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복수는 절대 잊지 않아
“몸과 영혼의 싸움이라.”
타천천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늘 결과가 궁금했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타천천의 앞으로 술잔 하나가 내밀어졌다.
“취향이 나쁘십니다.”
술잔을 건넨 이는 태안루주였다. 타천천은 빙그레 웃고서 술잔을 받아 마셨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주는 궁금할 줄 알았는데요.”
“그다지.”
“루주는 과거에 미련이 없군요?”
태안루주는 어깨를 가볍게 까딱이고 자기도 술을 한 잔 따라 마셨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사람들을 훑었다.
가볍게 주고받던 몇 합 공격은 점점 거세졌고, 두 천년비가 주고받는 공격 사이사이엔 살수가 섞였다.
구경꾼은 더 늘어났고 이제 몇몇 무림인들은 천년비의 얼굴을 알아보고 있었다.
“아니, 저자는 천년비 아닌가?”
“천년비가 또 애먼 사람을 잡고 있군.”
“상대하는 여잔 누구지?”
“글쎄. 천년비가 하나둘 공격하나. 한데 저 여잔 좀 약해 보이는군.”
“약해 보인다고? 자네 장난하나? 지금 천년비가 저 여자 손끝 하나 못 건드리고 있는데?”
“천년비가? 일부러 그런 척하는 거겠지!”
“하지만 저 여자, 정말 대단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천년비를 상대하잖나.”
둘 다 천년비란 걸 아는 타천천은 그저 이 상황이 우습기만 해서, 계속 웃음을 흘리면서 연신 술잔을 기울였다.
태안루주는 말없이 옆에서 같이 술을 마셨다. 그러다 승패가 슬슬 보이기 시작할 즈음.
그가 자신의 다루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며 지나가듯 말했다.
“용화노가 사라졌단 말을 들었는데요.”
타천천은 여전히 엉덩이를 붙인 채 대답했다.
“그렇지요.”
“괜찮습니까?”
태안루주의 말에는 질문이 생략되어 있으나 타천천은 바로 알아듣고서 살포시 웃었다.
“용화노가 원하는 건 그가 원하는 건 아니겠지만 내가 원하는 바와 비슷하니 괜찮습니다.”
최대한 꼬고 꼰 말에 태안루주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타천천은 그를 더이상 바라보지 않았다.
태안루주는 몸을 돌려 그 소란에서 빠져나았다.
* * *
사람들이 정황상 ‘내’ 편을 드는 건 맞는데. 어째 욕을 듣는 건지 응원을 듣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그 응원을 듣다 보니 오히려 기분은 상하고 이 싸움은 그리 재미있지도 않다.
가짜는 내 몸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기 방식으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강시라는 이점을 살리기 위해서인지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에만 치중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혀가 저절로 차졌다.
‘나 강시요’라고 홍보라도 하고 있나? 급소는 막아라 좀.
하여튼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귀자를 찾는 거지 내 몸을 차지한 누군지 모를 사람과 싸우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내 지금 몸은 체력이 부족해서 시간을 끌면 내가 불리해질 수도 있었다.
“이쯤하고 끝낼게.”
나는 적당히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기로 하고서 그녀의 복부로 손을 보내는 순간.
내 비장의 한 수나 다름없는 천수비를 사용했다.
“!”
대외적으로 사용하던 내 무공은 천견비였지만 너무 대외적이다 보니 누군가 알아볼지도 몰라서.
반면 천수비는 내 특기이지만 오히려 본 사람 수는 적었다. 대부분 하늘로 갔거든.
강시니까 저쪽은 하늘로 가진 않겠지만, 가짜는 내 손이 배에 닿는 순간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뒤로 확 물러났다.
하지만 강시의 몸이 튼튼하긴 튼튼한지 완전히 뒤로 넘어가 쓰러져서도 기절하긴커녕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기나 했다.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으로.
‘뭐야? 왜 저렇게 쳐다봐? 내가 봐주면서 싸울 줄 알았나.’
왜 저런 표정인진 모르겠으나, 나는 흐트러진 피풍의 양 끝을 잡고 툭 털고서 구경꾼들 사이에 섞인 타천천을 쳐다보았다.
‘천년비가 날아갔다’라거나 ‘천년비를 날린 저 여자 누구냐’라고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타천천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어디서 난 건지 술잔을 들고서.
그러다 싸움이 완전히 끝난 듯하자 털레털레 다가와 웃었다.
“난 녕녕 그대가 이길 줄 알았어.”
“귀자 어딨어?”
“이름은 모르겠고. 찾는 게 내시라면 지금쯤 뱃놀이 중이지.”
째려보자 그가 활짝 눈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은 보기엔 좋았으나 몹시 짜증이 났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서 그의 귀를 잡아당겨서 거기에 대고 속삭였다.
“네가 내 목숨을 구했으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 하지만 다음에 또 허튼짓하면 가만히 안 둘 거다.”
“기대되는 일이지만. 그러기엔 아직 그대가 너무 약하지 않을까?”
나는 빙그레 웃는 타천천의 귀를 놓았다.
그러고 나루터로 달려가려는데, 아까 날아갔던 가짜 내가 우물우물 다가왔다.
왜 저러나 싶어 보자 가짜 나는 쭈뼛거리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정말 존경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요.”
뭐라는 거야, 타천천과 한패거리면서? 게다가 이 자리에 있는 건 타천천이랑 같이 귀자를 납치했다는 거 아냐?
아까 너 내 목에 칼도 들이밀었어요, 이 사람아. 물론 나도 천수비로 공격하긴 했지만.
할 말이 여러 개지만 굳이 나눌 필요도 없다 싶어서 나는 몸을 돌려 나루터로 달려갔다.
* * *
타천천은 옆을 보았다. 아유정은 멍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천년비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타천천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녀를 놀렸다.
“그대가 존경하는 풍랑 공이 그대는 눈에도 안 들어오나 봅니다.”
아유정의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타천천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천 대협은…… 제가 싫으신 걸까요.”
“그냥 내 부하23 정도로 보는 거겠지요. 존재감 없지만 싫은.”
아유정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그러나 그 기색이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천년비의 얼굴을 알아본 정파인 몇 명이 이를 갈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천년비. 잘도 당당히 얼굴을 들고 다니는구나.”
“오늘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의 주위로 다른 사파인들이 아니꼬워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기가 누구 무덤이 될진 붙어 봐야 알지 않나?”
“정파인들 허세는 몇 번을 봐도 꼴 보기 싫구먼.”
분위기가 흉악해지자 아유정은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 공격 준비를 했다.
타천천은 마지막 술 한 모금을 들이켜고서 놀러 가잔 투로 지시했다.
“길게 상대할 것 없습니다. 갈 준비 하지요.”
“네.”
* * *
“어? 반숙이 손님 아닙니까?”
내가 나루터에 가서 까치발을 들고 배를 여기저기 살피며 다니자 내 단골 뱃사공이 얼굴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잘됐다 싶어서 나는 얼른 그에게 다가가 사정을 설명했다.
“어떤 X 같은 새끼들이 내 친구를 배에 태워서 흘려보냈다!”
“예? 정말인가요?”
“그래. 나 좀 도와줘. 나 좀 도와줘.”
뱃사공은 의리 있게도 바로 나를 태워주었고, 우리는 여기저기 배란 배는 다 확인하면서 다닌 끝에 호숫가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가라앉아 가는 배에서 귀자를 발견했다.
귀자는 꽁꽁 묶인 채 입이 막혀서 몸의 반이 물에 잠겨 있었다.
“아이고오! 귀자야!”
나와 뱃사공은 얼른 귀자를 끌어다 우리 배에 놔두고 그의 젖은 옷을 벗겨 물기를 짰다.
“의원이 여기 근처 어디 있을 겁니다.”
“빨리 가자. 빨리!”
뱃사공은 의원이 있는 곳으로 최단 거리로 노를 저었고 나는 귀자가 괜찮은가 빠르게 살폈다.
“다행이다, 귀자야. 입술이 파랗긴 한데 그 외엔 괜찮아 보여.”
“손님? 입술이 파랗다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럼 더 빨리 가줘! 더 빨리!”
뱃사공이 온 힘을 다해 노를 젓는 동안 나는 초조해서 귀자의 팔을 주물러주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뱃사공은 호숫가에 배를 댔다.
“고마워!”
나는 뱃사공에게 진심으로 인사하고서 귀자를 업었다.
“제, 제가 업는 게 낫지 않을까요?”
뱃사공이 물었지만, 그에게 더 폐를 끼칠 순 없어서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서 의방으로 뛰었다.
“의원! 사람이 물에 빠졌소!”
다행히 의원은 의방 안에 있어서, 내가 외치자마자 뛰어나왔다.
의원이 가장 변두리에 있는 방을 치워주어서 나는 귀자를 거기에 눕혔다.
의원은 귀자를 빠르게 진맥하며 말했다.
“가벼운 저체온증이로군. 심각하진 않소.”
“그럼 괜찮은 건가?”
“몸을 데울 만한 뜨거운 탕약을 한 사발 주지.”
의원이 두꺼운 이불을 가져다주고 나가자, 나는 다시 귀자의 남은 젖은 옷도 다 벗겨 놓고서 그를 이불로 똘똘 말아주었다.
이후 의원이 가져온 탕약을 먹이고 나서 한숨 재우자 귀자는 그제야 좀 제정신이 드는지 눈이 또렷해졌다.
“오늘 하루는 여기서 재우시오.”
나는 귀자의 옷에서 발견된 돈으로 값을 치른 다음, 내 식사와 이불도 가져다 달라고 하고서 추가로 돈을 냈다.
그러고서 의원이 나가자 바닥에서 자려고 이불을 깔고 그 위에 앉아보았다.
하지만 내가 이불에 앉자마자 귀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내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왜 그래?”
의아해서 쳐다보자 귀자는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절 이 꼴로 만든 자에게서 마마가 ‘천년비’란 이름의 무림인이란 것과 지금 ‘천년비’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가 가짜란 걸 들었습니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타천천 개새끼 알차게도 말하고 갔구나.
나는 뭐라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멍한 채 있었다.
그 상태로 귀자를 쳐다보자 귀자도 나를 같이 바라보았다.
이게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귀자는 내가 천소여가 아니란 건 모르는 눈치였다.
기몽이랑 비슷한 오해를 하는 듯한데……. 내가 한때 천년비란 가명을 사용했단 정도로.
하지만 기몽은 의심을 하는 거고, 이쪽은 다 들어서 확신을 하는 것이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멍하게 귀자를 쳐다보다가 그가 일단 나를 멀리하는 기색은 아니기에 정색하고 물었다.
“귀자야. 넌 의리가 있느냐.”
그가 입을 다물길 바라고 한 말이었으나 귀자는 생각보다 더 의리가 있었다.
그는 결단에 찬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평생 충성을 바칠 겁니다.”
“폐하는?”
“폐하를 배신하지 않는 선에서 천빈 마마를 최우선으로 두고 행동할 겁니다. 폐하보다요. 사람 일이 꼬이고 꼬여 천빈 마마를 최우선으로 둘 수 없다 해도, 이 사실은 평생 함구할 겁니다.”
그가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황제를 버리고 내게만 충성한다고 말했다면 오히려 좀 찝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떡돌이를 배신하지 않는 선에서 내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하자 오히려 좀 믿음이 갔다.
나는 귀자의 단호한 머리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를 직접 일으켜 세워주었다.
“알았으니 일어나.”
“마마, 소신은-.”
“이 일을 비밀로 지키면 된다.”
“당연하지요!”
“그리고 나도 이제 황궁에 돌아갈 거야.”
단호하고 다부진 표정으로 있다가, 내가 돌아간단 소리에 귀자는 깜짝 놀라 나를 보았다.
“그, 그럼 이제 폐하를 받아주시는-.”
“그건 아니야.”
“!”
“있을 곳이 없으니 돌아가는 거지.”
단호한 말에 귀자는 “그렇군요.” 하고 멍하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런 모습을 보다가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해야 할 게 두 가지 있다.”
“두 가지요?”
“하나는 내 일기장을 찾는 거.”
“예? 일기장요?”
귀자는 왜 여기서 일기장 이야기가 나오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일기장은 왜…….”
“남들이 읽길 원하지 않으니까.”
“그건 그렇겠지만…….”
“다른 하나는. 촉비 가문에 들렀다 갈 거야.”
귀자의 표정이 아까와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워졌다.
“예?”
나는 팔짱을 끼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촉비와 머리싸움을 할 자신이 없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머리 좋은 사냥개가 촉비를 물어뜯게 하는 수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