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정파는 피곤해
없는 개원이를 불러보지만, 그가 갑자기 내 마음의 소리를 듣고서 눈앞에 나타날 리 없단 건 알고 있다.
내가 질색하는 사이. 새끼벌들이 나눠 탄 배 세 척은 내가 탄 배를 가로막을 정도로 다가왔다.
“천 대협!”
무정원은 내가 질색하는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그저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는 날랜 몸놀림으로 자기 배에서 내 배로 옮겨탔다.
늘 붙어 다니는 정파인들답게, 그 뒤를 두 명이 따라서 이동했다.
순식간에 내 배에 네 명이 타게 되자 조용하게 둥둥 떠다니던 배가 그들이 앉는 방향으로 한 번씩 출렁인다.
나는 똥 씹어먹은 표정으로 무정원을 쳐다보았다.
“이곳에서 천 대협과 다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전에는 잘 들어갔습니까?”
“그쪽은 뭐 다른 볼일 있다더니. 왜 여기서 배 타고 있소?”
“하하. 다 같이 41성으로 가면 사태를 전달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멀리서 벌어진 일을 전하기 위해 따로 이쪽으로 왔지요.”
41성에서 사하비단 피풍의들한테 아주 제대로 당해 놓고서는 ‘하하’ 소리가 잘도 나오겠다.
게다가 소식을 전하러 왔으면 소식만 전해야지, 왜 와서 배 타고 노는 거야? 입 밖으로 그를 철썩철썩 두드릴 진실이 마구 튀어 나가려 한다.
“흠!”
나는 위엄 있게 헛기침을 하는 걸로 자꾸 튀어 나가려는 말을 참아냈다.
이 ‘천반숙’ 이름으로는 절대로 악적 취급을 받으면 안 되니까. 되도록 말을 조심해서 해야지.
말을 함부로 할 때는 절대로 강하단 걸 들키지 않을 거다.
약한데 말을 함부로 하면 그냥 ‘주둥이가 잘 나풀거리는구나!’ 하고 넘어가 주는데.
강한데 말을 함부로 하면 다들 ‘이 악적! 죽어!’ 하고 나오더라고.
“한데 반숙이 대협은 여기서 혼자 뭐 하시는 겁니까?”
내가 뒷짐을 지고 한 백 살쯤 묵은 정파 노고수처럼 있자니, 무정원이 친한 척 또 물어왔다.
새끼벌들 역시 인생에서 내 행보가 제일 중요하단 것처럼 호의를 띤 얼굴로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아 오싹해. 왜 저렇게 행동을 죄다 맞춰서 하지?
“나는 그, 뭐야. 사색을 하고 있었소.”
나는 목소리를 조금 깔고서 그윽하게 대답했다.
“사색!”
무정원은 내가 어마어마한 비밀이라도 말한 것처럼 감탄했고, 새끼벌들은 ‘홀로 사색하다니 참으로 멋있다’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우리 꼴이 웃긴 지 뱃사공이 입술을 악물고서 노를 꽉 틀어쥐는 게 보인다.
나 같은 대단한 무림 악적이 새끼벌들이 무서워서 내숭을 떨고 있다니! 내숭은 운호 앞에서 떠는 게 내숭이 아니라 이게 내숭이다.
나는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필시 제갈세가 사람일 게 틀림없는 청년에게서 부채를 빌려다가 부채질을 했다.
“그런데 천 대협, 제가 제갈세가 사람인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았겠어, 이 제갈세가 새끼벌아.
제갈세가 자식들은 딱 겉에서부터 ‘우리는 제갈세가예요’ 티가 나니까 그렇지.
정파 자식들은 대부분 신원을 이마에 붙여두고 다니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티가 나는 게 몇 있는데, 남자 중이 모여 있는 소림사와 여자 중이 모여 있는 아미, 옷을 색깔별로 맞춰 다니는 화산파와 점창파, 그리고 공작새 무리 같은 제갈세가다.
허리춤에 깃털 부채를 찔러넣고 옷은 하늘하늘하게 연한 색조로 입으며 허리에는 가느다란 장신구 줄을 늘어뜨리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죄다 머리를 길게 길러 반 묶음을 한 다음 살랑살랑 걸어 다니는 무림인은 십중팔구로 제갈세가란 말이다.
십중 일이는 제갈세가의 이 모습을 동경하는 사자 친왕 같은 사람이지.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파 티가 날까 봐 나는 노고수처럼 흐뭇하게 웃으면서 듣기 좋으란 말이나 해주었다.
“제갈세가 사람들한테서 풍기는 똘똘한 분위기가 있소.”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갑자기 정파 청년들이 “오오오!” 하고 자기들끼리 소리를 내어 탄식하더니, 키득키득 웃으면서 제갈세가 청년을 마구 찔러대기 시작했다.
게다가 제갈세가 청년은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더니 부끄럽단 듯이 웃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 괜히 호수만 쳐다보았다.
저건 또 뭔가 싶어 보고 있자니, 무정원이 사태를 해설해주었다.
“세상에, 천 대협. 제갈소협에게 관심이 있소?”
허. 똘똘하다 칭찬 한마디 했더니 왜 거기까지 상상력이 나간 거야? 기가 막혀라!
그러나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면 제갈세가 새끼벌이 부끄러워서 강에 머리를 박아버릴 기세라, 나는 어색하게 웃고서 대답을 회피했다.
하지만 한창 피가 끓는 또래 청년들은 자기 친구를 놀려먹을 건수를 잡고서 놓치기 싫은지, 갑자기 뭐라 뭐라 마구 떠들더니, 개중 새하얀 옷을 차려입은 선녀 같은 여자가 내게 신이 나서 제안했다.
“천 대협,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우리 같이 식사하러 가지요!”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내 팔에 자기 팔을 밀어 넣더니, 우리가 의자매라도 되는 양 팔짱을 끼고서 나를 바라보며 사랑스럽게 방긋방긋 웃었다.
아아…… 난 진짜 정파 새끼벌들, 이 화사하고 밝은 분위기, 제일 감당 안 돼.
* * *
내 팔짱을 끼고서 옆에 딱 달라붙은 선녀 같은 여자는 남궁세가의 방계인 남궁서환이라 했고, 내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고 오해한 제갈세가 남자는 가주의 조카인 제갈미언이라고 했다.
나머지도 뭐라 뭐라 이름은 소개했으나 인원수가 너무 많아서 다 까먹었다.
게다가 다들 내게 관심을 보이면서도 자기들끼리 떠드는 데 바빠서, 중점적으로 내게 말을 거는 건 무정원까지 포함해 이 셋이기도 했다.
그 분위기는 음식점에 와서도 그대로 진행되어서, 세 사람은 나와 한 탁자에 앉았고 나는 정신이 멍해졌다.
개원아. 너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나 좀 데려가라.
너희 정파 새끼벌들이 내 뇌에 있는 꿀을 쪽쪽 빨아 먹고 있다.
“한데 천 대협.”
무정원 이놈을 중심으로.
나는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젓가락으로 멍하게 집어 먹다가 무정원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까 잠시 뒤돌아서 다른 탁자 사람과 대화하고 있더니, 다시 몸을 원래대로 돌리고서 이번엔 날 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오.”
부루퉁하게 대답하자 무정원은 악의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천 대협은 사문이 어딥니까?”
그 말에 놀랍게도 새끼벌들이 다 같이 조용해졌다.
소름이 돋는다. 다들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나 봐.
“사문 말이오?”
하지만 소름이 돋은 건 그들이 우리 대화를 들어서가 아니라, 사문 이야기가 나와서였다.
나는 사문 이야기에 약해서.
“사문은 왜 물어보는 거요?”
정파인들이 나를 악적으로 여기게 된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이유 중 하나는 내게 사문이 없단 점이었다.
그들은 사문 없이 자기들보다 강해진 나를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
게다가 사문이 없단 건 그들이 내게 해코지를 해도 대신 복수하러 달려 들어줄 벌집이 없단 뜻이었지. 만만했을 거다.
그런데 여기서 무정원이 사문 이야기를 꺼내자, 내가 천년비라는 걸 알고 묻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괜히 가슴이 섬뜩해졌다.
무정원은 활짝 웃으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천 대협이 싸우는 모습을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지 않았습니까. 적들의 검을 가볍게 튕겨내 반격하는 모습이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젊은 고수를 길러낸 곳이라니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요.”
너희 정파 조상들의 원한이 내 사문이다.
실전을 겪고 살아남으면서 더 더 더 강해졌으니.
하지만 이 얘기는 못 하고…… 그렇다고 사문이 없다 하고 싶진 않아.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면 어떡해?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그냥 거짓말을 하자 싶다.
당장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거짓말을 하면 되지 않을까?
아무 사문이나 대고 먼 후계라고 하면 돼.
그러면 어디를? 그래. 이왕 거짓말을 하니 정파인들이 제일 존경하는 곳 이름을 대야지.
“사문은 아니고. 내 아버지의 아버지가 소림사에 계셨소.”
정파인들은 소림사에 끔뻑 넘어가니 이러면 되겠지.
게다가 아버지의 아버지라고 하니 너무 먼 옛날이라 바로 캐내지도 못할 거야.
나는 참으로 영민해! 스스로의 계책이 마음에 들어서 나는 흐뭇하게 웃고서 무정원을 보았다.
“소림사요?”
그러나 무정원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저러나 싶어 고개를 기웃하고 있자니, 내내 살갑게 대해주던 남궁미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부께서 혹시…… 파계승…….”
아차. 스님들은 자식을 안 만들지! 어쩌지?
에이 몰라.
“잘 모르겠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연이 있겠지. 주운 자식이었다거나. 스님들은 인정이 많지 않나.”
“하긴. 그렇지요.”
“내가 들은 건 그 정도뿐이라. 난 혼자 자랐거든. 그래서 지금은 내 뿌리를 찾는 중이라오.”
적당히 둘러대자 기겁한 표정으로 날 보던 새끼벌들이 다시 ‘사연 있는 사람이었군!’ 하고 윙윙거리기 시작한다.
내 사문 얘기는 어느새 출생의 비밀로 흘러갔고, 다들 사문보다는 출생의 비밀이 더 흥미로운 눈치였다.
그래도 사기를 치고 나니 심장이 쿵쿵 뛰어서, 나는 얼른 한 번에 차를 털어 마셨다.
다행히 다음 화제가 소림사로 넘어간 덕에 나는 긴장하던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풀어나갔다.
그런데 안심했을 즈음, 또다시 사람을 심장 졸이게 하는 화제가 나왔다.
그들이 나에 대해 물어서는 아니었다.
그들이 ‘사하비단’과 ‘천년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탓이다.
무정원과 내가 처음 만난 곳이 사하비단이 길을 뒤집어엎고 천년비가 사람들을 공격해 댄 곳이니 어쩌면 당연한 절차지만…….
“대체 사하비단이 원하는 게 뭐 같나?”
“사파에서 뭘 원하겠나. 정파를 누르고 싶은 거겠지.”
“아니, 정파를 뒤집으려면 정파 중소 문파를 보통 먼저 치잖아. 아니면 상권으로 공격을 하거나. 그런데 이번엔 길을 뒤집었어. 이해가 안 가.”
“그 작자들 머리를 이해하면 사파가 되는 거지.”
“천년비는 대체 거기 왜 끼어 있을까? 천년비는 악적이지만 늘 혼자 행동했지 않나.”
“혼자 행동하다 보니 안 거지. 혼자서는 아무리 고강해도 질 수밖에 없단 걸.”
기분 한 번 이상하네. 하지만 뭐. 마음대로들 떠들어라.
나는 이제 그 몸으로는 안 돌아갈 거니까. 나는 천반숙으로 살 거라고. 아니면…… 마마라던가.
젠장. 떡돌이 자식. 나 안 보고 싶나? 나쁜 놈.
“그런데 그 얘기 들었나? 천년비 말이야. 자기 무공에 대해 써둔 일기장이 있다던데.”
“!”
잠시 떡돌이 생각을 하느라 마음이 흐트러져 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제가 이상한 곳으로 가 있다.
일기장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서 그 말을 꺼낸 놈을 쳐다보았다.
다른 탁자에 앉은 놈인데, 반쯤 술에 취해 있었다.
“일기장?”
“어. 제자도 못 두니 급했는지 일기장에 자기 무공 비급을 적어 놨다더라. 뭐 말이 일기장이지 무공 비급인 셈이지!”
피가 발바닥으로 모이는 느낌이 난다.
나는 찻잔을 움켜잡고서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내 일기장. XX. 내 일기장 얘기가 어떻게 퍼진 거지? 그거 비밀인데? 아무한테도 보여준 적 없는데?
물론 무공 비급 따위도 안 적혀 있다. 그냥 일기장이지.
개원이와 동굴에서 지내기 전, 혹시 내가 자리를 비운 틈에 그가 볼까 봐 부끄러워서 다른 데 숨겨 놨는데. 그걸 누가…….
‘운호?’
혹시 운호 그 자식이 날 죽이고 일기장을 발견한 거 아냐?!
생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져서 찻잔을 더욱 세게 움켜쥐자, 안쪽에서 빠드득하는 소리가 나며 잔에 금이 희미하게 갔다.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누가 “어, 운호 왔네!” 하고 소리쳤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이 새끼벌들과 아는 사이였던지, 개운호 이 자식이 민신과 함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네가 왜 여기 있냐’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