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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66화 (166/283)

##  166화. 나를 아는 누군가

귀자는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냥개가…….”

“기몽 장군.”

“예?”

“우리 기몽이 뭐 하나 발견하면 절대 물고 안 놓지.”

물리는 대상이 나만 아니면 기몽은 참으로 잘생기고 능력 좋은 장군이다.

귀자는 멍하게 있다가 느리게 수긍했다.

“확실히. 기몽 장군이라면 무슨 수든 쓰긴 하겠지만…… 하지만 마마. 기몽 장군이 자기가 꽂힌 일에 미친, 아니, 열심히 달려들긴 하지만 남한테 쉽게 이용당할 작자가 아닙니다.”

“알아.”

한 번 이용해 먹으려다가 엎어졌지. 기몽이 엎은 건 아니었지만.

그 안에서 갑자기 선황제 서신이 나와서 일이 커진 거지…….

그런데 참 이상하단 밀이지. 아직도 모르겠어. 왜 필첩이 선황제 서신으로 바뀌었을까?

“거기선 원래 필첩이 딱 나와야 했는데.”

“필첩이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중얼거리자 귀자가 옆에서 의아해하며 묻는다.

나는 그에게 일단 침상에 이불 싸매고 누우라고 한 다음, 솔직하게 알려주었다.

“촉비가 보따리를 떨어뜨렸잖아. 내가 기몽을 그 현장에 불러왔고. 거기서 선황제 서신이 발견되고.”

“그랬지요.”

“난 그 보따리 안에 필첩이 있는 줄 알았거든?”

“필첩이요?”

“촉비가 죽인 태감이랑 궁녀들. 어디에 시신을 처리했는지, 하나하나 적어 놨더라고. 왜 그게 선황제 서신으로 바뀐 건지 모르겠어.”

귀자는 눈을 맹하게 끔뻑거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나도 이불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됐어. 어쨌든 촉비는 기몽이 물어 뜯으러 갈 거니까.”

“달리 생각하신 방도가 있습니까?”

“기몽이 수사하다가 중간에 실패한 일이 있지.”

‘천년비진쾌도래’라고 쓰여 있는 종이. 수사 상황을 내가 다 보고 받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알기로 중간에 멈췄을 거다.

진범인 비원이 멀쩡히 돌아다니고, 비원을 팔아넘기려 했던 우 귀인은 오히려 자기가 비원에게 당했으니.

“예, 마마.”

“그때 기몽이 발견한 종이. 그런 비슷한 종이를 만들어서 촉비 본가에 묻어둘 거다.”

“예? 어떻게요?”

“담벼락을 넘어간 다음 흙을 파서 안에 넣고 덮는 거지.”

“아하.”

나는 이불을 끌어안고 있다가 의욕에 꽉꽉 차 돌아누우며 지시했다.

“일단 자자. 내일부터 하면 돼. 내일 한 번 더 진료받고. 네 몸 상태가 괜찮다고 하면 출발하자.”

* * *

‘천빈에게 전하라. 한 달 시간을 준다고.’

황제의 전언을 가지고 수도로 올라온 그림자는 당황스러웠다.

‘어디 가셨지?’

떠나기 전엔 분명 개씨 가문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돌아와보니 그곳에 없었던 것이다.

“마마께선?”

다른 그림자에게 묻자, 그 그림자는 손가락으로 성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도 밖으로 떠나셨네. 귀자가 함께 갔으니 괜찮을걸.”

“뭐?”

당황하는 그림자를 보며, 동료 그림자가 의아해 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 계속 쫓아가면 되지.”

“쫓아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러지!”

“또 무슨 문제가 있나?”

그림자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문제? 있었다. ‘기한을 한 달 준다’라는 황제의 명령을 전해야 하는데.

이 명령을 전하지 못하면 시간 계산을 뭘 기준으로 해야 한단 말인가.

황제는 지금쯤 가는 날 오는 날 계산해서 하루하루 세고 있을 사람인데, 정작 천빈이 그 말을 들을 수 없다면!

“아이고, 나 가네! 나중에 보세!”

* * *

일기장을 숨겨둔 곳으로 가는 길은 좀 멀다.

하지만 나와 귀자에게는 할 일이 많았기에, 우리에게 이 여정은 조금도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머네요, 마마.”

나에게 이 여정은 조금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까지 가는 건지요? 혹시 이 길로 행궁까지 갑니까?”

“아니.”

“그럼요?”

“내 일기장을 숨겨둔 데 간다니까.”

“뭔 일기장을 이리 깊숙이 숨겨두신 겁니까. 사람 일기장이 다 거기서 거긴데요.”

이동하던 도중 잠시 객잔에서 쉬어갈 때, 귀자가 참지 못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큼큼 헛기침을 한 다음 느긋하고 호젓한 사파의 고수다운 모습을 챙기며 대답했다.

“귀자 너도 알겠지만 천년비 소문이 그리 좋진 않지.”

“안 좋은 수준이 아니라 쓰레기지요.”

“…….”

“그래서 이상합니다. 우리 마마는 그럴 분이 아니신데. 대체 어찌……?”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자 귀자가 말을 바꾸고서 헤실헤실 웃는다.

원웅이 부성이랑 같이 ‘마마!’ 외치면서 놀 때 알아봤지만, 입이 좀 팔랑거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입이 팔랑거려도 심장이 무거우면 됐지. 나는 그를 혼내는 대신 듬직한 모습으로 설명해주었다.

“나에 대한 헛소문이 많았지만, 그래도 체통을 잃지 않고 위엄 있는 고수의 모습을 가지려 노력을 했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도 힘든데, 두려움에 멸시까지 받으면 더 힘들 거 같았거든.”

“!”

“하여튼 그래서 늘 듬직한 모습을 보였지. 하지만 나도 힘든 생각이 있으면 막 털어놓고 싶잖아. 가끔 누구랑 얘기하고 싶은데, 친구나 가…….”

이런. 천소여는 가족이 있지. 말을 좀 바꾸자.

“친구나 부하가 없으니 말할 상대도 없고. 그래서 그때마다 일기를 썼어.”

“아.”

“그 안엔 내 약점은 없지만 내 약한 모습이 가득해. 그래서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깊숙이 숨겨두었다.”

귀자는 내 말에 표정이 묘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기분이 좀 이상해져서 괜히 머리를 긁었다.

내 일기장에 대해 이렇게 대놓고 얘기한 건 처음이라 좀 싱숭생숭한걸?

“어쨌든 귀자야, 넌 이거 하나만 명심하면 된다.”

“네, 마마.”

“지금 활동하는 그 채신머리 없는 천년비는 나랑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다.”

“예. 아무렴요.”

귀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준 다음,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지시했다.

“식사 마치면 내 방으로 와라. 할 일이 많다.”

* * *

일기장을 찾으러 가면서 내가 귀자와 하는 건 바로 가짜 ‘천년비진쾌도래 종이’ 만들기이다.

하지만 필적을 바꿔야 하는 데다 만들어야 하는 게 500장이다 보니, 이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촉비 본가 전체에 종이를 묻으려면 500장은 필요하지.

계속 붓을 움직이다 보면 팔도 아프고 그렇지만, 우리는 낮에는 이동하고 밤에는 객잔을 잡아 가짜 천년비진쾌도래 만들기를 오래도록 계속했다.

그렇게 하기를 한참.

마침내 내 일기장을 숨겨둔 산 아래에 도착했다.

“여기다.”

나는 개원이와 함께 지냈던 산 아래에 서서 잠시 멍하게 산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산을 보자 마음이 술렁거리면서 싱숭생숭해졌다.

나는 여기서부터 저 산까지 몇십 번을 왔다 갔다 이동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내던 동굴에 가는 길도 알고 지름길도 알고 멀리 돌아가는 길도 안다.

그 동굴에 가면 개원이가 웃으면서 날 맞이하던 모습도 생생히 기억난다.

“마마? 왜 그러십니까?”

“산이 예뻐서.”

“예?”

“공기도 좋고.”

“산을 좋아하시는군요.”

너무 감상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웃고서, 나는 산길로 발을 디뎠다.

여기까지 온 김에 내가 죽은 장소.

나와 개원이가 살던 그 동굴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커다래졌지만, 당시 기억이 살아나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 일부러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나와 개원이의 동굴로 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대신 나는 그쪽으로 빠져서 곧장 일기장을 숨겨둔 곳을 찾았다.

귀자는 내가 일기장을 숨겨둔 곳을 발견하자 놀라서 탄성을 뱉었다.

“어디 바위틈 같은 데 숨겨두신 줄 알았는데. 아름답습니다, 마마. 등잔 밑이 어둡다고, 허점을 노려서 이런 곳에 숨기셨군요?”

귀자는 날 칭찬했지만,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해주기 어려웠다.

나는 바위틈에 일기장을 숨겨둔 게 맞아서.

그런데…… 내가 죽은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여기는 더이상 바위가 덩그러니 있는 산 중턱이 아니었다.

빼곡한 나무 사이로 동그랗게 땜빵처럼 난 부분에 과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던 것이다.

빈틈도 없이 빼곡하게.

멍하니 그걸 보고 있자니 귀자가 옆에서 쫑알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런데 신기하네요. 이 계절에 과꽃이 피다니요. 과꽃은 빨라도 여름은 되어야 피지 않습니까, 마마. 이 부근만 날씨가 따뜻한 걸까요?”

“……모르겠어.”

왜 하필 과꽃이 피어 있을까.

나는 멍하게 중얼거리고 있다가, 일기장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래, 난 일기장 찾으러 온 거지.

하지만 이곳 경치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건 일기장이 여기 없을 수도 있단 뜻이겠지.

꽃밭을 만들 정도면 완전히 이곳을 샅샅이 다 보았단 걸 테니.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나는 일기장을 숨겨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가보았다.

다행히 쪼개진 심장처럼 보이는 커다란 바위틈 깊숙이 손을 뻗자 종이 묶음이 손끝에 닿았다.

‘있다!’

나는 안도해서 얼른 일기장을 꺼냈다.

‘내 일기장! 있다!’

“찾으셨군요?”

내가 일기장을 끌어안고 좋아하자, 꽃구경을 하던 귀자가 같이 기뻐해주었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에게 이쪽을 보지 말라 당부하고서 바위 위에 앉아 무릎에 일기장을 얹고 주르륵 훑어보았다.

‘내 일기장 맞지? 누가 본 흔적은 없겠지?’

사실 봤더라도 알아챌 방법은 없겠지만.

“!”

하지만 일기장을 주르륵 살피자마자, 여기 와서 과꽃을 보았을 때만큼 놀라고 말았다.

내 일기장. 누가 본 게 틀림없었다.

일기장 여기저기에 누군가 한두 마디씩 작은 글씨로 깨알처럼 말을 덧붙여둔 것이다.

내 말에 대답하듯이.

그러니까…….

-사람들은 내 어떤 점이 싫은 걸까.

이 부분에 동그라미를 친 다음 작게 글씨로 써두었다.

-네가 자기들보다 뛰어난 점.

절대로 내가 써둔 거 아니다.

물론 내가 혼자서 칭찬을 잘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기장에 이런 걸 써두진 않는다.

뭐야. 그럼 내 일기장을 훔쳐보고 과꽃밭을 만들어 둔 사람이 쓴 건가?

빠르게 종이를 더 넘겨 보았다.

-따뜻한 밥을 먹고 싶다. 편하게 앉아서. 주위에 시체가 없는 곳에서.

이런 투정 같은 글에도 글귀가 붙어 있었다.

-내가 그쪽으로 갈 수 있다면.

몇 장을 더 넘기자 “안녕, 일기장아.” 하고 써둔 별말 아닌 부분에도 “안녕, 천년비.”라고 대답이 쓰여 있다.

그렇다고 모든 부분에 대답이 쓰인 건 아니고. 그냥 제멋대로 규칙 없이 써둔 것 같았다. 읽으면서.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부끄럽기도 하고 멍하기도 하고 코끝이 좀 찡하기도 해서 일기장을 퍽퍽퍽 열심히 뒤로 넘기고 있자니, 어느 지점에서 내 일기가 끊겼다.

개원이가 외출했을 때, 혼자 동굴에 있으려니 싫어서 이쪽으로 와 쓰고 남긴 일기다.

내가 죽기 하루 전에 쓴 일기.

물론 이 일기를 쓸 당시의 나는 그저 개원이랑 행복에 젖어 있어서, 앞부분과 달리 이때의 일기는 마냥 밝기만 했다.

하루 뒤에 내가 죽을 거란 생각은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 뒤에 난 아무것도 적은 게 없을 텐데. 뒤에 먹물이 번진 자국이 있었다.

뒷장에도 뭔가를 적은 것처럼.

주저하다가 나는 종이를 잡고 한 장을 넘겨보았다.

“!”

역시나. 누군가 내 일기 뒤를 이어 적고 있었다. 내 일기에 짧게 답을 써둔 그 글씨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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