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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64화 (164/283)

##  164화. 그 손 치우시지요

화가 나서 나를 붙잡으려는 그를 확 뿌리치고서 나는 곧장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요 며칠간 사 먹어 본 중에 가장 탕후루를 맛있게 만들던 가게에 찾아가 탕후루 세 개를 사먹고, 저녁무렵이 되어서야 다시 개원이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땐 이미 단맛의 기운을 빌어 어느 정도 내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비야.”

내가 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자 개원이는 날 찾아와 다시 한번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내 결심을 말해주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여길 떠날 거야.”

개원이는 입술을 꾹 다물고서 나를 쳐다보다 물었다.

“황궁에 돌아가려고?”

“그래.”

개원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좋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지금이라도 너랑 네 동생 둘 중 누가 범인인지 확실히 알려줄 수 있다면 다시 생각해볼게.”

“비야…….”

“원래도 평생 가출할 생각으로 나온 건 아니었어. 네가 개운호 얼굴 보여준다니 따라온 거지. ……개운호가 진범이란 걸 네가 확실히 알아낸다 해도, 네 동생이 날 죽였는데 우리가 어떻게 둘이 살겠어.”

“…….”

“그래도 알고 싶었어. 내가 사랑한 사람이 날 배신한 게 아니란 걸.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했어. 너한테 쌍둥이 동생이 있단 것 빼고는.”

개원이의 우는 얼굴을 보자 나도 마음이 아파왔지만, 내가 한 말처럼 진범이 운호라는 확실한 증거를 개원이가 찾아왔더라도 우리는 결국 틀어졌을 거고, 개원이는 또 저런 표정을 지어야 했을 거다.

개운호가 진범이란 걸 알게 된다면 나는 그 복수를 개운호에게 했을 거고, 그러면 개원이는 또 아팠을 테니까.

설령 내가 개원이를 위해 복수를 포기한다 해도 나는 내 복수를 포기하게 만든 개원이를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보진 못했을 테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미워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꼭…… 황궁에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

개원이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네가 따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줄게, 비야. 나와 살지 않더라도, 네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줄게.”

“나는 후궁이야. 지금은 폐하가 날 기다려준다고 하지만 원래 후궁이 말없이 가출하는 건 안 돼. 완전히 안심하려면 난 외국 가서 살아야 하는데.”

난 우리나라 말도 가끔 막히는데 외국어까지 익힐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 말을 하면 자존심이 상하니 이 얘기는 하지 말자.

“그리고 폐하 사랑이 대수야?”

“아니야?”

“그럼. 생각해보니 그렇더라. 폐하와 내 사이가 틀어지면 뭐 어때. 폐하가 나 싫다고 녹봉 안 주는 건 아니거든. 그래도 후궁으로 있으면 녹봉 꼬박꼬박 나오고 나만 챙겨주는 궁녀랑 태감이 여럿이야. 맛있는 음식도 많아.”

개원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찬찬히 물었다.

“그런 게 자유보다 좋아?”

“자유? 당연히 좋지. 얼마나 멋져.”

나는 인상을 쓰고 팔짱을 낀 채 그를 온실 속 도련님 보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자유도 돈이 있고 평화가 있어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거야. 난 남이 흘린 거 주워 먹고 상한 음식 주워 먹고 강에서 물고기 잡아다 태워 먹으면서 자유롭게 살았어. 축축한 동굴에서 자고 길바닥에서 잤어. 객잔에서 자는 날엔 습격받아서 도중에 깨면서 자유롭게 살았어. 근데 그 시절이 좋았다곤 말 못 하겠어.”

“!”

“네가 말하는 자유가 돈도 펑펑 쓰고 좋은 객잔에서 지내고 음식에 독도 없고 암살자도 없는 자유야? 그런 자유는 나도 좋긴 해. 근데 가출한 후궁으로 있으면 이번엔 관부에 쫓겨.”

정 내가 떡돌이 얼굴을 보는 게 힘들면 그때는 피 토하는 꾀병을 연달아 부려서 환자라 여기 못 있겠다고 궁 밖으로 나오면 될 일이지.

하지만 이 얘긴 굳이 개원이에게 하지 말자.

게다가 내가 개원이의 집을 떠나려는 이유는 개원이나 개운호 둘 중 하나가 날 죽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이게 큰 이유지만, 이 이유만큼 큰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복수 방법을 바꿔서 그렇다.

개원이랑 개운호 둘 중 누가 범인인지 정 알 수 없다면 권력이란 걸 이용해서 개씨 가문 전체에 충격을 줘볼 생각이거든.

멸문을 시킨다거나 이런 건 개원이 때문에 하지도 못하겠고 그럴 마음도 없지만, 최소한 분이 풀릴 정도로는 한 번 흔들어 줄 거다.

그러면 어쨌든, 범인에게도 피해가 가겠지. 아직 그렇게 할 구체적인 방법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이 얘긴 하지 말자.

나를 슬픈 눈으로 보는 개원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나를 보고만 있었다.

그의 진지한 시선에 심장이 아렸지만 나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

한참만에야 개원이는 쓸쓸하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난…… 너랑 동굴에서 지내도 좋았다. 축축한 바닥에서 지내도 좋았고, 같이 열매를 따다 씻어 먹어도 좋았다.”

나도 좋았어, 그건.

천년비로 지낸 세월 중 너랑 함께한 시간만 좋았어 개원아.

그렇기 때문에 너랑 네 동생 둘 중 누가 원수이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단 거야.

“그 동굴이, 너한텐 유희였고 나한텐 궁지여서 그래.”

“!”

* * *

탕후루 세 개로 입안에 단 칠을 해둔 덕에 입 밖으로 온갖 쓴 말을 뱉을 수 있었는데.

그러고 나니 잠이 안 온다.

탕후루 기운이 떨어지자 개원이가 커다란 눈으로 날 바라보던 게 떠올라서 심장이 막 두근두근하고 식은땀이 난다.

그 시절은 나도 좋았다고 말할 걸 그랬나.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 개원이가 나한테 계속 매달리면 어떡해.

난 개원이를 위해서 운호를 봐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개원이가 범인이라면 더더욱 그런 마음은 없다.

하지만 개원이의 눈은 너무 연약해.

결국, 밤새 끙끙거리느라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나는 짐을 챙겨서 방 밖으로 나왔다.

원래는 그놈 집에서 당당하게 아침 식사까지 하면서 내 원수 후보 둘을 샅샅이 보고 오늘 돌아온다는 개원이의 아빠도 보고 가려 했지만, 개원이를 더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아 계획을 바꾼 것이다.

“야반도주하는 사람 같네.”

그런데 보따리를 들고 멍하게 대문으로 나가고 있자니 기둥 뒤에서 운호가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났다.

휙 돌아보자 그가 기둥에 삐딱하게 기대어 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변태 여자. 형님이 너 변태라 싫대?”

나는 그냥 무시하고 가려다가 마음을 바꿔서 그 앞으로 돌아와 이미 물어보았지만 대답을 듣지 못한 말을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네가 진짜 천년비를 죽이지 않았어?”

“천년비는 멀쩡히 살아 있지 않나. 그쪽이나 형님이나 왜 자꾸 산 사람을 죽었다 하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죽인 게 아니라면 개원이가 죽였어?”

“형님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

“그럼 네가 죽였네.”

운호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위협적으로 고개를 기웃했다.

“이상하지. 이 여자, 진짜 왜 자꾸 그 일을 캐물을까.”

“그건 알아서 상상하고. 이것만 명심해.”

“?”

“너희 집안에 뭔 일이 생기면 그건 다 네 탓이야. 남 탓 같아도 네 탓이야.”

“협박 같다?”

굳이 대답할 필요 없는 말이라 나는 돌아서서 그 집 대문을 나왔다.

마음은 어수선하지만, 계획은 딱 잡혀 있었다. 일단 귀자를 찾는 거다.

귀자가 내 대답을 기다린다 했으니 그를 찾아가 돌아갈 거라 한 다음에 돈 좀 빌려달라 하자.

돈을 빌려서 유람하듯 돌아가고…….

가는 길에 내 일기장 숨겨 둔 데 좀 들러보고.

그러고서 돌아가면 떡돌이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이겠지.

그가 싹싹 용서를 빈다면 내 너그러운 마음이 움직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또다시 날 무시한다면!

뭐, 같이 무시하면서 그냥 사는 거지. 그가 날 무시해도 녹봉은 나올 테니.

* * *

‘어라.’

그런데 전에 귀자를 만났던 곳에 가 보니 귀자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빨리 왔나? 귀자 자나?’

그래, 새벽이니 잘 수도 있지.

나는 귀자의 사정을 이해해주고서 그가 깨기를 기다리며 먹을 탕후루를 사려 했는데.

탕후루 장수도 아직 안 나왔다.

이럴 수가. 두 시진쯤 있다 나올걸.

결국, 별수 없이 근처 골목길에 쪼그려 앉아서 귀자가 날 발견하고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날이 밝고 장사꾼들이 하나둘 가게 문을 열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숫자가 늘어나도록 귀자는 보이지 않았다.

‘귀자 돌아갔나.’

그래도 멍하게 있자니 웬걸.

기다리는 귀자는 오지 않고 생각도 못 한 타천천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멀리서부터 눈에 띌 정도로 활짝 웃으며 다가온 타천천은 내 앞으로 오더니 들고 온 찐빵을 건네며 인사했다.

“이런 곳에서 다니 만나다니. 정말 좋다, 녕녕.”

“너 진짜 한가해 보인다.”

슬슬 배가 고프긴 한지라 일단 찐빵은 받아서 입에 넣었다.

“안에 독 들었으면 어쩌려고 그냥 먹어?”

타천천이 그걸 보고서 한소리를 했지만 무시하고 그냥 먹었다.

사실 찝찝했지만 여기서 그만 먹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그냥 먹은 거다.

타천천은 그런 내 모습을 생글생글 웃으며 보다가 내가 마지막 한 입을 다 입에 넣고 손을 털자 다정하게 물었다.

“보따리 들고 어디 가려고?”

“알 거 없다.”

나는 딱 잘라 말하고서 손을 털고 일어났다.

여기서 귀자를 기다리고 싶지만 타천천이 자꾸 말을 걸면 귀찮으니 돌아다니면서 귀자를 찾아볼 생각이다.

그러나 타천천은 다른 곳에 가지도 않고 나를 계속 졸졸 쫓아다녔다.

그게 너무 귀찮아서 쳐다보자 타천천이 허리를 굽히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딜 그렇게 쳐다봐? 혹시 누구 찾아, 녕녕?”

“!”

나는 확 돌아서서 타천천의 멱살을 쥐고 그를 담벼락에 쾅 가져다 붙였다.

“귀자 어디로 데려갔어.”

타천천이 대답하기 전에 목덜미에 차가운 검날이 닿았다.

옆을 보니 거울 속에서나 보던 ‘내’가 굳은 얼굴로 내 목덜미에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내 얼굴’을 한 가짜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권고했다.

“감히 검을 들이밀어 죄송합니다. 단주님 목에서 손 치우시지요.”

손을 치우는 대신 나도 같이 권했다.

“사랑하는 얼굴이라 때리기가 싫네. 너나 치워.”

안 치우면 때릴 거란 소리였으나, 내 얼굴을 한 가짜는 내 얼굴을 덤덤하게 거절했다.

“존경하는 분의 명령이지만 따를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그래. 싫구나. 어쨌든 한 번씩 말로 권고를 주고 받았으니 된 거겠지.

“존경은 얼어 죽을.”

나는 가짜의 말에 내 대답을 들려준 다음, 발을 들어 상대의 복부를 걷어찼다.

차마 내 얼굴은 때릴 수 없어 배를 찬 것이었으나, 가짜는 내가 자기를 때릴 줄 몰랐던지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사이 타천천은 슬그머니 내 손목을 치고서 몸을 뒤로 빼더니, 눈 깜짝할 새 자리를 피하며 히죽 웃었다.

그놈을 다시 잡으려 했으나, 내 몸에 들어온 가짜는 나와 달리 타천천을 철석같이 위하는 인물인 듯 검을 크게 휘두르며 날 베려 들었고, 나는 타천천을 쫓지 않고 가짜의 손목을 걷어찼다.

“뭐야 넌.”

“겨루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길 수 있다면 더욱 영광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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