비비 꼬았다.
좀 가만히 있으라고 찰싹 허벅지를 때린 다음, 나는 다시 그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래, 넌 진심으로 사모하는 여자가 있었지. 그게 촉비다 이거지. 그럼 떡은 너희 쪽비랑 나눠 드세요. 가짜로 사모하는 천빈은 혼자서 계란 먹을 거다 이거예요. 그럼 되겠네. 아, 그럼 되겠어요!”
말을 하고 나니 내 침상인데 떡돌이가 앉아 있고 나는 옆에 쪼그리고 있는 것도 화가 난다.
나는 떡돌이를 잡아당겨 침상에서 나오게 한 다음 얼른 이불 안에 들어가 휙 돌아누워 버렸다.
황제의 당황한 목소리가 이제야 뒤에서 들려왔다.
“잠시만. 그게 무슨 소리냐?”
“왜, 진짜로 사모하는 건 쪽비고 나는 가짜로 사모하는 천빈 아냐?”
“그게 아니라. 네가 서신에 넣어둔 게 필첩이라니? 촉비가 선황제 폐하의 서신을 가지고 있단 걸 알고 그런 게 아니냐?”
뭐야?
“촉비가 그걸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아는데?”
말하다 보니 더욱 화가 나서 나는 이불을 걷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뭣이냐, 네가 그랬지. 물건이 문제가 아니라며. 물건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며. 그럼 안에서 나온 게 필첩인지 서신인지 뭔 소용이야?”
그 말을 뱉고 나니 내 심장에 양파 하나가 딱 들이박혀서 눈시울이 매워진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쳐다보다가 휙 등을 돌려 다시 이불을 덮고 누웠다.
갑자기 떡 반 바구니에 넘어가서 그의 품에 잠시나마 안긴 내가 너무 미련하게 여겨졌다.
내가 자꾸 이러니까 떡돌이가 나를 떡만 주면 헤헤 웃으면서 화가 풀리는 미련한 사람이라 여기면서 알랑방귀를 뀌는 거다.
나는 무림인들이 두려워하는 대단한 악적인데!
“소여야.”
“나는 반숙이다.”
“!”
“넌 모르겠지만 떡돌이, 나는 여기를 떠나 있는 동안 천 대협 소리를 들으면서 지냈다. 내가 지나가면 정파 그것들이 ‘천 대협 천 대협!’ 하면서 막 그랬단 말이다. 무림 영웅 천반숙. 신진고수 천반숙. 소림사 손녀 손반숙. 네가 그걸 알아?”
이불 안에서 막 외치다 보니, 어감이 좀 그래서 말을 멈췄을 때였다.
밖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떡돌이가 우나?
슬쩍 이불 안에서 몸을 돌린 다음, 나는 이불을 살짝 들어 올리고서 떡돌이를 보았다.
반성을 하는지 그가 정말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흥. 들으니까 미안하긴 한가 봐?
“……좋아. 여기까지 하겠어. 이제 떡돌이는 가 봐.”
일단 피곤한 건 맞으니까. 게다가 나는 반성하는 사람에겐 기회를 준다.
나는 떡돌이와 달리 대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으니까.
나는 단호하게 말싸움 1차전을 끝낸 다음, 다시 돌아누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또 밀어 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있으려니 문이 드르륵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불을 살짝 내리고 고개를 돌려 보니, 가란다고 떡돌이 이 자식이 진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빈 의자를 보자 좀 열이 받았지만, 그래도 떡 바구니는 놓고 간 걸 보자 아주 조금 기분이 풀려서 나는 다시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래도 내 침상이 좋긴 좋아. 따뜻하네.
* * *
다음날.
사하비단이란 무림 단체가 자꾸 길을 헤집고 다니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인 대신들은, 황제의 얼굴이 평소보다 유난히 반짝이는 걸 보고 당황했다.
“오늘 폐하께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천빈 마마 편찮으신 후로 늘 분위기가 저조하시더니. 오늘은 얼굴이 아주 우윳빛입니다.”
대신들은 연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그러다가 회의가 끝나갈 즈음. 결국 대신 하나가 참지 못하고 황제에게 묻고 말았다.
“폐하.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그러나 황제는 뽀얗고 말간 눈을 해가지고서는 단호하고 까칠하게 대답했다.
“그런 일 없다.”
그 매정한 대답에 질문한 대신은 시무룩하게 손을 내렸다.
없으시구나. 그럼 그냥 없다 하시지, 왜 저렇게 서늘하게 대답하실까.
다른 대신들은 질문한 대신을 눈으로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회의 말미. 모든 안건에 대한 회의가 끝났을 즈음. 황제의 얼굴이 유난히 환했던 비밀이 밝혀졌다.
“천빈이 몸이 많이 좋아졌으니 슬슬 본궁에 돌아갈 준비를 하지.”
대신들은 동시에 깨달았다. 아, 천빈 마마가 드디어 괜찮아지셔서 저러시는구나.
이어서 그들의 기분도 좀 좋아졌다.
눈빛이 맑아지신 걸 보니, 이제 회의 시간마다 대신들을 노려보진 않으시겠구나!
“봄꽃이 피기 전에는 본궁에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두라.”
“예, 폐하.”
“그리고 천빈에게 줄 궁전 준비도 잘해두어라. 여러 달 앓았으니 많이 병약해졌을 거다.”
대신들이 물러나자 오원요는 흐뭇한 얼굴로 서 있다가 황제에게 슬쩍 웃으며 농담했다.
“역시 천빈 마마께서 오시니 폐하 표정이 대번에 밝아지십니다.”
그러나 황제는 단호하게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런가요?”
“그래. 천빈은 얼마나 더 건방져진 건지, 오자마자 짐에게 화부터 내더라. 가출하고 와서 그게 후궁이 할 행동이냐? 세상에 그런 후궁이 어디 있느냐.”
재차 코웃음을 친 황제는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귀엽다고 늘 넘어갔지. 짐은 이젠 그러지 않을 거다. 짐이 너무 천빈에게 휘둘렸어. 짐은 이제 줏대 있게 굴 거다.”
이어서 그는 옆에 놓인 바구니를 오원요에게 건넸다.
“자.”
“이게 무엇입니까, 폐하?”
“과일이다. 떠돌이 생활하느라 못 먹었을 테니, 이거나 먹고 반성하고 있으라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