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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67화 (167/283)

##  167화. 혼자 먹지 마

나는 천천히 일기장을 한 장 넘겼다.

떨리는 손으로 쓰기 시작한 글씨는 뒤로 갈수록 진정되다가 마지막 줄은 비교적 단정했다.

내 일기를 이어서 적은 첫 문장은 이랬다.

-시작은 셋이었으나 중간엔 둘이 되었고, 결국 아무도 남지 못했다.

‘무슨 소리지?’

뭐라 써두긴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가장 마지막 장을 펼치자, 그곳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그곳으로 갈게. 너는 외로운 걸 싫어하니까.

이건 또 무슨 뜻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귀자가 나를 불렀다.

“마마.”

일기장을 덮고 고개를 들자 귀자가 내 지시대로 이쪽을 쳐다보지 않은 채 날 부르고 있었다.

“마마, 이제 슬슬 내려가야 합니다. 산은 빨리 어두워지잖아요. 너무 늦게 내려가면 길을 잃습니다.”

“어어. 그래. 그러자.”

나는 일기장을 덮고 일어서며 내 일기를 이어 적은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해보았다.

어쨌든 일기를 이어 적을 정도면 최소한 내 일기를 읽고 비웃진 않았겠네.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일기장 소문을 낸 것도 아닐 거 같아.

‘나중에 궁전에 돌아가서 읽어보면 되겠지.’

찬찬히 읽다 보면 누가 쓴 건지, 안에 흔적이 있을 거다. 다른 글도 아니고 일기잖아?

이후 우리는 산을 빠르게 내려왔지만 내려오는 도중 날이 어두워져서 결국 쪼그리고 앉아 달달 떨며 노숙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마마.”

귀자는 코를 훌쩍이며 사과했지만 애초에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도 시간을 끈 것도 나이기에 뭐라 탓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책임도 딱딱 나눠서 진다.

“괜찮아. 네가 날 따라온 거지 내가 널 따라온 게 아니니까.”

“마마…….”

“본궁은 이리 어질다.”

내가 배를 내밀자 귀자는 귀한 영물이라도 본 듯 넙죽넙죽 절을 했고, 나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귀자는 눈치껏 절을 끝낸 다음 알려주었다.

“그런데 마마. 마마는 아직 본궁이 아니십니다.”

“정말이야? 그럼 언제부터 본궁이라 해도 되는데?”

“수도에 마마께서 머무르고 계신 그 전각을 벗어난 다음에요.”

“……생각해보니 떡돌이가, 내가 행궁에 다녀올 때쯤이면 훨씬 살기 좋은 집을 마련해 준댔는데. 이젠 다 까먹었겠지?”

“그럴 리가요. 행궁에서 싸우셨으니 본궁까진 아직 그런 명령을 안 내리셨을 겁니다, 마마.”

* * *

다음날부터는 방향을 바꿔서, 나는 귀자가 안내하는 대로 촉비 본가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 꼼수도 부렸다.

“뒤를 그림자들이 따라오고 있을 테니, 그자들을 한 번 따돌리고 가야 합니다, 마마.”

“너도 그림자 출신이면서. 그래도 돼?”

“하지만 마마께서 촉비 마마 본가에 갔던 게 폐하 귀에 들어가면…….”

“싫어하겠지.”

“네.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요. 차라리 아예 뚝 떨어뜨리고 가는 게 낫습니다, 마마.”

“이렇게까지 도와도 돼?”

“어차피 촉비 본가에 들렀다가 행궁에 돌아가실 텐데요 뭘.”

그건 그래.

나는 귀자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해 추적자들을 따돌렸다.

물론 이동하는 와중에 틈틈이 전에 먹은 영약을 내 내공으로 흡수하는 작업도 했다.

시시때때로 가부좌하고 운기를 하면서, 나를 기절시키기까지 한 내공을 내 무공에 맞도록 다듬고 정제했다.

그래도 천년비일 때보다는 내공이 줄겠지만 어쨌든 강해져서 나쁠 건 없지.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촉비의 본가가 있는 저택에 도착했다.

“저기야?”

나는 그리 높지 않은 산꼭대기에 서서, 귀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부지를 보며 물었다.

“네. 저기가 촉비 마마의 본가입니다.”

“저 담벼락에 둘러싸인 부분 전부?”

“네.”

“생각보다 큰 가문이네?”

“1공 3귀의 가문이죠. 마마의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대단한 명문가입니다.”

“제일 가문이 좋은 건 누구야?”

“1공 15귀의 온씨 가문입니다. 황후 마마의 가문이지요.”

내가 연신 감탄을 토해내자 귀자는 그게 웃긴지 웃으면서 물었다.

“마마의 사가도 상당히 커다란 거로 알고 있는데, 촉비 마마 가택이 그렇게 신기하십니까?”

“당연하지.”

“당연할 정도인가요?”

“그럼. 촉비 집이 저 정도로 큰 줄 알았으면 내가 종이를 500장만 만들지 않았을 테니까.”

“아!”

젠장. 저렇게 커다란 저택이면 종이 500장을 누구 코에 붙이란 거야? 한 구간 정도 묻고 나면 끝이겠구먼.

* * *

결국 우리는 밤을 새워 100장을 추가로 만든 다음에야 일에 착수했다.

일에 착수했다고 해도 별 건 없다.

내가 귀자에게 설명한 대로 담벼락을 넘어간 다음 땅을 파고 종이를 묻으면 끝이니.

하지만 내 예상처럼 빼곡하게 묻을 수는 없어서, 대신 누군가 팔 것 같은 곳을 골라 다니며 종이를 묻었다.

일단 이 종이가 발견되는 게 중요하니까.

“그런데 마마. 제 생각엔요. 종이를 그냥 촉비 마마 처소에 묻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행궁이든 궁전이든, 촉비 마마가 실제로 지내는 곳이요.”

“왜?”

“촉비 마마 집이잖습니까. 촉비 마마 집에서 발견해봐야 다들 쉬쉬해 줄 것 같은데요.”

“네 말도 일리는 있는데.”

“예.”

“기몽이 너무 머리가 좋아서. 그건 안 돼. 자기 코앞에 증거를 직접 갖다 주면 오히려 안 믿더라고. 자기가 직접 파낸 것만 믿는 남자야.”

다행히 귀자도 기몽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수긍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긴 합니다.”

어쨌든 귀자는 타천천보다는 약하지만, 돌아다니면서 몰래 종이조차 못 묻을 정도의 무공 솜씨는 아니었고, 덕택에 우리는 둘이서 촉비 집의 반 정도를 헤집은 뒤에는 목표를 완수하고 나올 수 있었다.

* * *

작업을 마친 다음에는 나와 귀자는 이동 시간을 좀 더 늘여서 서둘러 42천도까지 이동했다.

가끔은 말을 타고 지치면 마차를 타고 기운이 나면 경공으로 뛰어가면서, 그야말로 이동에 온 속력을 쏟았다.

아직 천소여 몸은 천년비일 때만큼 체력이 좋진 않아서 이동하고 있자면 폐가 부서질 것처럼 아팠지만, 촉비 집에 들르면서 너무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이동하다 보니 마침내 우리는 행궁이 있는 42천도에 도착했다.

행궁에서 멀리 떨어진 객잔에 방을 잡은 귀자는 내가 갈아입을 옷을 구해 가져다주었고, 그사이 나는 씻을 물을 가져다 달라고 한 다음 커다란 통 안에 들어가 며칠 동안 고된 몸을 씻었다.

다 씻고 나가 보니 귀자가 귀족 아가씨들이 입을 법한 옷을 가져다 놓아서, 며칠 내내 입고 뛰느라 바짓단이 다 닳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도 갈아입었다.

내가 옷을 입고 단정하게 거울을 보고 있자 밖으로 대기하던 귀자는 안으로 들어와 내가 머리 빗는 걸 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마마? 돌아가실 건지요?”

하지만 나는 거울을 보느라 못 들은 척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마? 이제 돌아가실 건가요?”

귀자가 다시 물었지만, 나는 머리를 하나로 말아 쌓으면서 또다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귀자는 내가 땋을 머리를 위로 올릴 즈음, 이번에는 바꿔서 말을 걸었다.

“슬슬 행궁을 떠날 시기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마마.”

“벌써?”

“네. 날이 풀리면 폐하께서도 그만 본궁에 돌아가자 하시겠지요.”

“아.”

“적어도 그때까지는 행궁에 돌아가셔야지요. 돌아가실 생각이시라면요.”

귀자는 내가 기껏 여기에까지 와 놓고서는 궁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쳐다보기만 하는 게 이상한 모양이다.

“본궁에 돌아갈 때가 됐는데도 마마께서 오지 않으시면, 사람들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그런데…… 젠장. 모르겠어. 분명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42천도까지는 열심히 뛰어왔는데.

막상 성문을 보자 기분이 싱숭생숭해져서 안으로 들어가기가 불쑥 민망해진단 말이야.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서 손을 들고 인사할까? “떡돌아. 나야.” 이렇게?

아니면 슬쩍슬쩍 들어가서 일하는 그의 책상 앞에 나타나 인사할까? “안녕. 나야.” 이렇게?

그것도 아니면…….

“배가 아파.”

“예?”

“긴장하니 배가 아프다, 귀자야.”

“어이쿠. 의원을 불러다 드릴까요?”

“그 배가 아냐.”

긴장 배와 아픈 배는 따로 있다.

나는 거울 속에 비추어진 천소여 모습을 뚫어져라 보다가 귀자를 보고 물었다.

“귀자야. 안쪽에선 내가 병에 걸린 거로 되어 있다 했지?”

“예, 마마.”

“그러면…… 이렇게 하자.”

* * *

월요 황제가 천빈에게 전언을 전하라 보낸 그림자가 돌아왔을 때, 오원요는 자기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그는 괜히 찻잔을 가는 척 주전자를 새 잔에 대고 기울이면서 그 그림자가 황제에게 보고하는 걸 귀담아들었다.

“천빈 마마를 계속해 쫓았으나, 어느 지점에서 놓치고 말았습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하지만 그림자가 보고한 내용은 황제가 기다리던 내용이 아니었다.

“놓치다니?”

황제의 질문에 그림자는 무릎을 굽히고서 빠르게 대답했다.

“제가 폐하의 명을 받고서 수도로 돌아갔을 땐 마마께선 이미 개원 그자의 집에 없었습니다. 귀자가 함께 이동했단 이야기를 들어 소신도 그 뒤를 쫓았으나, 이후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지셨습니다. 소신이 느끼기엔…….”

“말하라.”

“일부러 소신을 따돌리신 듯했습니다.”

황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그림자는 몹시 송구스러워서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오원요는 황제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서 얼른 그를 대신해 소리를 질렀다.

“제대로 일을 했어야지! 뭘 어떻게 했기에 천빈 마마를 놓쳐? 마마께서 널 따돌리고 가실 리가 있느냐! 네가 놓친 거다!”

오원요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그림자는 더욱 시무룩해 고개를 숙였다.

월요는 그 광경을 보다 한숨을 내쉬고서 그만하라고 손을 저었다.

“되었다. 그만 나가라.”

그림자가 나가자 월요는 쓸쓸히 웃고서 중얼거렸다.

“추적을 눈치채고 끊고 간 걸 보니, 정말 더는 돌아올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폐하!”

“……떡이나 종류별로 하나씩 가져다 다오. 바구니 안에 예쁘게 넣어서.”

“떡이요?”

이 와중에?

오원요가 걱정스레 보자 황제는 덤덤하게 시선을 내리고 붓을 쥐었다.

“어쨌건 계속 병에 걸렸다 둘 수는 없지 않으냐. ……죽었다고 둘러대기라도 해야지. 천빈에게 마지막으로 가져다주는 간식이라 하자. 이걸 주고 맛있게 먹는 걸 마지막을 보았다 치자. 그러고 나서…… 좋은 곳에 갔다고 하자. 그렇게 이별한 걸로 치자.”

“폐하!”

오래 지나지 않아 태감이 바구니 가득 떡을 담아 왔다.

하지만 월요는 그걸 들고 쉬이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날이 완전히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그 떡을 보고만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을 먹고 바구니를 들고 서재 밖으로 나왔다.

그는 가마를 타지 않고서 천빈이 기거하는 전각으로 걸어갔다.

전각 앞에는 평소처럼 천빈의 궁녀들이 이것저것 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가, 황제를 보자 기가 죽어서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폐하.”

천빈이 가출한 걸 알기에 황제가 방문해도 그저 기뻐할 수만은 없어서였다.

월요는 일어나라 손짓하고서 방 안으로 들어가며 지시했다.

“짐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

“예, 폐하.”

마침내 방 안에 들어온 월요는 장막을 꼼꼼하게 다 내린 천빈의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

장막 너머로 어쩐지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해 그는 쓸쓸히 웃었다.

월요는 의자를 끌어다 침상 앞에 놓고는 그 위에 앉아 침상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우두커니 있다가, 그는 저 안에 천빈이 있는 것처럼 괜히 말을 걸어보았다.

“이젠 내가 떡을 줄 사람도, 짐을 떡돌이라 부를 사람도 없다.”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그는 바구니에서 떡 하나를 들어서 하얀 종이 포장을 깠다.

“이걸 건네줄 이도-.”

그러나 말을 그치기도 전. 장막 사이에서 손이 쑥 튀어나왔다.

“!”

월요는 너무 놀라 일어서고, 그 바람에 의자가 엎어지면서 쿠당탕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 해둔 탓에 들어오는 이는 없었다.

월요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면서 장막 사이로 드러난 손목을 바라보았다. 뭐지, 저거? 웬 손이지?

그렇게 멍하게 손을 보고 있자니, 안에서 너무나 듣고 싶던, 하지만 이제 들을 수 없을 거라 여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줘. 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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