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왜 자꾸 시비야?
적당한 때 되면 돌아가야지, 했던 마음은 떡돌이가 날 보호하니 어쩌니 하는 말을 듣자마자 쏙 다른 탈을 쓰고 튀어나왔다.
“안 돼.”
귀자는 깜짝 놀라 탕후루를 떨어뜨릴 뻔했다.
“안 된다니요?”
“내 얼굴을 먼저 안 보려 한 건 폐하잖아. 본궁은 폐하를 염려하는 삿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폐하를 위해 안 돌아가기로 하였다.”
“삿된…… 마음이라 하신 건 얼결에 흘러나온 본심이십니까.”
삿된 마음은 잣된 마음이랑 비슷한 뜻이 아니었나? 저렇게 물어보니 좀 헷갈린다.
하지만 굳이 그런 내색을 할 필요는 없지! 나는 당당하게 배를 내밀고서 어깨를 으쓱했다.
“귀자도 스스로 생각하는 습관을 가져봐.”
“태감으로서 제 미덕은 주인의 명령을 잘 따르는 거지, 잘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마마.”
“그럼 따라 말해줘.”
“예?”
“누군가 지나가다 ‘폐하 자식 있잖아’라고 한다면 그건 황손을 지칭하는 건가 폐하를 욕하는 건가.”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겠습니다, 마마. 이상한 거 시키지 마세요.”
어깨를 으쓱하고 있자니 귀자는 한숨을 단계별로 푹 푹 푹 내쉬고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돌아가실 건지요?”
“날 피한 건 폐하잖아. 그러니 이번엔 폐하가 나한테 와줘야 해. 먼저 피한 사람이 먼저 오는 게 사랑이래.”
귀자는 ‘그딴 얘기 들어본 적 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으나, 나 역시 방금 막 지어낸 말이기에 전혀 찔리지 않았다.
내가 멀뚱하게 눈을 맞추고 쳐다보자, 귀자는 곤란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하오나 마마. 폐하께선 중심을 지키고 계셔야 해서 아무 곳이나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여긴 아무 곳이 아니라 수도야. 언제든 돌아오긴 할 거잖아.”
수도 내에서는 잠행도 잘 다니는 것 같더구만 뭘.
귀자가 입을 우물거린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사랑 따위에 머리카락 한 올도 휩쓸리지 않는 거만한 고수의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싫다면 어쩔 수 없어. 내 화가 풀리길 기다리시라고 전해.”
“마마!”
“본궁을 설득할 생각은 버려라, 귀자.”
“마마는 아직 본궁이 아니신…… 후우.”
귀자는 말을 하다 말고서 한숨을 쉬더니, 좀 슬픈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모습에서는 이리저리 중간에서 치이는 괴로움이 드러나는 듯해, 나는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나는 마음이 돌처럼 단단한 고수지만, 돌에도 연약한 이끼는 자라는 법이니까.
“난 네가 좋다, 귀자야. 내 말을 못 전하겠거든, 내가 폐하께 구박을 받아 뵐 낯이 없어 달달 떨고 있다고 전해도 좋아.”
“……저는 폐하께 충성을 다하지만, 마마도 아주 좋아합니다. 아시지요?”
“그래?”
“예. 그러니 말씀드리는 거지만…… 마마께서 하신 말씀이 전부 속마음 그대로라면, 마마께선 후궁에 어울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
“폐하는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분이고 많은 걸 마음대로 하실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은 아닙니다. 폐하께도 나름대로의 제약이 있지요.”
“그래?”
“예.”
귀자는 서글프게 웃고서 탕후루를 입에 물고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가 폈다.
“며칠 더 근처에 머무를 터이니, 잘 생각해보고 다시 답을 골라 제게 주시길 바랍니다, 마마.”
“…….”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저는 그래도 마마의 태감이고, 늘 마마를 응원하리란 걸 잊지 마시구요.”
* * *
멀지 않은 곳에 작은 호수가 있는데, 그 주위로 나룻배를 잠시간 빌려주는 상인들이 몇 있다.
나는 개원이가 탕후루를 사 먹으라고 준 돈으로 나룻배를 한 척 빌린 다음 그 위에 앉아 한 겹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구경했다.
개원이는 날 죽이지 않았지만 개원이의 동생이 날 죽인 거라면,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복수를 위해 개원이 동생을 죽여버리면 나는 속이 후련해질까?
사람이 복수를 하는 건 마음의 짐을 떨치기 위해서인데.
나는 과연 마음의 짐을 벗고 가벼워질 수 있을까?
만약 개원이 동생에게 복수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나는 가벼워질 수 있나? 그리고 개원이랑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개원이 동생이 날 죽였는데, 과연 우리는 맺어질 수 있을까?
월요. 내 떡돌이는? 떡돌이는 잘났고 권력도 있고 가진 것도 많지만, 그만큼 주위에 사람이 많다.
게다가 떡돌이는 체면이 아주 중요한 사람이지.
하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 살아왔어.
그런 내가 월요 옆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그의 사랑을 다른 여자들과 나누면서?
차라리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괜찮아.
그러면 그냥 그 안락함만 누리면서 지내면 되니까.
하지만 그를 사랑하면…… 몸은 안락해도 마음이 가시밭길인데, 과연 나는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까?
아니, 물론 내가 떡돌이를 사랑한다거나 그런 건 아냐.
난 떡돌이를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아직은.
“참. 사는 게 쉽지 않아.”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잘 못 들었는지, 뱃사공이 “예?” 하고 되물으며 돌아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손을 뻗어 물을 찰박찰박 튀겼다.
“원하는 하나를 얻으면 꼭 달갑지 않은 하나가 뒤따라오는 거 같아서.”
뱃사공은 이번엔 내 말을 잘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히죽 살갑게 웃었다.
“다들 그러고 사는 거죠 뭐.”
그런가. 나 말고도 다들 그런가.
그런데 시무룩하게 물을 더 참방거리고 있자니, 누군가 내 쪽을 향해 물을 대놓고 뿌려버린다.
물싸움을 할 때 온 힘을 다해 상대를 공격하는 것처럼.
“으아!”
뱃사공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나 역시 상체가 물에 흠뻑 젖었다.
나는 소매로 눈가의 물기만 대충 닦으면서 내게 물을 끼얹은 쪽 배를 쳐다보았다.
어떤 새끼가 지나가면서 물을 이렇게 험하게 뿌려?
범인은 대번에 나왔다.
‘저거 운호 그거 아냐?’
개원이의 쌍둥이 주제에 인성은 죄다 제 형에게 퍼주고 태어난 개자식?
“하지 마.”
곁에서는 민신이 당황해서 말리고 있었으나, 운호는 힐긋 나를 보더니 재수 없게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때. 냅둬. 내숭 부리느라 아무 대응도 못 할걸.”
보면 살의가 끓는 걸 감추느라 그와 마주할 때마다 내내 바닥을 보고 있었더니, 저 자식이 사람이 아주 물로 보였나 보다.
“너 진짜 못됐어.”
민신은 재차 다그쳤으나 운호 자식은 코웃음을 치면서 느긋하게 배 뒤편에 등을 기대기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내 뱃사공에게 작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저 뒤쪽으로 조용히 가자.”
운호 때문에 나만큼 쫄딱 젖은 뱃사공은 뭐 할 건지 묻지도 않고, 암살자들만큼 은밀하게 운호와 민신이 탄 배 뒤로 미끄러져 나아갔다.
그래도 소리가 났겠지만 운호는 ‘내숭 부리느라’ 아무것도 못 하는 내가 뭘 어쩔 거라 여기진 않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민신이 그의 어깨 너머로 내게 미안하단 수신호를 보내왔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괜찮다고 손을 저은 다음, 뱃사공에게 노를 잠시 빌려 그걸로 운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
머리통 치는 소리가 찰진 걸 보니, 네놈은 역시 머리가 비었구나!
내리친 건 운호의 뒤통수인데 튀어나온 건 민신의 눈이었다.
그녀는 입을 벌리고서 나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뒤통수에 손을 댄 운호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운호가 탄 배의 뱃사공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지, 당황해서 노를 끌어안고 나를 쳐다보다가 내가 탄 뱃사공에게 항의했다.
“아니 이 사람, 노를 왜 손님한테 빌려주고 난린가!”
하지만 물벼락을 맞은 내 뱃사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 물 때문에 손이 젖어서. 미끄러졌나 보이. 손님이 대신 주워주는구만.”
“그걸 변명이라고!”
운호 뱃사공은 화를 냈으나, 내 뱃사공은 태연히 내가 건네는 노를 받아들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까지도 운호는 여전히 상체를 죽인 채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내 뱃사공이 뒤로 배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천천히 시선을 들어서 나를 보는데…….
무슨 표정인지는 못 봤다. 이번에는 내가 부끄러워죽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으니까.
나는 그의 표현처럼 ‘내숭을 부리며’ 손에 든 탕후루로 그의 눈길을 막았다.
옆에서 ‘하’ 하고 기가 차서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여기서 운호 자식이 나한테 더 물을 끼얹었으면 한 대 더 때려줬을 텐데.
안타깝게도 운호 자식은 뭐 감이라도 온 건지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뒷일이 걱정이 되긴 한지 내 뱃사공은 속도를 내서 그들에게서 멀어졌고, 우리는 운호 배에서 거리를 두었을 즈음 둘이서 손뼉을 마주쳤다.
“잘했습니다, 손님!”
“그럼. 안 죽인 것만 해도 배은망덕이지.”
저놈은 날 죽인 놈일지도 모르는데.
“예? 배은망덕이요?”
* * *
“하. 진짜…… 형님 취향. 뭐 저런 이상한 여자를.”
배에서 내린 운호가 연신 기도 안 차서 비웃어대자, 민신은 한숨을 내쉬고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뒤통수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
“네가 먼저 잘못했어.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물을 끼얹고 그래?”
민신의 꾸중에 운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멋대로인 그가 대답을 피하는 건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기에, 민신은 더 묻는 대신 축축해진 손수건에서 물기를 짜내며 충고했다.
“개원이가 천년비 죽고 나서 처음 데려온 여자잖아.
이제 막 상처를 잊어가는 거 같은데, 마음에 안 들어도 좀 좋게 봐줘.”
“…….”
“난 천년비가 죽어서 개원이가 따라 죽을 줄 알았어. 천년비 사칭범을 찾아다닌다면서 온갖 위험한 데를 다 다녀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래, 형이 좋은 소꿉친구 둬서 좋겠네.”
“빈정거리지 좀 말고. 너도 개원이 많이 걱정했잖아. 그런데 왜 옛사람 잊고 제대로 지내보려는데 협조를 안 해?”
민신의 잔소리가 귀찮은지 운호는 심드렁하게 걸어가면서 물에 젖은 겉옷을 벗어 대충 겉에 둘렀다.
“난 협조 안 해.”
“네 형이 안정을 찾게 좀 도와라, 이 나쁜 동생아. 내가 대화해보니 천 낭자는 이름은 이상해도 괜찮은 사람이었어. 넌 개원이가 불쌍하지도 않아?”
“불쌍한 건 형이 아니라 미련한 천년비겠지.”
쫓아가면서 계속 잔소리를 퍼붓던 민신은 인상을 찡그리고서 운호를 보았다.
“천년비가 불쌍하다니? 그 여자가 왜? 애초에 그 여자가 개원이를 홀려서 이 사태가 벌어진 거잖아. 그 여자가 아니었으면 개원이는 지금쯤-”
운호는 인상을 찡그리고서 걸음을 더 빨리했다.
민신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 * *
“옷이 왜 그래?”
내가 쫄딱 젖어서 돌아가자, 개원이가 당황해서 물었다.
“배를 타러 갔는데 네 동생이 나한테 물을 끼얹었어.”
나는 솔직하게 알려주었다. 물론 내가 노로 그놈의 뒤통수 친 일은 말하지 않았다.
그건 내 옷이 물에 젖은 것과 관련 없는 일이니까.
개원이는 황당한 얼굴로 “운호가?” 하고 되묻더니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가 커다란 수건을 가져왔다.
“네가 자기를 잡으러 온 걸 아나. 좀 너한테 유난히 못되게 구는 것 같다.”
“원래 그 성격은 아니고?”
“……원래도 좋은 성격은 아니긴 한데.”
역시 운호 그놈은 인성을 제 형한테 밀어놓고 나왔나 보다.
젠장. 그런 주제에 연기력은 빼어나서 형 흉내는 잘 내고.
내가 작게 욕을 뱉는 동안, 개원이는 내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닦아준 다음 하녀에게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개원이와 함께 방에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혼인도 치르지 않은 사이에 옷도 갈아 입혀주고 그러나 봐, 두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