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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61화 (161/283)

##  161화. 이런 데서 또 만나고 싶진 않았는데

나는 목소리를 낮춰서 개원이에게 슬쩍 추가로 고자질했다.

“저거 봐 저거 봐. 저 새끼가 저랬다, 아까도?”

개원이는 작은 목소리로 정석적인 대답을 했다.

“신경 쓰지 마.”

말이야 쉽지.

“신경을 어떻게 안 써. 말을 저따위로 하는데.”

“됐어. 가자.”

내가 자꾸 툴툴거리자 개원이가 팔을 뻗어 내 등을 감쌌다.

옷이 흠뻑 젖어 있어도 상관없단 듯이.

그러나 우리가 자기를 무시하고 들어가려고 하자, 운호 자식은 굳이 더 가까이 오면서 추가로 빈정거렸다.

“사랑에 빠지면 주위 말은 안 들리나 봐?”

결국 개원이는 허공을 향해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내 등에서 팔을 떼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개운호. 그만해.”

나는 고개를 푹 숙여서 또다시 운호 자식과 시선을 피한 채 작게 중얼거렸다.

“개운호래. 이건 조상님 탓이다.”

“형님 새 여자친구가 우리 가문을 욕하는데?”

그 말에 운호 자식이 황당하단 목소리를 냈지만 무슨 상관이겠어.

개원이는 단호하게 내 편을 들었다.

“개운호. 그만하랬지. 민신이나 챙겨. 숙아, 우린 들어가서 옷 갈아입자.”

하지만 운호 자식은 나한테 시비를 안 걸면 인생에 낙이 없나.

개원이가 그만하라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또 빈정거렸다.

“민신은 똑똑해서 혼자 잘 챙겨. 혼자 옷도 못 갈아입는 누구랑 다르게.”

아무래도 아까 내가 뒤통수를 한 대만 때려서 뭐가 좀 부족했나 보다. 한 대 더 내려칠 걸 그랬나?

“개운호.”

개원이도 화가 좀 나는지 경고 조로 동생을 불렀다.

“내 눈도 못 쳐다보고 발발 떠는 형 여자친구, 뒤에선 사람 잘 후리더라, 형?”

“개운호. 마지막 경고다.”

대놓고 개원이가 경고 이야기를 꺼내고서야 운호 자식은 더 빈정거리길 멈추었으나, 여전히 탐탁지 않은 목소리였다.

“재미없긴.”

* * *

이후 운호가 민신과 함께 어딘가로 가버렸고 우리는 방 안에 들어왔다.

개원이는 완전히 딱 달라붙은 내 옷고름을 풀어주었고, 나는 씩씩거리다가 그에게 물었다.

“개원아. 솔직히 말해봐.”

“뭐를.”

“가문에 비밀이 있을 거야. 아님 네 동생, 저렇게 성격이 혼자 툭 이상할 리가 없어. 말해봐. 어릴 때 네가 구박했어? 아님 어른들이 구박했어? 뭔 짓을 했길래 애가 저렇게 혼자 못돼먹게 자랐어? 너랑 너무 다르잖아.”

등 뒤에서 개원이가 픽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상하고는.”

내 말이 다 틀린가보다.

하지만 진짜, 그런 성장 배경 없이 쌍둥이가 이 정도로 성격이 다른 게 이상하다고.

다른 쌍둥이들은 안 그래. 물론 난 다른 쌍둥이들을 본 적은 없지만.

“근데 성격이 저따위인 걸 보니까 수긍이 가긴 해. 쟤라면 네 흉내 내면서 날 죽이려 들 수도 있겠어.”

“…….”

이 화제는 싫은가보다.

개원이가 손을 멈칫하더니 내 날개뼈 위쪽을 손으로 지그시 누르는 걸 보니.

옷 갈아입는 데 도움받을 만한 부분은 다 받은 듯해서, 나는 휙 돌아서서 개원이가 아직까지도 쥐고 있는 내 옷자락을 빼내며 당부했다.

“너도 빨리 확인해. 쟤가 진범이 맞는지 아닌지. 그래야 나도 어느 선까지 복수할지 정하니까.”

“황궁에는? 돌아갈 거야? 일이 해결되면?”

“모르겠어.”

“돌아가는 데 가까운 ‘모르겠어’야, 먼 ‘모르겠어’야?”

“둘 다야. 진짜 모르겠어.”

적은 적이고 개원이는 개원이 뿐이던 세상이 지금은 대체 몇 쪽이 난 건지 모르겠다.

내 인생이 이렇게까지 어려워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말로 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넌 일단 네 동생부터 확인해.”

* * *

월요 황제가 개원의 집으로 보낸 건 귀자뿐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는 ‘천반숙’을 쫓으라고 귀자를 보낸 것이고, 개원의 집에 보낸 건 다른 그림자들이었다.

귀자가 쳔빈에게 대답을 기다리겠다 한 것과 상관없이, 천빈의 거처에 대한 소식은 자연히 월요에게 먼저 들어갔다.

“그래. 천빈이 개원 그자의 집에서 보낸다고.”

보고를 들은 월요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알았으니 물러가라고 손을 휘저었다.

그림자가 물러나자 월요는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막아둔 후원으로 가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가 말라붙은 풀잎을 손에 쥔 채 허공을 가만히 쳐다보자, 승언이 곁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 원하신다면 천빈 마마를 여기로 모셔오겠습니다, 폐하.”

말은 ‘모셔온다’지만 사실상 ‘끌고 온다’에 가까운 말이었다.

승언 역시 천빈과 정체모를 우정이 있긴 했으나, 그의 최우선은 황제였다.

그는 천빈이 황제에게 괴로움과 해로움을 준다면, 그녀가 원치 않아도 궁궐에 강제로 데려올 수 있었다.

“…….”

월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서 한 손에 든 풀잎을 손톱으로 조금씩 조금씩 꺾기만 했다.

그러다 마른 풀잎이 다 조각나자 그는 손을 비벼 풀을 털어내고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며 말했다.

“되었다. 놔두어라.”

“하오나, 폐하. 어느 후궁이 멋대로 가출해서 외간 사내의 집에 머문단 말입니까. 게다가 그자는 개 답응의 사촌입니다! 그것도 거친 무림인이고요!”

“내가 싫단 사람을 옆에 두는 건 나도 싫다. 억지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은 필요 없다. 억지로 내 곁에 두어 봐야…… 내 손으로 천빈을 고궐처럼 만드는 꼴이지.”

“!”

황제가 성큼성큼 후원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하자, 승언과 오원요는 서로를 쳐다보고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이번에는 오원요가 나섰다.

“폐하, 폐하께서 천빈 마마를 곁에 두신다 해서 천빈 마마를 고궐로 만드시는 건 아닙니다. 고궐 그자는 애초에 공주님을 연모하지도 않았지만, 천빈 마마는 다릅니다. 정식으로 입궁한 후궁이 아니십니까. 마마가 폐하의 곁에 있는 건 물고기가 바다에서 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인 것을요. 게다가 천빈 마마도 폐하를 연모하시는 걸 알지 않으십니까. 이번에 가출하신 것도 폐하를 연모하시니까 그만큼 화가 나셔서-.”

“그만.”

빠르게 말을 뱉던 오원요는 황제의 차가운 명령에 입을 다물었다.

“송구합니다.”

“천빈은 짐을 연모하지 않는다.”

“폐하, 아닙니다. 마마는-.”

“본인 입으로 한 말이다. 그거면 됐다. 싫어서 간 사람은…… 짐도 붙잡지 않는다.”

말을 하면서 걸어가던 황제는 주인 없는 전각 부근에 다다르자 잠시 멈춰섰다.

그의 시선이 천빈이 지내던 전각으로 향했다.

아직 그 전각은 안에 사람이 사는 것처럼 활기가 있었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천빈이 지내는 것처럼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 안에 그의 반숙이가 없단 걸 아는 황제에게는 이 모든 게 공허하게만 보였다.

잠시 그렇게 천빈의 전각을 바라보던 황제는, 이마를 지끈 구기더니 몸을 휙 돌리며 명령했다.

“천빈에게 전하라. 여기서 수도까지 오가는 날을 제하고 한 달 더 기다리겠다고. 그 한 달 안에 돌아오지 않겠다거든…… 죽었다 해줄 테니 원하는 데서 살라 하라. 짐의 눈에 띄지 말고.”

“폐하!”

* * *

나는 날이 밝자 또다시 개원이의 본가를 빠져나와 거리를 돌아다녔고, 그러다가 호수로 가 또 홀로 나룻배를 탔다.

이젠 내 얼굴이 익숙한지 뱃사공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자주 뵙니다, 손님. 그런데 늘 혼자 오시네요.”

“같이 다닐 사람이 없어.”

“이런.”

개원이와 다니고 싶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와 놀러 다닐 순 없잖아.

게다가 개원이는 개원이 나름대로, 내가 사망한 그 시각에 운호가 어디에 있었는지 위치나 행적을 확인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운호 본인에게 물어보니 아니라 딱 잘라 말했다나. 물론 거기서 맞다고 할 사람은 없겠지만.

“손님은 성격이 밝아서 주위에 사람이 많을 거 같은데 신기하네요.”

“그런가?”

그런데 혼자 물장구를 치면서 호수를 둥둥 떠다니고 있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남녀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계속 물을 튀기면서 소리 나는 쪽을 보니, 딱 봐도 ‘우리는 정파예요’ 티를 내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뱃놀이를 하면서 놀고 있지 않은가.

그 꼴을 보니 저절로 혀가 차진다. 어휴. 정파 자식들은 왜 이마에 대놓고 ‘우리 정파’라고 써두는지 몰라.

뭐 하나같이 맞추기라도 한 건가, 다들 표정은 반짝반짝해서는.

혀를 차고 있자니, 뱃사공이 또 웃음을 터트렸다.

“저런 걸 싫어하시는군요.”

맞다. 정말 싫다. 내가 천년비 몸으로 지낼 적, 정파 사람들은 개원이 빼고 죄다 싫었지만 특히 저 나이대의 청년들은 더욱 싫었다.

왜냐. 저 나이 대의 정파 새끼들은 실력은 X도 없으면서 공명심만 커다래서, 일단 다짜고짜 나를 죽이려고 덤벼든다.

거기서 끝나면 귀엽기라도 하지.

그러다가 누구 하나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되면 이번에는 저들의 친인척들이 ‘내 새끼를 공격하다니 이 빌어먹을 악적아!’ 하면서 눈이 뒤집어져서 또 달려든다.

그 새끼가 날 먼저 공격한 건 전혀 생각도 않고서.

친인척만 나서냐? 그것도 아니다.

저것들은 꼭 떼 지어서 의형제니 의자매니 의남매니 하다가, 자기 친구 하나 다치면 또 다른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요.

이러니 내가 질색할 수밖에.

그게 반복 반복 반복이다.

그래. 저놈들은 말하자면 뭐랄까…… 벌집. X나 짜증 나는 벌집. 심지어 먼저 쫓아다니는 벌집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뱃사공의 말에 ‘맞아. 난 정파 청년들을 싫어해’라고 하면 사파 티가 나겠지.

정파가 싫다고 하면 사파 취급을 받게 되니까. 비무림인들은 ‘무림인이 싫다’고 하지 ‘정파가 싫다’고 딱 잘라 말하지 않으니.

“음…… 싫은 건 아니야. 하지만 난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아. 사람은 고고하게 혼자서 지내는 거지.”

“손님처럼요?”

“암. 어쨌든 저들 쪽은 피해서 가줘.”

“그럼요.”

그런데 뱃사공이 눈치껏 그 정파의 새끼벌들에게서 거리를 두어 운전하려던 그때.

새끼벌 사이에서 누군가가 “세상에! 반숙이 대협!” 하고 외치는 게 아닌가.

‘반숙이’라는 말에 뱃사공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나는 인상을 구기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디서 많이 본 새끼벌 하나가 활짝 웃으며 일어나 나를 보고 있지 않은가.

그 주위로 다른 새끼벌들은 엇비슷한 표정으로 그 새끼벌을 올려다보고 있고. 곧 새끼벌들의 고개는 동시에 내쪽으로 움직였다.

틀에 맞춘 듯 똑같은 그 소름 돋는 행동을 보는 순간.

나는 제일 처음 내게 ‘반숙이 대협’이라고 외친 새끼벌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무정원. 영언하문의 이대제자 무정원.

내가 자기들을 구하기 위해 창문에서 검을 던져댔다고 오해하게 된 그자다.

기분이 나빠서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으나, 무정원은 나를 보면서 활짝 웃더니 큰 소리로 자기 친구 새끼벌들에게 알려주었다.

“내가 말한 그 신진고수라네! 봐봐, 맞지? 사람들을 돕는 협객이신데, 남들 눈에 띄면 저렇게 부끄러워하신다니까?”

저 자식. 내 얘기를 여기저기 하고 다녔나 봐! 황당해서 입을 벌리고 있자니, 떼로 행동하는 새끼벌들이 등불이라도 켠 듯 동시에 눈동자들이 밝아진다.

이윽고 그들은 동시에 벌들이 내는 윙윙 소리를 내면서 엄청난 속도로 날 향해 배를 저어 오기 시작했다.

등골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개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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