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황제는 오리무중
문제가 해결되자 사람들이 고맙다면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영언하문 제자들이 여기 없었더라면 다들 나나 개원이 나선 건 몰랐을 텐데.
그 정파놈들이 문을 열고 저렇게 우글우글 모여서 ‘도와줘서 고맙다’니 ‘은인이시다’니 하고 있자, 다들 나와 개원이 그 피풍의들을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오해한 게 분명했다.
개원이는 도움을 준 게 맞지만 나는 아닌데!
나는 그 자리가 부담스러워서 얼른 창문을 통해 달아났다.
나중에 사람들이 좀 빠지면 돌아가야지.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죄다 오기라도 하는 건지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은 전혀 줄지를 않았고, 나중이 되자 개원이도 창문으로 지붕에 올라왔다.
“넌 가서 감사 인사받아.”
그걸 보고 부루퉁하게 말하자, 개원은 고개를 젓더니 저 멀리 보이는 말들을 쳐다보며 제안했다.
“말을 사서 여기서 나가자.”
“넌 사람들이 ‘와아 와아 영웅 영웅’ 해주는 거 좋아하잖아.”
“……안 좋아해.”
개원은 황당하단 시선으로 날 보고는, 무정원이 시선을 끌어주기로 했다며 떠나자고 손을 뻗어왔고, 나는 마지못해 그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러고서 우리는 말을 두 필 사서 곧장 그 마을을 빠져나와 쉬지 않고 달려갔다.
하지만 길이 험한 산길에 접어들었을 때는 속도를 늦춰야만 했다.
느리게 말을 타고 가게 되자 순식간에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고, 나는 분위기도 누그러뜨릴 겸 그에게 물었다.
“타천천이 내 몸으로 뭘 하는지 모르겠어. 넌 알아?”
“왜 내가 알 거라 생각해?”
“네가 전에 타천천 있는 곳으로 날 유인했잖아.”
개원이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서 발뺌이야? 그 모습이 가당치도 않아 나는 그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개원이는 발뺌할 생각이 아니었던지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둘이 대화를 나눴나 보군. 그러면 타천천 그자는 네가 천년비란 걸 알면서도 내게 모른 척한 거고.”
뭔 생각을 하기에 갑자기 표정을 구기나, 불만스레 생각하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뭔 생각을 하기에 바로 저런 결론이 나온 거래?
좀 신기하기도 하고 희한하기도 해서 보고 있자니, 개원이는 이번에는 스스로 뭔가를 납득하고서 중얼거렸다.
“하긴. 난 널 죽였단 오해를 받고 있으니, 만일을 위해 속일 수도 있지.”
타천천을 이해해주는 건가? 이상한 놈.
어쨌든 이걸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어져서 나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험한 산길은 이젠 그냥 험한 산이 되어버렸고 길이라고 할 게 없어져 있었다.
말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 난처해했고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짙은 남색으로 빠르게 변해가는데, 금세 비가 쏟아붓기라도 할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비가 내릴 거 같아.”
내가 중얼거리자 개원이도 동의했다.
“근처에 동굴이 있는 거 같은데. 거기서 하루 쉬었다 가자.”
동굴에서 용고를 먹고 죽은 경험이 있는지라, 개원과 동굴에 들어가고 싶지 않지만……
연약한 천소여의 몸으로 비를 맞고 가는 건 힘들겠지. 말들 역시도 비를 맞고 갈 수는 없을 테고.
“알았어.”
우리는 말에서 내려서 바로 개원이가 봐둔 동굴로 걸어갔다.
개원이는 말들을 동굴 안쪽 돌기둥에 잘 묶어놓았고, 나는 동굴 근처에서 바삭한 잎과 나뭇가지들을 모아왔다.
와 보니 개원이는 말그릇에 물을 붓고 있었다.
내가 동굴 중앙에 모아온 땔감을 내려놓자, 개원이는 그것들을 반 정도 가져다가 불을 지펴 모닥불을 만들고는, 자기 짐에서 육포를 꺼내 구웠다.
그가 여러모로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동굴에서 둘이 지낼 때가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이 얘긴 꺼내지 말자. 대신 내가 좋아하는 정파인 씹기를 해야지.
“난 정파인들하고 더 안 엮이고 싶어. 걔들은 두루두루 짜증나잖아.”
“이번 일은 정파인들하고 엮인 게 아니라, 사하비단과 엮인 거지. 그자들이 사고를 쳐서 벌어진 일이니까.”
“어쨌든.”
구운 육포를 내게 건넨 개원이는 이번에는 잠자리 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육포를 입에 물고서 모닥불 열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근데 정말 이상하긴 해.
사하비단은 왜 굳이 ‘천년비의 얼굴’을 드러내면서까지 ‘나 여기 있다. 나 사고 친다’는 표시를 하는 거지?
보통 그런 못된 짓을 할 때 얼굴을 다 까고 하나? 아니지 않나?
타천천 그놈, 무승 꿍꿍이야?
* * *
천년비가 개원과 개원의 본가로 이동하는 사이. 월요는 41천도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급보를 듣고 있었다.
“천년비란 자가 포함된 무림인들이 41천도에 있는 한 마을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고 갔답니다.”
월요는 심각하게 보고를 듣다가, 천년비 이름에 손을 움찔 떨었다.
그는 한때 천년비와 천빈이 동일일은 아닌가 의심했고, 사실 아직도 의구심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천빈이 가출한 상황에서 그 이름을 듣자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월요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서 물었다.
“그 무림인들이 사하비단이냐.”
“그런 얘기는 없었지만, 천년비가 포함되어 있었으니 아마 맞을 거라 합니다.”
“손잡은 종친들을 하나둘 살해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얼굴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의도가 영 짐작이 가지 않는군. 사람들은? 피해는?”
“다행히 근처에 영언하문이란 문파에 소속된 무림인들이 있어서 도왔답니다.”
무림인들이 좋은 일을 했단 이야기에 월요는 표정이 좀 심드렁해져서 “그래.”하고 덤덤히 대답했다.
하지만 부하가 새롭게 말한 이름에 그는 이번에도 손을 움찔하고 말았다.
“한데 폐하, 거기에 개원 그자가 있었다 합니다. 거기 객잔에 머무르다가 영언하문이 싸우는 걸 보고 도왔다지요.”
월요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개원?
그러나 부하의 놀라운 보고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옆에는 ‘천반숙’이란 다른 무림인이 있었고요.”
이번에는 월요도 표정을 빠르게 관리하지 못했다.
“누구?”
“천씨 반숙이란 이름을 쓰는 여인이랍니다. 이름이 좀…… 그렇지요.”
부하는 황제가 천빈을 ‘반숙아’라 부르는 걸 모르기에 보고를 올리고서도 태연했다.
반면 월요는 반숙이란 이름에 표정이 굳었다.
사정을 아는 승언과 오원요는 서로 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반숙이란 별명도 그렇지만, 거기에 천씨 성이 붙어 있자 천빈일 확률이 높게 여겨진 것이다.
두 사람은 월요 황제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황제는 그새 표정을 수습한 뒤라, 겉으로 보기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월요는 부하가 나가자마자 바로 귀자를 불렀다.
“‘천반숙’이란 여자 무림인이 개원 그자와 함께 이동 중이라 한다.”
천빈이 돌아왔나 싶어서 서둘러 달려온 귀자 역시 반숙이란 이름에 놀라 황제를 보았다.
“설마…….”
“그래. 천빈일지도 모른다. 가서 확인하고 오라.”
“예.”
귀자가 나가자, 승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그러면 개원의 본가에는…….”
“그쪽도 가야 한다. 길이 엇갈리게 된다면 분명 거기에서 만나질 테니.”
황제가 입을 다물고서 이마를 손으로 짚고 한숨을 내쉬자, 승언은 눈치를 보다가 좀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촉비 일로 천빈과 사이가 벌어진 직후.
서로 대화를 제대로 나눠볼 겨를도 없이 천빈은 사라져 버렸고, 황제는 천빈이 전염병에 걸려 출입할 수 없다고 해버렸다.
이후 황제는 천빈에 관해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지만, 어떤 후궁도 찾지 않으면서 늘 딱딱한 표정으로 지냈다.
필요할 때는 가끔 미소짓긴 했으나 그 미소도 사람들이 안 본다 싶으면 바로 사라져 있기 일쑤였다.
그런데 천빈으로 추정되는 여자가 혼자도 아니고 개원과 함께 있단 소식을 듣자, 승언은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염려되었다.
월요는 대답하지 않고 붓을 들고서 먹물을 끝에만 살짝 묻혔다.
그러나 이미 입이 댓 발은 나와 있었고, 수려한 글씨체는 왕지렁이처럼 변해 있었다.
승언과 오원요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서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 * *
하늘 색깔부터 이미 예고가 확실하더니 역시나.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미 비가 우르르 내리고 있다. 비가 계속 내리려나?
걱정이 된다. 비가 와서 궁전에 너무 늦게 돌아가면 어쩌나.
“너무 늦게 다녀가면 떡돌이가 삐질 텐데.”
그 삐돌이 자식, 지금쯤이면 입이 댓 발은 나오다 못해 오리가 됐을지도 몰라.
너그럽게 생겨서는 속이 얼마나 조그마한지.
그래. 다음에 보면 덕춘이 말고 오리라 불러야지. 근데 오리 귀엽잖아.
하긴. 떡돌이도 귀여워. 속이 쪼잔해서 그렇지.
괜히 싱숭생숭해서 내리는 비에 손바닥 뻗어 보는데, 어깨 위에 묵직한 옷이 덮였다.
돌아보자 겉옷을 벗은 개원이가 내 뒤에서 자기 겉옷을 내게 잘 덮어주고 있었다.
“감기 걸린다.”
개원이를 보자 마음이 더욱 답답해진다. 어휴…… 이놈은 또 어째야 할까. 여러모로 복잡하고 심란하네.
“오늘은 못 움직이겠다. 그렇지?”
이 와중에 그는 또 웃으면서 묻고, 그걸 보자 성질이 나서 나는 괜히 딱딱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좋아?”
“좋아.”
“!”
“너랑 있잖아.”
개원이가 손을 뻗어서 내 뺨을 감싸주자, 그의 손바닥에서 나온 열기가 나도 모르게 차가워진 내 피부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익숙한 손길이지만 슬픈 손길이어서 저절로 눈에 힘이 빠졌다.
내가 눈꺼풀을 반쯤 내리고 서 있자, 개원은 내 콧등에 입김을 불고서 속삭였다.
“네가 성질부려도 좋다. 그냥 앞에 있으면 다 좋아.”
“날 아직 연모해?”
“연모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한순간도.”
“…….”
“네가 마음이 변해서…… 내가 널 죽인 게 아니란 걸 확인한 뒤에도…… 결국 그자에게 간다 해도…… 나는 늘 네 편일 거다, 비야.”
개원이가 힘겹게 웃었고, 나는 그가 덮어준 겉옷 무게에 완전히 눌릴 지경이 되어버렸다.
이 옷 왜 이렇게 무거울까.
“네가 날 죽인 게 아니길 바라. 그런데 날 죽인 게 네 동생이면, 난 네 얼굴을 보면서 웃을 자신이 없어, 개원아.”
“그러면 다른 데 보고 웃어라. 거기에 서 있는 게 그자여도 좋으니.”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서글퍼져서, 나는 괜히 모닥불을 피워둔 곳에 가서 앉았다.
타들어가는 나무를 보고 있자니 개원이는 천천히 걸어와 땔감을 새로 불에 집어넣고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서 타들어가는 나무를 이유도 없이 쏘아보았다.
“비야. 그래도 욕심을 내어 말해보자면…… 네 상대가 황제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왜? 내가 무식해서?”
“너무 갑갑하잖아.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고. 그리고…….”
여자가 많단 소리를 하고 싶은가 본데, 자기 사촌도 후궁이다 보니 그 말은 하기가 뭐한가 보다.
그가 입을 우물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이상하게 꼬이고 불편해져서, 나는 괜히 딱딱하게 반박했다.
“떡돌이가 못되게 굴지만 않으면 나름 괜찮아. 눈 떠서 잠들 때까지 사람들이 다 챙겨주고, 내 말에 무조건 맞다 해주는 궁녀들도 있고. 여긴 그런 거 없잖아.”
“그래. 네가 좋으면 그것도 좋지.”
개원이가 쓸쓸하게 웃자 심장을 타들어가는 숯으로 긁는 느낌이어서, 나는 아예 눈을 감고 무릎에 이마를 기대버렸다.
하지만 이러고 있어도 개원이의 시선이 맞은편에서 느껴져 속상했다.
그때. 빗소리를 뚫고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개원이도 밖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무릎을 안은 나와 달리 그의 손은 그새 검 손잡이에 가 있었다.
“살기는 없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고, 나는 개원이를 믿고서 느긋하게 있었다.
그러나 비를 뚫고 나타난 사람을 보는 순간.
그보다 내가 먼저 달려가 나타난 이의 멱살을 잡아챘다.
“안녕, 녕녕.”
“타천천 이 개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