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진실을 꿰뚫어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쪽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운호 자식이 나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리자, 새끼벌들이 신이 나서 물어댔다.
“어, 운호. 천 대협이랑 아나?”
“어떻게 알아?”
“우리는 방금 알았는데. 자네 발이 넓구먼!”
새끼벌들은 특유의 붙임성으로 운호에게도 왁자지껄 떠들었지만, 운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보기만 했다.
그걸 보자 이 새끼벌들이 내 퉁명스러운 행동을 왜 너그럽게 보아 넘겨주는지 깨달았다.
저 싹수없는 새끼한테 익숙해져서 그렇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건 아니다.
나는 덤덤하게 그를 쳐다보다가 휙 고개를 돌려서 앞에 놓인 음식이나 계속 먹었다.
그러고 있자니 멀지 않은 곳에서 그가 의자를 드르륵 빼내는 소리와 “너희는 저 여잘 어떻게 아는데?” 하고 묻는 운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에 우리 문파에서 천년비랑 싸운 적이 있거든. 그때 천 대협이 우릴 도와줬지. 손만 몇 번 내려치는 걸로 사하비단 자식들을 무찌르는데 얼마나 대단하던지. 천년비도 꼼짝 못하고 달아…….”
대답은 운호와 다른 탁자에 앉은 무정원이 굳이 몸을 틀어서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
운호는 인상을 구기는가 싶더니 발로 맞은편 의자를 걷어차 무정원 쪽으로 의자가 날아가게 해버렸다.
“아! 저 새끼 성격 진짜.”
무정원은 혀를 차면서도 의자를 붙들었다.
“넌 진짜 성격 죽여야 돼, 개운호. 아니면 그 성격이 널 죽일 거다.”
새끼벌이 하는 말 치곤 맞는 말이었으나 운호는 코웃음을 치고서 다시 드륵 소리가 나게 일어나더니, 나를 한 번 쏘아보고는 돌아서서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방금 와 놓고서.
“미안. 다들 나중에 봐.”
그걸 본 민신은 또 그게 익숙하다는 듯, 정말로 미안하단 듯이 사과하고 따라 나갔고, 다른 새끼벌들은 둘이 나가자 열심히 운호를 씹기 시작했다.
“하여튼 저거 진짜 성질 고쳐야 돼.”
“쟤는 정파 천년비라니까. 성격이 왜 저래?”
“자기 형 아니었으면 진작에 싸움이 나도 수백 번은 났을 건데. 원이 형 덕분에 묻혀 가는 거지 뭐.”
“민신이 고생이네. 맨날 따라다니면서 대신 사과하고. 불쌍하게.”
같은 정파라고 해서 다 같이 사이좋진 않은가 보네.
하여튼 운호 자식. 나한테만 저따위로 구는 건 아니긴 하구나.
“천 대협. 혹시 운호와 예전에 싸우면서 만났습니까?”
“아니. 왜?”
“저 자식이 원래도 까칠하긴 한데, 오늘 유독 까칠해서요. 천 대협을 보고 더 저러는 거 같은데…….”
아니네. 나한테만 저따위로 구는 게 맞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모르겠다.
쟤는 처음 날 소개 받았을 때부터 저랬으니. 뭔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
처음엔 천년비 이름을 들먹이며 그랬고, 방금도 천년비 이름…… 어?
‘그러고 보니 운호 그놈, 천년비 이름이 나올 때마다 더 까칠해지는 거 같은데?’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머리부터 등까지 싸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깨달음이.
그럼…… 혹시 저거……?
‘좋아하나?!’
* * *
운호에 관한 생각은 그가 떠난 후 정파 새끼벌들이 다시 내 일기장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쪼그라들어서 한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들이 내 일기장 안에 있을 대단한 무공 비급에 대해 추리하는 동안, 나는 손톱을 질근질근 깨물면서 그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가 한 생각은 딱 두 개였다.
첫째. 만약 내 일기장 존재가 알려졌다면 범인은 날 죽인 사람일 확률이 높다.
즉, 운호가 날 죽였다면 운호고 개원이가 날 죽였다면 개원이다.
물론 지나가다가 우연히 제삼자가 발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둘째. 내 일기장을 숨겨 놓은 곳에 가 봐야겠다.
하여튼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창백해졌고, 그 덕에 정파의 새끼벌들은 내가 피곤해 보인다면서 놓아주었다.
그러면서 다음 약속을 기약했지만, 나는 절대로 나가지 않을 거다.
대신 나는 빠른 걸음으로 개원이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해야 운호와 개원이가 내 일기장을 봤는지 안 봤는지 확인할 수 있을지 떠올렸다.
제일 좋은 건 안의 내용을 슬쩍 흘리면서 반응을 보는 건데.
문제는 그런 식으로라도 내 일기장을 유출하고 싶지 않아.
게다가 운호가 만약 ‘천년비 일기장’을 읽었다면, 내가 그 내용 이야기를 하면 ‘천반숙이 왜 천년비 일기장 내용을 알지?’ 하고 의심하기 시작할 거다.
의심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 몸에 영혼이 들어갔으리란 짐작은 웬만하면 못 하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니까.
개원이는…… 개원이가 내 일기장을 봤다면…… 후우.
그러면 최소한 뒤처리는 해주지 않을까 싶긴 한데.
이럴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사람들이 내 일기장 얘기를 한다는 건 이미 뒤처리가 안 됐단 뜻일 테니, 범인은 개원이는 아닐 거 같아.
그런데 한창 곰곰이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자니, 아까 돌아간 줄 알았던 운호가 문 근처 커다란 나무에서 혼자 생각에 잠겨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를 따라간 민신은 그새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고 혼자 있는데, 그 옆모습이 개원이랑 정말로 똑 닮아서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주 휑해졌다.
그 옆모습을 노려보고 있자니 그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살기를 감추려 고개를 내리깔았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 운호도 굳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
힐긋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다시 정면을 쳐다보고만 있어서, 나는 그 옆모습을 재차 노려보다가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가자 조사할 게 있다며 자리를 비웠던 개원이가 마침 지나가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불렀다.
“잘 왔다, 숙아.”
개원이는 나를 보자 다가와서는 잠시 얘기 좀 하자면서 안쪽으로 끌었다.
그러고는 내가 머무는 방 안에 같이 들어가자 목소리를 낮추어서 입을 열었다.
“네가 사망한 시간에 운호가 ‘그곳’에 있던 건 아닌지 찾아봤어.”
“알아. 그럴 거라 했잖아. 결과 나왔어?”
“그게…….”
“안 나왔어?”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그곳엔 없었다고 해. 하지만 그 근처엔 있었다고 해. 그래서 범인인지 아닌지 모르겠어. 근처에 있던 건 확실히 본 사람이 있는데, 짧은 사이에 널 죽이러 다녀올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의 설명을 차분하게 듣다가, 결론이 ‘모른다’로 나자 황당해서 개원이를 보았다.
개원이는 자기가 말을 해놓고서도 민망한 듯 굳은 표정이었다.
“미안해.”
눈이 마주치자 그가 얼른 사과했다.
진심이 느껴지는 그 표정을 보다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개원이가 내 팔에 손을 얹으려 했으나, 나는 손을 피해버렸다.
“비야.”
그가 애처롭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단호하게 돌아서서, 우리 둘 다 피하고 싶어 했을 말을 꺼냈다.
“어쨌든 너희 형제 둘 중 하나가 범인인 거잖아. 네가 아니면 걔겠지. 그런데 걔가 아닌지 모르겠다고? 그럼 너네.”
“비야.”
개원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서 고개를 숙였다.
개원이 동생이 범인일지도 모를 가능성을 알았을 때부터, 조사가 애매해지란 건 알았다.
자기가 날 죽였단 누명을 벗고 싶어서 동생 얘기를 하긴 했지만, 과연 그가 친동생을 내 복수의 대상으로 밀어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안다. 이건 개원이 잘못이 아니야. 가족이 있다면 다들 그렇겠지.
난 가족이 없지만, 그 정도는 짐작이 간다. 하지만…….
“비야.”
그가 다시 나를 불렀으나,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뛰어나갔다.
이 형제 중 하나가 하여튼 내 원수라면, 그리고 둘 중 누가 원수인지 알 수 없다면 둘 다 꼴도 보기 싫었다.
그렇게 뛰고 있자니, 여전히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선 채 어딘가를 하염없이 보는 개운호 자식이 눈에 들어온다.
그걸 보자 눈에 불꽃이 튀어서, 나는 성큼성큼 그자에게 다가간 다음 멱살을 틀어잡을 기세로 쳐다보았다.
“뭐야.”
운호는 생각에 잠긴 게 방해받은 게 싫은지 눈썹을 찌푸렸다.
“내내 나와 눈도 못 맞추더니. 왜 사람을 노려보고 그러지, 형님 애인?”
둘러대는 대신, 나는 여기서 결단을 볼 각오로 물었다.
“솔직히 말해. 네가 천년비 죽인 거 아냐?”
개운호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처음엔 형님이 묻더니 이번엔 형님 애인이 묻는군. 뭘 하자는 건지.”
“말해.”
그래도 내가 다부지게 묻자, 운호는 짜증스러워하는 투로 대답했다.
“둘 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이걸 대답이라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나는 남 일이니까 지나치게 흥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빈정거렸다.
“개원이랑 한번 그 얘길 한 적이 있거든.”
운호도 빈정거렸다.
“대단히 너그러운 연인이로군. 전 연인 이야기도 같이해주고?”
휩쓸리는 대신 나는 본론만 또박또박 꺼냈다.
“사람들은 개원이 천년비를 죽였다는데. 개원은 천년비를 안 죽였대. 그러면 범인은 개원이랑 똑같이 생긴 너야. 맞아?”
운호는 뭐라고 바로 입을 열었으나 곧 픽 웃으면서 조롱조로 말했다.
“사람들은 늘 함부로 떠들지.”
그 말에 이번에는 내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 나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는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데…… 개원이든 운호든, 하여튼 두 형제 중 하나가 나를 깊은 산 속에서 죽였다고 쳤을 때.
범인이 누구든 ‘내가 죽였다’고 나선 사람은 없진 않나? 운호가 죽였다면 그는 개원이 흉내를 내느라 못 냈을 거고.
개원이는…… 왜 개원이가 죽였다고 소문이 났지?
아니, 왜 개원이가 죽였다고 소문이 났는지는 안다.
개원이 외엔 나한테 가까이 접근해 방심시킬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겠지.
내가 궁금한 건 그거다. 어떻게 ‘천년비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지.
그게 알려지고,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찾아낸 답이 개원이일 테니까.
‘정말 뭐지? 내가 죽은 건 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지?’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서서히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앉았고, 내가 여기서 운호에게 뭐라고 따지건 그가 형 흉내를 내서 천년비 죽인 걸 시인하진 않으리란 것도 떠올랐다.
내가 멍하게 있자, 운호는 돌아서며 차갑게 말했다.
“할 말이 그뿐이라면 가지.”
갑자기 와서 왜 행패를 부리는진 모르겠지만 신경 쓸 가치도 없단 투였다.
그 말에, 나도 일단 의문은 뒤로하고서 마지막으로 그를 향해 빈정거렸다.
“네가 뭐라고 하든 난 네가 범인이라 생각해. 너라면 천년비를 방심시켜서 죽일 수 있잖아. 천년비가 사랑한 개원이와 똑같이 생겼으니까.”
“…….”
“그리고 천년비를 죽일 이유도 확실하고.”
그 말에 운호는 픽 웃었다.
“나한테 그럴 이유가 어디 있단 거지?”
그러더니 갑자기 소름 돋는 얼굴로 변해서 빈정거렸다.
“아니, 내가 이유가 있어 천년비를 죽였다 해도. 그걸 천년비와는 상관도 없는. 천년비에게서 형님을 가로챈 네가 무슨 상관인 거지?”
무슨 상관이냐고?
“너 좋아하잖아.”
“!”
내 정곡에 운호는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져서 나를 쳐다보았다.
“너……?”
그걸 보자, 죽어가는 나를 내려다보던 얼굴이 떠오르면서 아주 조금 통쾌한 마음이 든다.
나는 최대한 사악하게 웃으면서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귀에 대고 정곡을 한 번 더 쑤셔 넣었다.
“너희 형.”
“!”
그 말에 후들후들 떨던 운호가 갑자기 입술을 ‘부득’ 씹는 소리가 나더니, 그의 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운호는 한 손으로 나를 밀치고서 다른 한 손으로는 입술을 닦더니 황당한 척 내게 되물었다.
“뭐라고?”
“너 그래서 천년비도 죽이고 나도 싫어하는 거잖아.”
“무슨! 사람을 무슨 변태로! 이 여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