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협객과 악적의 차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나는 작게 이를 갈았다.
내 몸으로 뭐 저딴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그렇다 쳐도.
얼굴이라도 감춰줘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얼굴을 까고 저러는 거냐고!
“내 평판을 어디까지 떨어뜨릴 셈이야?”
말을 하고 나니 내 평판은 이미 바닥이란 게 떠올랐고, 거의 동시에 달려온 무림인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고서 외쳤다.
“천년비!”
“또 너인가!”
“사하비단과 손을 잡았다더니. 더욱 악독해졌구나.”
언제는 덜 악독한 취급을 해준 것처럼 말하다니. 참으로 면피가 두꺼운 것들이다.
“곤란하네. 내 껍데기로 저런 짓을 하는 놈들도 짜증 나고, 내 껍데기에 욕하는 놈들도 짜증 나다니.”
나는 중얼거리면서 옆을 보았다.
그저 짜증나기만 한 나와는 달리, 개원이는 정파의 협객 피가 끓어오르기라도 하는 건지, 내 눈치를 살살 살피던 때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입을 비죽 내밀고서 다시 내 껍데기를 쓴 작자와 다가온 무림인들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더 볼 것도 없었다.
무림인들은 뭐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더니, 곧장 피풍의들에게 달려들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멀쩡한 마을 한복판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안 그래도 길을 다 뒤엎은 마당에 진짜 무기로 치고받고 싸워대자 사방에서 비명과 검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사람들은 건물 밖으로 뛰쳐나와 그들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려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팔짱을 끼고서 돌아섰다.
“시끄럽기는. 좀 조용히 못 싸우나.”
하지만 개원이는 여전히 그들을 보고만 있었다.
표정을 보자 확신이 왔다. 협객 피가 한계까지 올라왔구먼.
“사람들을 도와야겠다.”
거봐. 저런 사람이라니까.
하지만 개원이가 어느 쪽을 도우려는 건지는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아서, 나는 자존심을 누르고 물었다.
“어느 쪽을 도우려고?”
평소라면 당연히 길을 뒤엎는 피풍의들을 공격하겠지만, 저 피풍의 사이에는 ‘내 몸’이 끼어 있다보니, 그가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할까 의아했다.
그러나 개원이의 대답에는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쪽.”
나는 슬쩍 창가로 다시 가서, 개원이의 시선이 차갑게 향하는 쪽을 보았다.
아까 피풍의 걸친 자식들이 뒤집어엎은 길에 깔려 신음하는 이들이 보였다.
그러면…… 피풍의 입은 사람들을 공격하려는 거구나.
하긴. 개원이는 나랑 연애할 때도 날 사랑한단 이유로 사파인들을 온화하게 보고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칼 같네, 칼 같아 우리 협객 나으리.
“맘대로 해. 근데 난 안 나설 거야.”
내 쪽을 힐긋 보는 개원에게 “난 아직 약해서.”라고 말하며 두 손을 들어 보이자, 개원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여기 있어라, 비야. 길이 험해 위험하다.”
뭐야. 저거. 진심인가? 아무리 다른 몸이 됐다지만, 나한테 지금 길 위험하니까 여기 있으란 거야?
잠깐 당황한 사이, 개원이 창문 아래로 망설이지 않고 훌쩍 뛰어내렸다.
* * *
영언하문의 이대제자들이 41천도에 온 건, 사하비단의 수장 타천천이 그곳에 나타났단 정보를 들어서였다.
이전이라면 사하비단처럼 작은 사파의 행동에, 그들이 하나하나 관심을 기울이고 반응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하비단은 최근 다른 흑도 문파들을 찾아다니는 건 물론 마교 쪽에도 한동안 머무르는 둥 교묘한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이젠 사하비단을 단순히 중소 흑도 문파로만 취급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하비단을 경계하고 달려온 영언하문조차도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수의 사하비단 무인들을 만날 거란 예상은 하지 못했다.
심지어 개중에 천년비까지 있으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사형. 어떡하죠?”
천년비의 얼굴을 확인한 이대제자 한 명이 여기서 가장 항렬과 위치가 높은 무정원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삼대제자들을 데리고 싸우긴 힘듭니다.”
영언하문에서 이번에 41천도로 온 이들 중엔 삼대제자가 많았다.
그리 위험한 임무가 아니기에, 이대제자들이 실전 경험도 해주고 바깥 공기도 쐬여줄 겸 몇몇 삼대제자들을 데리고 온 탓이었다.
포상 같은 외출인지라 데리고 나온 삼대제자들은 모두 제 항렬에서 제법 한가락 하는 이들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한 번에 실전에 투입해 제 몫을 해내길 기대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림악적 천년비가 이끄는 적들이 나타날 줄이야.
“삼대제자들에게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피하라 해라. 적들은 우리 이대제자들이 상대한다.”
조용한 목소리였으나 잔뜩 긴장한 영언하문의 제자들이 못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거의 직접적인 명령이나 다름없는지라, 삼대제자들은 돕겠다고 항의했지만 무정원은 단호하게 그들에게 쏘아붙였다.
“너희가 나섰다간 발목만 잡는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다 같이 싸우면 저 사람들은? 피하지도 못할 텐데 다 죽으란 소리냐?”
“하지만 사숙…….”
“우리는 정파다. 저런 자들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무정원의 단호한 말에, 삼대제자들이 입술을 악물었다.
무정원은 그 말을 끝으로 천년비를 향해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이대제자들도 저마다 무기를 꺼내 피풍의를 쓴 이들을 향해 덤볐다.
그 사이 삼대제자들은 두렵고 분한 마음을 뒤로하고, 쓰러져서 도망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이대제자들만으로는 인원수가 부족했다.
무정원은 피풍의 차림들을 상대로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으나, 현저한 수적 열세를 감당하기엔 압도적인 무위가 부족했다.
“한 번 죽었다 깨어나더니. 좀 실력이 준 것 같군, 천년비?”
그나마 다행인 건 얼굴을 봤을 때부터 악몽이나 다름없던 천년비 쪽이, 생각보다는 상대할 만하단 점이었다.
‘제길!’
그렇더라도 그 악명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제대로 된 일격은 하나도 먹히지 않는데 이쪽의 생채기만 늘어갔다.
그러다가 무정원이 뒤에서 습격하는 다른 피풍의의 검에 등을 맞을 뻔한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묵직한 검이 습격자의 검을 튕겨냈다.
“고맙소!”
인사부터 던진 무정원은 고개를 돌렸다가 나타난 이의 얼굴을 알아보고 탄성을 뱉었다.
“개원 대협!”
나타난 이는 정파의 영웅이라 추앙받는 개원이었다.
그의 등장에, 큰 부상을 각오하고 싸우던 이대제자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개중 한 명은 너무 반가워서 싸우는 와중에도 칭찬을 퍼붓고 말았다.
“천년비를 제대로 죽이기 위해 쫓고 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려!”
하지만 그 말을 뱉자마자 적들을 공격하던 개원이 곧장 뒤돌아 그 이대제자를 때려버렸다.
적을 습격할 때만큼 내공을 실은 공격은 아니었으나, 이대제자는 개원에게 맞았다는 게 충격인지 잠시 멍해졌다.
“입으로 싸우나.”
고의로 때린 거였던지, 개원은 사과는커녕 차갑게 비웃고서 다시 피풍의들을 공격했다.
무정원은 혀를 찼다. 소문보다는 성질이 더러운 자구나, 싶어서.
그러나 그 실력만큼은 소문 이상이었다.
개원이 등장하기 전에는 오히려 밀리는 감이 있던 영언하문이, 그가 합류한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우세를 점하게 된 것이다.
개원이 소문보다 성격이 좋든 더럽든 일단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라, 무정원은 천년비와 피풍의들을 상대하는 데 더 몰두했다.
하지만 적들은 생각보다 더 악독했다.
개원이 합류하면서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자, 그들은 지금까지는 내내 없는 것처럼 대하던 주위의 비 무림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그 사악하고 못돼먹은 행동에 무정원은 욕설을 뱉었다.
그나마 초반에 그들이 비 무림인들을 공격하지 않을 때 사람들 대다수가 달아나서 이 정도이지.
아니라면 정말로 큰 피해가 있을 뻔하지 않았던가.
무정원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한 피풍의를 온 힘을 다해 검으로 밀어낸 후, 그자가 떨어뜨린 검을 차서 최대한 멀리 보내며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제 발로 뛸 수 있는 이들은 진즉 다 달아났고.
길이 뒤집어질 때 다친 이들 역시 삼대제자들이 거의 다 챙겼다.
그럼 이제 남은 이들은…….
‘저 여자!’
그러나 안심하자마자 무정원은 한 여자가 객잔 3층 창가에 팔을 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척 봐도 절대로 무림인으로 보이지 않는 여자로, 옷차림만 봐도 귀족가에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곱게 곱게 자라온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왜 아직 저기에!’
아무리 곱게 컸어도 두 발이 멀쩡하면 혼자 달아날 수 있을 텐데, 왜 쓸데없이 간만 커서는 저기서 싸움 구경을 한단 말인가!
무정원은 기가 막혀 근처의 삼대제자를 찾았다.
싸움을 틈타 저 여자를 먼 곳에 데려다주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적 역시 그 여자를 발견했다.
적은 간교하고 냉정했다.
밀리는 상황에서 영언하문의 삼대제자들이 일반 사람들을 대피시켜 피해조차 줄 수 없다 싶자, 대번에 등에 맨 검을 꺼내 여자를 향해 던져버린 것이다.
“젠장!”
삼대제자에게 가서 구하라 말할 새도 없었다. 무정원은 검을 낚아채기 위해 그 방향으로 힘껏 도약했다.
그러나 팔을 뻗어도 날아가는 검은 손에 닿지 않았다. 검은 빠르게 여자의 앞으로 날아갔다.
“피해!”
무정원은 외치면서도, 여자가 피할 새도 없이 검에 맞고 쓰러지리라 생각했다.
코앞에서 사람을 구하지 못하다니. 무정원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검이 여자의 목을 베고 지나가야 할 그 순간.
팔을 괴고 무표정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여자가, 귀찮다는 듯한 팔을 뻗더니 검을 허공에서 휙 잡아챘다.
심지어 검날을.
찰나의 순간, 무정원은 여자가 이를 짐승처럼 험악하게 내밀며 으르렁대는 소리를 들었다.
“나한테 검 튀게 하지 마라.”
그게 무슨 말인지 알기도 전에, 여자는 검을 휙 뒤집어 무정원이 있는 방향을 향해 던졌다.
“!”
이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무정원은 갑자기 여자가 자기를 공격하는 데 기겁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나를?’
그러나 거기에 반응하고 뭐고 할 새도 없이, 검은 무정원의 머리카락을 베더니 아슬아슬하게 목덜미를 지나갔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무정원은 여자가 서 있는 창문 옆 벽을 딛고서 몸을 훌쩍 돌렸다.
그의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여자가 되돌려 던진 검은, 처음 검을 던진 사람의 배를 그대로 관통해 벽에 박혀 있었다.
‘저 여자는 대체?’
* * *
싸움 구경을 하고 있자니 이상한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계속 날아온다.
몇 번 되돌려 주고 있자니 너무 귀찮아서, 나는 구경을 관두고 침상으로 가 누워버렸다.
내 몸으로 저딴 짓을 하고 있는걸 보고 있자니 화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개원이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젠장. 후궁으로 안 지내더라도 절대 천년비 몸으로는 안 돌아가야지.
내 명성이 아주 ‘개발새발처발’이 되어가고 있잖아.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좀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서로 공치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풍의들이 달아났나 보네.’
잠이나 자자 싶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개원이 돌아오면 깨워주겠지.
하지만 내가 잠이 들기 전.
계단 쪽에서 소란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아까 피풍의들과 싸워대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내 방에 나타났다.
이게 뭔가 싶어서 상체만 일으켜 보자, 그자들은 내게도 갑자기 감사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멀리서 도움을 주셨지요? 다 알고 있습니다.”
“굉장한 솜씨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딱딱 검 주인들을 공격하신 겁니까?”
이게 뭔 소린가 싶어서 인상을 쓰고 듣다가 그들 제일 뒤에 선 개원이를 보자, 개원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러다 아까 내게 던져진 검을 주우러 온 인간을 보자,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구경하면서 나한테 검 던진 놈들에게 검을 되돌려 줬는데. 그걸 자기들을 도왔다고 착각한 듯했다.
아이고, 기가 막혀라. 내가 정파인들을 제정신으로 돕겠어? 나는 보란 듯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이 몸은 너희를 도운 게 아니다.”
“대인은 멋지게 냉소적이시군요!”
“뒤에서 도움을 주는 분들은 보통 이렇죠.”
“그런 점이 멋있습니다. 대체 어느 문파 사람입니까?”
하지만 내가 도운 게 아니라 부정하는데도, 그들은 이미 내가 자기들을 도왔다고 잔뜩 착각한 눈치였다.
게다가 콩깍지들이 꼈는지 내 비웃음까지도 알아서 잘 해석해줬다.
그 모습이 기도 안 차서 보고 있자니, 아까 내 앞으로 검 주우러 왔던 놈이 다가와 포권하며 물었다.
“저는 영언하문의 이대제자 무정원이라 합니다, 대협. 대협의 이름을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내 이름? 천년비다 이놈들아. 너희들이 아까 계속 싸워댄 그 천년비.
하지만 이 이름은 댈 수 없지. 그렇다고 천소여라 할 수도 없어.
아예 말을 안 해주면…… 안 갈 태세네. 에이, 아무거나 대버리자.
“반숙.”
“예?”
“내 이름. 천반숙이다.”
“아!”
좋은 이름이란 소리가 안 나오는지, 무정원이란 정파인이 잠시 눈을 데록 굴렸다.
뭐 희한해도 상관없어. 멋대로들 불러.
어차피 두 번 다시 사용할 일 없는 이름이고, 이젠 저자들과 나는 만날 일이 없으니까.