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개원이 동생
내가 개원이의 팔을 잡고서 심호흡을 하자, 개원이는 자기 팔과 나를 번갈아 보다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러겠어.
“좀 긴장돼서.”
“네가?”
개원이는 내가 긴장된단 말이 안 믿기나 보다. 그냥 웃네. 하지만 진짜다. 웃을 일이 아니야.
다른 식구들은 몰라도 개원이 아버지는 본 적이 있는데, 얼마나 날 싫어했는지 아직도 그 표정이 기억에 남아 있는걸.
그나마 나 한번 만나 보겠다고 나온 사람이 그 정도였으니…… 안 나온 사람은 어느 정도로 날 싫어할지 뻔하다.
게다가 개시시. 그렇게 사근사근하고 상냥한 개시시조차도 내 이야기가 나오면 표정이 얼음장 같아졌는걸. 과연 개원이 식구들이 나를…….
‘젠장. 뭐래? 내가 지금 애인 가족 소개받으러 왔나. 나 죽인 새끼 잡으러 온 거지?’
“비야.”
“왜.”
“표정 변화가 아주 다채롭다.”
“네 연인으로 온 거라 잠깐 착각했거든. 근데 아니란 거 깨달았어.”
개원은 쓸쓸히 웃고서 물었다.
“그럼 이제 문 열까?”
그의 팔에서 손을 치우며 고개를 끄덕이자 개원이는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한때 내 출입을 절대로 막았던 개원이의 그 집은, 몸을 바꿔 온 후에야 드디어 열렸다.
드러난 저택은 넓고 단아했다.
궁궐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이지만, 나름대로 꽤 정취가 있었다. 단정하고 정갈하고.
무림인과 문관들이 섞여 있는 개씨 가문 답네.
그러나 훈기가 느껴지는 저택을 둘러보는데, 이상하게 피는 차갑게 내려앉는 기분이다.
그렇게 찬찬히 저택을 둘러보면서도 나는 개원이를 따라 안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얼마나 그랬을까. 갑자기 한 여자가 어느 방에서 나오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세상에! 큰도련님 오셨어요!”
그러고는 개원을 보면서 환하게 웃는 여자에게, 개원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서 물었다.
“운호는?”
여자는 밝게 대답했다.
“운호 도련님은 지금 민신 아가씨랑 외출하셨죠. 두 분이야 늘 같이 붙어 다니시고…….”
하지만 대답의 끄트머리를 흐리고서, 갑자기 나를 힐긋 보더니 신기하다는 듯 화제를 바꿔버렸다.
“오늘은 도련님도 같이 오신 규수가 있네요.”
“천……반숙이라고. 내 친우다.”
개원이 내가 댄 가명을 한 번 더 대었고, 나는 고개를 까딱해 인사했다.
좀 더 잘 인사할 수도 있지만 개원이 가문 사람이라 그런가. 인사가 잘 안 나가네.
그런 모습이 건방지게 보였나.
여자는 상냥하게 인사할 것처럼 하다가 흠칫하더니 개원을 휙 쳐다보았다.
마치 ‘저건 뭐죠?’라고 묻듯이.
내 사정을 아는 개원이가 어색하게 웃자, 여자는 좀 기분이 상한 듯 아까보다 퉁명스럽게 물었다.
“마님 불러 드릴까요?”
하지만 여자가 그 ‘마님’을 불러주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원아!” 하고 외치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쳐다보니, 개원이와 외모는 별로 안 닮았지만 분위기가 똑 닮은 여자가 우아하게 걸어오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개원이 친인척이었다.
“어머니.”
친인척 중에서도 어머니로구먼. 기분이 이상하다. 한때 정말로 소개받고 싶던 사람이었는데…….
개원이가 손을 뻗자, 여자는 얼른 다가와 손을 잡으면서 반갑게 웃었다.
“웬일이야? 한동안 행궁에 가 있겠다고, 오래 있다 온다더니.”
그러면서도 개원이 엄마가 나를 힐긋 보자, 개원이는 손으로 나를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어머니, 제 친우입니다.”
개원이 엄마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이 고운 분은 누구신가 했다.”
그러고는 내 쪽을 돌아보더니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반가워요. 원이 엄마예요.”
그건 천년비 몸으로 꼭 들어보고 싶던 소개였고, 받고 싶던 미소였고, 대우였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게 서 있다가 가까스로 “천반숙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평소보다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천 낭자구나. 부끄럼이 많네.”
그런데도 개원이 엄마는 그저 호감이 뚝뚝 묻어나는 미소를 보내고서 또 물어주었다.
“밥은 먹고 왔어요?”
“아뇨. 아직.”
“그러면 식사하고 가요.”
개원이 엄마가 내 팔을 부드럽게 잡고서 살짝 당겼고, 나는 얼결에 개원이 엄마와 팔짱을 끼고서 걸어가게 되었다.
놀라서 개원이를 보았지만, 개원이 역시 표정이 이상해서 부를 수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도로 정면을 보았다.
떡돌이가 내가 주는 호의는 천소여가 받지 못하던 걸 내가 받던 것이라 그가 아무리 내게 잘해줘도 이런 생각이 잘 안 드는데.
지금 받는 호의는 나는 받지 못하던 걸 천소여가 받는 것이라 아무리 잘해줘도 묘하게 쓴맛이 나.
그러나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개원이는 따라오면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아버지는요?”
“맹에 가셨지. 사하비단 일로 긴급회의가 있나 보더라.”
식당 안에 들어가서 앉으란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얼마 안 가 음식들이 쑥쑥 앞에 놓였다.
궁중에서 먹는 것보다 화려하진 않지만 다 보기 좋은 가정식들이었고,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그야말로 ‘화목한 가정’에서 풍기는 분위기.
심지어 개원이 엄마는 맛있는 음식은 죄다 내 앞에 밀어주면서 권했다.
“많이 먹어요.”
“감사합니다.”
내가 어색하게 젓가락을 들자, 개원이 엄마는 환하게 웃고서 개원이에게도 또 젓가락을 건네며 당부했다.
“그리고 원이 너. 너도 그만 돌아다니고 아버지 일을 슬슬 도와야 하지 않겠어?”
그걸 시작으로 개원이 엄마는 개원이에게 무림맹 일을 해라, 집안일을 해라, 개씨 가문 후계자가 언제까지 맨날 돌아다닐 거냐 등등 이것저것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개원이는 그게 익숙한지 밥을 먹으면서도 잘 대답했고.
보통 가정에선 이러는구나. 무림 영웅 개원이도 집에선 그냥 잔소리 먹는 철없는 애네.
어쨌든 별로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라, 나는 일단 먹는 데 집중했다. 밥은 확실히 맛있어.
“천 낭자.”
하지만 개원이 엄마가 난데없이 날 부르는 바람에 다시 밥그릇에서 고개를 들어야 했다.
“네?”
얼결에 대답하자 개원이 엄마가 조금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천 낭자는 어떻게 생각해요?”
“뭐가요?”
“천 낭자도 원이가 슬슬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협행도 어느 정도여야지. 너무 놀기만 하면 나중에 뭘 하겠어요. 안 그래요?”
“아…….”
무슨 소리지? 어리둥절해서 개원이를 보자 개원이가 얼른 끼어들어서 대신 대답했다.
“반숙이는 항상 제 편이에요.”
개원이 엄마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또 웃으면서 “그런가 보네.” 하고 놀리는 투로 말했고, 나는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뭔 말을 주고받았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뭘 하든 다 좋게 해석해주다니 신기하네.
그러고 있자니 아까 처음에 만난 그 여자가 쟁반에 그릇 몇 개를 담아 날라 오면서 툭 대화에 끼어들었다.
“주인어른이 천 낭자를 보며 기뻐하실 텐데요. 드디어 큰도련님이 그 악적을 잊었으니까요.”
하지만 갑자기 악적 화제를 꺼내버려서, 개원이 엄마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고 여자는 얼른 사과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마님.”
근데 사과는 해도 미안해하는 태도가 아닌 걸 보니, 아무래도 저분은 아까 내가 자기한테 인사를 대충 해서 기분이 상한 모양이야.
하지만 저 차가운 태도를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익숙해. 그러니 밥 먹자.
“그 반찬이 맛있어요? 더 줄까?”
……오히려 이게 더 안 익숙해. 체할 거 같다.
그런데 개원이 엄마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
발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식당 안으로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내가 앉은 방향에서는 얼굴이 바로 보이지 않았으나, 개원은 바로 그쪽을 보고서 “운호야.” 하고 이름을 불렀다.
운호. 아까 개원이 오자마자 찾은 사람이 운호였다.
그렇다면 아마 개원의 쌍둥이로 추정되는 사람이겠지.
그 이름을 듣자 호기심이 들어서, 나도 먹던 걸 멈추고서 천천히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정말 개원이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고, 그 뒤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신기하게 생긴 악기를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개원이와 ‘운호’가 얼마나 똑같이 생겼던지, 나는 순간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래도 젓가락은 떨어뜨리지 않았으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억지로 젓가락에 힘주면서 표정 관리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운호가 자기 엄마한테 뭐라고 말을 하다가 내 쪽을 힐긋 보는데……
와. 어떻게 저렇게 똑같이 생겼지? 수제작 하려 해도 저렇게는 되기 힘들 것 같은데?
하지만 부드럽고 온화한 개원과 달리, 운호란 쪽은 조금 서늘하고 삐딱한 미소가 한쪽 입가에 걸려 있어서 성격은 달라 보였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살기가 치솟아서 나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고 한쪽 주먹을 소매 안에서 꽉 쥐었다.
이상한 기색을 숨기려 밥을 퍽퍽 퍼먹었지만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저놈인가? 내게 용고를 먹인 자가?
“누구예요? 저 여자?”
운호가 낯선 사람인 나를 발견하고는 자기 엄마에게 묻는데, 그 목소리마저 개원이와 똑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원이 친구.”
하지만 운호는 말투는 개원이와 완전히 달랐다.
개원이 엄마가 호감을 듬뿍 찍어서 대답을 해주었는데, 그 말에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것이다.
웃는 모습을 직접 본 건 아닌데, 그냥 듣기로는 비웃는 소리처럼 들렸다.
“천년비 말고 형 친구가 또 있었어요? 여자 중에?”
아까 ‘악적’이란 단어만 등장해도 불쾌해하던 개원이 엄마는, 둘째 아들이 대놓고 ‘천년비’ 이름을 부르자 경고하듯 차갑게 “운호야.” 하고 이름을 불렀다.
“죄송.”
그러나 운호는 말을 어지간히 안 듣는지, 또 건성으로 사과했다.
얼굴도 목소리도 개원이와 같지만 둘은 성격이 아예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성격이 문제가 아니지. 중요한 건 저놈이 날 죽였는지 아닌지니까.
그러나 아직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속은 부글부글하고 온몸의 신경이 그쪽으로 갔다.
여기서 조금만 집중력이 흐트러져도 저놈의 멱살을 잡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그 운호란 놈은 많고 많은 자리 중에 굳이 내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더니 흥미롭단 시선을 던져왔다.
그놈을 노려보지 않기 위해 나는 쑥스러운 척 더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형 취향 이상해졌네. 너무 오락가락하는 거 아냐.”
“운호야. 쓸데없는 말 하지 마.”
“뭘요 엄마. 우리 형 천년비랑 연애했던 거 무림인 중에 모르는 사람 있나?”
“운호야.”
개원이 엄마가 경고조로 이름을 불렀으나, 운호는 상체를 쑥 빼서는 굳이 내 앞으로 자기 얼굴을 들이밀었고, 나는 억지로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안 그래요? 알고 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